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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회] 내 고향 행원리 ... 추억 떠올리는 것 역시 행복의 탑 쌓는 일

 

어느 곳이든 정들면 고향이다. 필자의 고향집에는 강원도 영월에서 온 젊은이가 집의 구조를 자기의 솜씨로 리모델링하여 살고 있다. 그는 아마추어 건축가이자 음악가이기도 하다.

 

그와 맺은 임대차 계약서에는 다음의 내용도 들어 있다. 자녀를 낳아 기를 경우 자녀 수 만큼 거주할 연수를 연기할 수 있다. 교육기부하여 학교장의 감사장을 받은 만큼 연수를 연기할 수 있다. 특히 문화가 꽃피는 마을환경을 조성하고 있다고 동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경우에는 수년을 연기할 수 있다.

 

이런 계약 이면에는 그 청년에게 고향집을 자기 집처럼 여겨 정 붙이고 살라는 격려와 지원인 셈이다. 고향집은 청년에게 세 없이 5년 이상을 빌려주고 있다. 다음은 지면에 발표했던 필자의 수필들이다.

 

어느새 고향 마을이 다가온다. 요사이는 더 멀리에서도 잘 보인다. 높다랗고 커다란 풍차들이 돌아가는 곳이 내 고향 마을 행원리이다. 이웃 마을인 월정리 어귀에 있는 초등학교인 모교가 먼저 날 반긴다.

 

그 시절 ‘월정 까마귀, 행원 까마귀’라고 부르며 우리는 서로를 놀리곤 했었다. 하필 까마귀라하며 서로를 놀렸을까.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던 시절, 얼굴색이 고울 리 없다. 아이들은 세수 할 사이도 없이 농사일을 돕거나 밖으로 마냥 싸돌아다니곤 했으니까. 여름 햇볕에 그을린, 그야말로 바람 까마귀같은 촌뜨기 얼굴 들이었다.

 

불볕더위 아래 밭일을 하는 것이 고역이기 했지만 그래도 시골 아이들에겐 여름은 신나는 계절이었다. 방학이 오면 남녀 어린이들은 마당 넓은 집에 모여, 모깃불을 피워놓고 발을 서로 간질이며 억지 잠을 청하곤 했다.

 

새벽녘에 일어난 아이들은 졸린 눈으로 새마을 노래와 행진가를 부르며 줄지어 학교로 향했다. 국민체조를 마친 아이들은 경쟁하듯 마을로 뛰어가 동네 청소를 하며 밭일 간 부모대신에 마을을 지키곤 했다.

 

가장 싫은 계절은 겨울이었다. 진눈깨비가 날리는 날엔 불에 구운 조약돌을 호주머니에 넣고 책보자기를 등에 동여매고 집을 나섰다. 학교 가는 길에는 모래둔덕과 모래밭들이 즐비하였고, 등하굣길에서 맞딱뜨리는 겨울 모래 바람은 가히 칼 맛이었다.

 

우리 마을은 여러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예로부터 바람 많기로 소문난 곳이다. 나무도 바람 때문에 자라지 못하는 황량한 시골이다. 고작해야 폭낭이라 불리는 팽나무 몇 그루만 이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에 대학생이 고작 10명 안팎이던 시절, 선후배 몇 명이 모여 학우회를 조직하여 마을길에 나무를 심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머금은 바람 때문인지 나무는 여간해선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했다.

 

나의 외가가 있는 ‘가시리’엔 온 천지가 숲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왜 우리 마을엔 나무가 자라지 못할까하고 푸념도 하 였었다. 나무 없는 마을 풍경이 사람 인심까지 삭막하게 하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사방팔방에서 달려드는 바람코지에 풍차단지가 들어선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다. 풍차에서 얻는 전력 덕으로 우리 마을 사람들은 여러 혜택을 입고 있다 한다. 한여름 밤 방문을 열고 잘 때면 윙윙 풍차 날개 도는 소리에 잠을 설치기도 하지만.

 

바람 잘 날이 없는 /행원리 마을은 /제주의 한을 통째로 마시고 산다. / (중략) /행원리 앞 바다 /만상이 고요한 잠에 빠진 /깊은 밤에도 홀로 깨어 /바람결 따라 /물결 따라 /풍차도 돌아가는 / 슬픈 전설의 풍차마을

 

김정자 시인의 풍차마을에서 몇 구절 인용하였다. 우리 마을의 아픈 속살까지 들여다본 시인을 만나니 더욱 반갑다. 슬픈 전설의 바다마을에서 건져 올린 애정 어린 시어가 번득이고 바다 냄새 자욱한 어촌의 풍경이 나를 아련한 그리움으로 빠져들게 한다.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흐르는 바당(바다)은 여전히 생존의 밭이다. TV가 그야말로 안방극장 노릇을 톡톡히 했던 60·70년대, 이웃 마을보다 우리 마을이 수도와 전기 혜택을 일찍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바당 덕이다. 남녀노소가 수눌음(품앗이)으로 채취한 미역과 톳을 판매하여 마을 공동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대가 낮아 장통밭이라 불렸던 우리 밭이 바닷가 근처 어디엔가 있었다. 그 밭에는 그늘을 드리운 자그마한 동굴도 있었다. 그곳은 농사일로 지친 우리 가족들에겐 잠깐잠깐 쉬기도 했던 천혜의 피서지였다.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곳에 풍차단지가, 양식단지가, 농공 단지가 들어선 것이다. 상전벽해는 이를 두고 생긴 말일 것이다. 옛 정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고향 마을의 모습을 다시 만날 수 있으랴만. 부질없는 소망임을 알기에 차라리 나는 달라진 고향의 모습에서도 애정 어린 감회에 빠진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연자방앗간이 허물어지고, 물통이라 불린 우물이 매워지고, 초가 대신에 함석으로 지붕이 단장되면 우리도 잘 살게 되는 거라고 철석같이 아이들은 믿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전설들은 만들어지고 있었다.

 

풍차가 돌아가고 대단위 양식단지가 조성되고 해안도로가 새로 생긴 고향 풍경이 지금의 고향 아이들에겐 일상의 세계이고 삶의 무대이다. 그래도 고향 아이들이 지금의 고향 모습과 사뭇 다른 옛날의 고향 풍경을 보거나 들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전설의 부활이리라.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았다. 어려운 삶을 헤쳐 온 우리 선인들이 오늘 다시 그 후손들에 의해 회자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선인들의 전설과 만날 수 있을 텐데. 우리들 삶의 흔적까지도 후세들의 이야깃거리가 될 때 그때 우리의 살아있는 전설도 만들어질 것이다.

 

보릿고개의 어려움과 슬픔을 이겨낸 선인들이 쌓아올린 희망의 높이만큼이나 우뚝우뚝 솟구친 풍차들이 마을의 전설을 새로이 만들어 가고 있다.

 

양식장에서 떠내려 온 고기들을 잡으러 사방팔방에서 몰려드는 낚시꾼들을 보는 것도 내겐 즐거움이다. 아이들과 함께 들린 마을에서 옛 정취에 취하는 것도 행복을 꿰는 나의 낚시질이다. 오늘도 나는 훗날 그들의 추억 하나 만들어 주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고향으로 차를 몰았던 것이다.

 

인생은 행복 쌓기인 것을. 어떤 이는 돈 쌓기가 행복일 게고, 어떤 이는 자식 잘 되게 하는 것이 행복일 게다. 고향에 오면 나는 과거 회상에서 행복의 조각들을 주워간다.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 역시 행복의 탑을 쌓는 일이기에.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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