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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회] 왜구선은 별방진을, 영국함선은 환해장성을 쌓아 방어

 

위의 해녀항쟁에서 보듯 하도리(옛 지명은 별방)와 우도는, 지리적으로는 3km 정도 떨어진 바다 건너 이웃마을이고, 가장 넓은 바다를 가진 어촌마을이며, 역사적으로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별방진과 관련이 깊은 사이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왜구는 당시 무인도였던 우도에 상륙하여 주변 마을들을 노략질하였다. 지미봉수대와 종달연대 그리고 한동리의 왕가봉수대 등을 통해 교신했던 김녕방호소는 하도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김녕포구에서 수전선이 출발하면 왜구선은 멀리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1510년 우도를 잘 관찰할 수 있는 해안가인 하도리 바닷가에 특별한 방어진지가 필요하여 진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으로 지어진 별방은 옛날 하도리의 이름인 바, 특별의 別과 방어의 防자가 합쳐 별방진이라 불리게 되었다.

 

하도리 바닷가에 위치한 별방진은 길이 1000여 미터, 높이 4미터로 복원중이나 당시의 모습과는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내성 곳곳에서는 당시의 성담인 기단석의 일부도 볼 수 있다. 1697년 이후 우도에는 국유목장이 들어서고 말을 방목하기 시작했는데, 별방진의 우두머리인 조방장이 우도목장의 감목관을 겸임했다.

 

당시 왜구의 노략질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도에 9진이 구축되었는대, 명월진·애월진·조천진·화북진·별방진·차귀진·모슬진·서귀진·수산진이다. 제주에는 임진왜란 전에 이미 3성 9진 25봉수대 38연대의 군사행정 형태가 조직되어 있었다.

 

우도에 1845년경에 구축된 것으로 보이는 비양도와 전흘동의 2기의 연대들은 38연대에는 포함되지 않고 있다. 38연대를 쌓은 성담들 대부분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항만 구축용으로 바다에 투석·매립되어 사라진 반면, 우도에 있는 2개의 연대는 원형으로 보존되고 있어 문화재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여겨진다.

 

어떠한 연유로 우도에 연대와 환해장성이 구축되었는지 그 배경이 궁금하다. 1845년(헌종 11년) 6월 우도에 ‘사마랑호’라는 영국군함이 나타났다. 군인들은 흰 깃발을 세우고 섬 연안을 1개월 동안이나 머물며 수심을 측량하였고, 돌을 모아 회칠을 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다.

 

제주목사 권직은 마병(馬兵), 총수(銃手), 성정(城丁)들을 동원하여 만일의 변란에 대비하였다. 제주출신인 심계 김석익이 편찬한 탐라기년에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특히 환해장성(環海長城)이란 단어는 김석익(1885-1956)이 이 책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1845년 여름에 이양선 1척이 우도에 정박하였다. 이양인의 모습은 눈은 움푹하고 코는 높고 눈동자는 푸르고 머리는 양털과 같았다. 때때로 포를 쏘아대니 소리 때문에 산악이 진동하였다. 작은 배를 타고 줄자로 섬을 측량하였다. 백보마다 돌을 쌓고 회를 칠하고는 그 속에 쇠자루를 끼웠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3읍 연안을 두루 묻고 말하는 대로 즉시 그림을 그렸다. 목사 권직이 놀라 마병과 총수 등의 군사를 모아 이에 대비하였다. 그해 겨울에 환해장성을 수리 축조하였다.

 

위의 배는 영국군함 사마랑호로, 함장은 에드워드 벨처(Edward Belcher)였다. 함장은 1845년 5월부터 8월까지 제주도와 거문도를 항해하면서 조선의 남해안을 탐색하여 해도를 그렸다. 복장과 용모가 다른 청국인 오아순이라는 사람이 통역을 하였다.

 

배에는 200여 명의 군인과 대포, 화약, 식량 등이 실려 있었다. 1845년 5월 별방진 아래 어등포(魚登浦) 앞바다에 머무르며 작은 배 5척으로 해안에 상륙하여 돌을 쌓아 회를 칠하고 제단을 설치해 제를 지내고는 돌아갔다.

 

화북진 건입포 아래에서는 81명의 군인들이 무장을 한 채 육지로 상륙하려 했으나, 조선인 문정관이 무장해제 하라는 요구에 다시 배를 타고 대정현 지역으로 갔다. 그들은 그 후에도 마라도, 범섬 등을 살피다가 6월 10일에 다시 우도로 돌아왔다. 권직 목사가 올린 장계는 다음과 같다.

 

배의 생김새와 사람 모양을 볼 때 지난 경자년(1840년)에 소를 토살하고 배에 싣고 간 대영국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무척 험상궂고 모질었고, 대포를 쏘고 칼을 휘둘러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큰 배는 바다 한가운데 서 있었고, 왕래하는 작은 배들은 나는 새처럼 빨라서 추격해도 붙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사마랑호가 제주도 삼읍 해안에 머문 기일은 20일 정도였다. 영국함선의 무력을 실감한 권직 목사는 같은 해 겨울 삼읍의 백성을 동원하여 해안가에 환해장성을 고쳐 쌓게 했다.

 

우도에는 당시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환해장성이 제주의 어느 곳보다 많이 남아 있다. 이를 보호하는 것도 제주의 역사의식을 키우는 길이다.

 

특히 우도에는 이 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2개의 연대가 있다. 다른 곳 연대가 허물어지거나 기단조차 예전의 돌이 아닌 현대 식으로 축조된 반면, 우도의 연대는 당시 돌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2기의 연대는 우도 1번지인 비양도와 우도 최북단 지역인 전흘동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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