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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0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1962년 2월 21일, 유소기 주재로 정치국상위(常委)확대회의를 개최해 모두 함께 문제 해결 방법을 토론하였다. 이 회의를 통칭 ‘서루회의(西樓會議)’라 부른다.

 

토론 시 그해 예산이 거액의 적자가 발생했음을 발견한다. 5년 동안 누적된 적자 금액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회의에 참석자들이 모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상품 공급량과 사회 구매력 사이의 초과분은 축소된 것이 아니라 더 벌어져 있었다. 모든 분야가 절박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유소기가 말했다. “그것이 진면목인데, 두려울 게 뭐 있겠소? 칠흑같이 캄캄하다는 것은 비관적일 수도 있으나 곤란을 뛰어넘는 투쟁의 용기를 북돋는 것이 되기도 하오.” 그는 국민경제가 ‘비상시국’이라 여기고 모두 경제, 정치 방침을 제시하라고 요구하였다. “비상한 방법이 필요하오. 모든 경제 조치를 관철해 나가야 하오.” 진운(陳雲)은 회의에서 계통적으로 발언하고 각 분야의 당위 구성원들도 발표하였다. 엄중한 문제에 대하여 실사구시의 분석을 내놓으면서 난관을 극복할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3월 중순에 유소기, 주은래(周恩來), 등소평(鄧小平) 정치국 상위(常委) 세 명이 무한으로 가 모택동에게 보고하였다. 모택동은 상위의 의견에 대부분 동의한다. 그리고 전운이 중앙 재정소조 조장을 맡는 것도 찬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형세를 “캄캄하다”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적자라는 말은 거짓으로 믿을 수 없으니 다시 상의하라고 하였다.

 

5월 7일부터 11일 간, 유소기는 북경에서 중앙공작회의(역사에서는 ‘오월회의〔五月會議〕’라 부른다) 개최한다. 중앙 재경(財經)소조가 작성한 1962년 조정계획보고 초안을 토론하였다. 3년 전체의 경제상황을 고려해 보면서, 조정할 힘이 없어 당시 몇몇 간부들은 난관이 깊고도 심하여 잘못을 저지를까 겁을 내기도 하였다. 유소기는 강조한다.

 

“내가 보기에 난관을 너무 심하게 보고 있는 것 같소. 위험성은 그리 크지 않소. 우리들이 다년간 예측이 맞지 않아 너무 피동적인 상태에 빠져있게 된 것이요. 공산당원의 혁명의 기개로 난관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오.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어깨를 펴고 전진하지 않았소?”

 

‘칠천인대회’의 정신에 근거해 중앙은 근 몇 년 동안 비평과 처분을 받은 이른바 ‘우경’당원들을 사정해 복위시키기로 결정한다. 등소평은 일괄적으로 해결해 전부 복위시켜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등자회는 농촌 공작을 얘기하면서 적당히 자류지(自留地, 농민에게 집단 농장에서의 공동 작업 외에 개인적으로 경영할 수 있도록 인정한 경지)를 확대해 당원들을 만족시키고 분산된 지구에는 농가 단독으로 경작하게 하는 것도 허락하여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회의에서는 농공업 생산, 국내 상업과 대외무역, 대외정책에 관한 많은 문제를 토의하였다.

 

 

유소기는 그들의 주장에 찬성한다. 그때 그는 “충분히 물러서야 한다(要退够)”라는 명언을 남겼다. 실현 가능성을 넘어서는 것은 모두 물러서야 한다고 하였다. 균형을 이룰 수 있을 때까지.

 

전지를 나눠 단독으로 경작하게 하는 것은 말하기 어렵지만 ‘포산도호(包産到户, 농가 세대별 생산 책임제. 농업생산책임제의 한 형식. 책임진 토지·생산 도구·기술·노동력 등의 조건에 근거하여 생산량을 정하고 세대별로 책임지고 이를 완수하는 것 ; 농민들이 인민공사에서 집체적으로 농업생산을 하는 형태와는 달리 토지를 농가별로 할당받아 생산량을 책임지고 초과분은 임금형태로 지급받는 제도)’는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무조건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들어가야 하고”, “불균형이 균형보다 낫다”는 말을 좋아하는 모택동은 “물러선다”는 것은 없어진 제도가 부활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보았다.

 

일이 중대하니 모택동을 청하여 결정하기로 한다. 때마침 조사를 나갔던 모택동의 비서 전가영(田家英)이 돌아와 ‘포산도호’제를 실시하도록 건의하였다. 유소기는 그에게 모택동을 돌아오도록 청하라고 말했다.

 

전가영이 상황을 얘기하니 모택동은 “좋다! 며칠 있다가 북경으로 돌아가마”라고 대답하였다. 전가영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유소기에게 모택동이 동의할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 유소기의 부인 왕광미(王光美)는 “전가영의 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먼저 주석님의 의견을 들어봐야 할 것입니다”라고 일깨웠다.

 

한여름 7월, 모택동은 북경으로 돌아갔다. 전운이 즉각 모택동과 약속을 잡고 여러 상위들이 찬성한 의견을 계통적으로 설명하였다. 당시 모택동은 몇 마디 문제만 묻고 가부를 표명하지 않았다. 진운도 모택동이 반대하지는 않고 그저 좀 더 고려해 보는 것이라 여겼다.

 

모택동은 유소기에게 즉시 만나자고 통지하였다. 유소기는 중남해 수영장으로 달려갔다. 바로 그렇게 앞에서 기술한 갈등의 제1막이 연출된 것이다. 유소기는 돌아와서는 심한 스트레스를 느꼈다. 그러나 경제조정에 대한 입장을 충분히 견지했다는 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벼락과 천둥은 이미 지나갔다고 여겼다.

 

1962년 7월과 8월, 북대하(北戴河)에서 중앙공작회의를 개최한다. 원래 정한 의제는 농촌공작에 대한 토론이었다. 생산, 양식, 상업 등에 관한 문제였다. 열흘간 개회된 준비회의에서 질서정연하게 토론이 진행되었고 성과도 많이 거뒀다.

 

8월 6일, 회의가 정식으로 개막된다. 모든 예측을 깨고 모택동은 계급, 형세, 모순(갈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특히 “중국에 계급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기본적인 문제”라고 제기한다.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제기한다. “무산계급이 영도하지 않고 업무를 하지 않으면 집체(集體)경제를 공고히 할 방법이 없고 어쩌면 자본주의를 향하여 나가는 것이 될 수 있다.” 모택동의 발언은 경천동지케 만들었다. 원래 정한 의제를 완전히 무력화시켜 버렸다. 경제조정의 긴급 사항에 대한 토론을 진행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회의 의제는 모택동이 제기한 계급투쟁의 문제로 완전히 전환되어버렸다.

 

 

이후 회의 기간 중 모택동은 여러 차례 발언하고 말참견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갔다. “포산도호를 하기 시작하고 토지 개인 경영을 하기 시작하면 반년도 되지 않아 농촌은 계급 분화가 심해질 것이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해져 살아가지 못할 지경에 이를 것이오. 땅을 파는 사람이 있게 되고 땅을 사는 사람이 생기고, 고리대금이 난무할 것이고 첩을 들일 것이며…… 이게 무산계급 전정(專政)이요? 아니면 자본계급 전정을 하자는 것이오?” 그리고 “자본주의 농업전문가”의 모자를 등자회에게 씌워버렸다. 정치 원칙의 입장(상강〔上綱〕)에서 바라보면 ‘자본주의 부활’이라 명명해버렸다. ‘삼면홍기’를 반대하는 자들은 자본주의의 부활을 노리는 수정주의자가 되어버렸다.

 

바로 이때 팽덕회(彭德懷)가 모택동과 당 중앙에 ‘팔만언서(八萬言書)’를 써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한다. 이 글은 원래 당원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작성한 것인데 당에 도전하는 것으로 오해를 샀다. 그래서 ‘번안(飜案, 기존의 결정을 뒤집다)’이라 덮어씌워졌고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계속되는 발언 중, 모택동은 ‘단간풍(單干風, 농촌에서 집체경제를 허물고 개인경작을 선호하는 바람)’, ‘흑암풍(黑暗風, 비관적 생각과 어둡고 부패한 사회에 대한 비관주의 바람)’, ‘번안풍(飜案風, 우익 기회주의자와 반혁명분자들에게 내린 판단을 뒤집는 바람)’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비판한다.

 

직설적으로 “3분의 1의 정권이 우리 손안에 없다!”고 단언한 후 결단코 ‘반수(反修, 수정주의 반대)’, ‘방수(防修, 수정주의 방어)’하여야 할 것이라고 선언해 버린다. 그때 그 유명한 말이 된 “매해마다 말하고, 달마다 말하고, 매일매일 말해야 한다(年年講,月月講,天天講)”고 강조하면서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하여야한다”고 못을 박았다.

 

유소기는 원래 수영장에서 나눈 대화로 인하여 모택동이 다소나마 화를 누그러뜨렸고 그의 이해를 구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모택동이 생각지도 않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가하니 대단히 의외라 생각하였다.

 

며칠을 숙고한 유소기는 연이어 열린 회의와 8차 십중(十中)전회에서 자아비판을 한다. 스스로 경제문제에 대하여 과도하게 예단했다고 인정하면서 모택동의 관점에 동의한다고 천명하였다. 그의 발언은 어느 부분에 있어서 모택동보다도 더 심할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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