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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00)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모택동(毛澤東)과 장개석(蔣介石)은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영수다. 중국학자들이 판단하고 있는 용인술을 보자. 일반적으로 지역적으로는 ‘오호사내(五湖四海, 방방곡곡)'와 ‘황포절강'(黃埔浙江)’이라 대별하고 ; 사람을 씀에 있어서는 ‘상관하지 않고 활용’과 ‘월권적 지휘’ ; 보편적이 입장은 ‘법률에 의거한 용인’과 ‘제왕지술(帝王之術)’의 구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했다고 본다.

 

모택동은 ‘오호사내’에서 인재를 구했고, 장개석은 ‘황포와 절강’의 인재를 중용했다.

 

모택동의 ‘오호사내’에서 인재를 구한 원칙은 왕가상(王稼祥)을 기용한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1945년 4월, 중공칠대(七大)가 연안(延安)에서 개최됐다. 새로운 중앙위원회 선거에서 왕가상은 반수 이상을 득표하지 못하고 낙선한다.

 

모택동이 그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랐다. 당내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모택동은 중앙위원 후보 선거 전에 전력을 다해 왕가상을 추천했다. 왕가상은 왕명(王明), 박고(博古) 등과 함께 소련 유학파에 속했다. 당내에서 중요한 지도적 업무를 담당했지만 ‘좌(左)’경교조주의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모택동이 보기에 왕가상이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당의 발전에 중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왕가상이 당선되면 출신 지역이 다르거나 다른 부문의 동지들, 의식적으로 분파됐거나 충돌했었던 동지들, 잘못을 저질렀던 동지들에 대해 시범적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중공칠대(七大) 제20차 회의석상에서 모택동은 전체 대표를 향해 「제7차 중앙위원 후보 선거의 문제에 대해」를 연설했다. 연설의 두 번째 부분은 왕가상이 중앙위원에 낙선한 문제를 가지고 발언했다. 이 부분에서 모택동은 가장 많이 시간을 할애했고 가장 강력하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모택동은 왕가상 동지가 “비록 노선의 잘못을 범했었던 결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공헌도 있다”고 봤다. 모택동은 왕가상의 공로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특히 왕가상이 준의회의(遵義會議)와 육중(六中)전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모택동은 확실하면서도 간곡하게 요구했다. “그는 대회의 노선을 충분히 집행할 수 있다. 과거를 볼 때 사중(四中)전회 후 제3차 ‘좌’경 노선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준의회의 때, 육중전회 때 모두 이 사실을 증명한다.”

 

모택동의 연설은 대표들에게 왕가상에 대한 사실을 이해시켰다. 이후 중앙위원 후보 투표를 진행하자 왕가상은 두 번째로 많은 표로 당선됐다. 양상곤(楊尚昆)은 나중에 “모 주석이 왕가상 동지를 도와 ‘경선’했다”고 회고했다.

 

반면 장개석의 용인술은 봉건주의와 ‘청방(靑幇)’과 같은 강호(江湖)의 원칙을 강구했다. 개인의 은원을 강조하고 연고자를 임용했다. 심지어 친척과 친구, 특히 ‘황포’와 ‘절강’을 위주로 했다.

 

장개석은 ‘황포 계파’에 의지해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장개석이 장교로 임명한 자들은 대부분 ‘일본 사관학교 계파’, ‘보정(保定) 계파’, ‘황포 계파’가 주를 이루었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황포 계파’ 세력은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그 다음으로 장개석은 동향인을 임용했다. ‘절강(浙江) 방파(幇派)’는 모든 국민당 당정, 군대, 경찰, 헌병, 특무 계를 장악했다. 군사 계열에는 호종남(胡宗南), 진성(陳誠), 탕은백(湯恩伯) 등이 국민당 최강의 병력과 선진화된 무기를 보유한 군대를 장악했다.

 

특무대 계파로는 대립(戴笠), 모인봉(毛人鳳)을 중심으로 운영했는데 특무 계열은 그야말로 절강사람의 천하였다. 당무 계열로는 진과부(陳果夫), 진립부(陳立夫) 형제가 있었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바로 진성(陳誠)이다. 진성의 ‘로켓’식 출세는 그 ‘보정파벌’, ‘황포파벌’과 절강 동향의 신분과 절대적으로 관련이 있다. 전성은 절강성 청전(靑田) 사람이다. 1919년 전성은 보정군관학교 제8기 포병과에 입학했다. 1925년, 황포군관학교 포병과 상위 교관 겸 포병대 대장으로 임관한다.

 

어느 날 저녁, 친우들을 찾아왔던 그는 새벽이 돼도 잠을 자지 않고 불을 밝혀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읽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야간 순찰을 돌던 교장 장개석이 알게 되면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특히 진성이 절강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신뢰할 수 있는 인재라고 판단한다. 이튿날 새벽, 아침 점호를 끝낸 후 장개석은 진성을 포병대 소령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진성은 줄곧 장개석의 신임을 받게 되고 중용된다. 관운이 트인 것이다. 1932년, 장개석과 송미령(宋美齡)의 강력한 추천아래 진성은 국민당 원로 담연개(譚延闓)의 둘째 딸 즉 송미령의 양녀 담상(譚祥)과 결혼해 장개석의 양녀 사위가 된다.

 

진성이 장개석이 가장 총애하고 신임하는 심복이며 장수가 되니, 단번에 높은 지위에 오르게 돼 중앙군 계통 제2위 1급 상장이 된다. 대만으로 철수한 후에도 장개석 다음 가는 인물로 자리 잡는다.

 

장개석이 가까운 사람만 임용하고 사사로이 판단해 결정하는 용인술은 임의성이 너무 강했다. 어떤 때는 인재를 채택할 가능성도 있지만, 다른 방면으로는 확정적인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불복하게 되고 최후에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 떠나게 돼 버린다.

 

모택동은 “손을 놓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쓰는” 것을 강조했고, 장개석은 “직위를 뛰어넘어 지휘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옛사람이 이르길, 장수가 밖에 있을 때는 왕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전장에 있을 때는 형세가 급변할 수 있기 때문에 전선에서 지휘하는 장수가 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현장에서 제때에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최고 지휘관은 전선의 지휘를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이 점에 있어 모택동과 장개석은 달랐다.

 

‘회해전역[淮海戰役,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서주(徐州)를 중심으로 회해 이북에서 진행된 중국 인민해방군과 국민당 군대와의 대규모 전투]'은 동서고금 전쟁사상 소수가 다수를 이긴 기적의 전투였다. 중대한 승리를 얻은 까닭은 모택동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다른 사람의 권고를 흔쾌히 받아들인 데에 있다. “손은 놓고 활용했다.” 그리고 속유(粟裕)의 비상한 전략과 과감하게 전개한 담력이 큰 몫을 했다.

 

회해전역의 전략 결정과 지휘 중 소수민족 출신 속유가 가장 중요한 공헌을 했다. 주력군을 장강 이북에 집중해 전쟁을 치렀다. ‘회해[淮海, 서주(徐州)를 중심으로 한 회하(淮河) 이북과 연운항(連雲港) 서쪽 지역]'지역이 핵심지역이었다.

 

그런데 원래는 회음(淮陰), 회안(淮安)을 공략하고, 해주(海州)와 연운항을 공략하면서 황백도(黃百韜) 군단 등 10여 개 사단을 섬멸한 후 동쪽으로 황해 해변에서 서쪽으로 예환(豫晥, 허난성, 안휘성) 변경까지, 북으로는 농해로(隴海路, 연운강에서 감숙성 란주까지의 길) 양측에서, 남으로는 회하까지 전투를 확대하면서 국민당 80만 군대와 대결전을 벌이는 것으로 전략을 짰다. 이른바 ‘소회해(小淮海)’가 ‘대회해(大淮海)’로 변한 것이다. 이 전투 전략은 모택동이 심사숙고해 결정한 후 모두 중앙 군위의 명의로 실시할 것을 반포했다.

 

‘맹량고전역[孟良崮戰役, 1947년 3월 말 벌어진 산동성 맹량고(멍량구) 전투는 내전 초기 인민해방군이 ‘운동전’을 펼친 대표적 전투로 꼽힌다]' 이후 속유는 중원 전세를 바꿔 진공 전략으로 바꾸는 구상을 한다.

 

중공 중앙은 1947년 12월 형세를 근거로 군대를 나눠 남진하는 전략을 모색하고 중원 전장에서 일부 군대를 차출해 장강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 보내 중원 전장에 있는 국민당 주력 부대를 변동시키도록 유도할 계획을 세웠다. 이런 전략에 대해 속유는 숙고를 거듭한 끝에 세 차례에 걸쳐 중앙에 직접 보고하고 중원 전장에 병력을 집중해 전투를 치르자는 건의를 한다.

 

1948년 1월 22일, 속유는 중앙 군사위원회에 ‘子養電’[전보를 치는데 지지(地支)로 월을 대신하고 운목(韻目)으로 일을 대신하는 관례에 따른 것으로 ‘子養’은 곧 1월 22일이 된다. 그래서 ‘자양전’이라 부른다]을 보낸다. 1월 31일, 그는 중앙 군위에 2000자에 달하는 전보를 보내 ‘자양전’의 관점과 건의를 다시 설파했다.

 

4월 18일, 그는 재차 중앙 군위에 “대담하게 직접 진술해” 중원 황회[黃淮, 황하(黄河) 이남 회하(淮河) 이북 사이의 모든 지역]에서 병력을 집중해 대규모 섬멸전을 벌이자고 건의했다.

 

속유의 세 번에 걸친 건의는 모택동의 주목을 받았다. 연구를 거쳐 기존에 결정된 전략방침을 바꾸지 않는다는 전제아래 속유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 중대 결정이 ‘회해전역’의 최초의 청사진이다.

 

 

연이어 속유의 결정적인 건의는 또 ‘회해전역’을 ‘소회해’에서 ‘대회해’로 확대 추진하도록 영향을 줬다. ‘예동(豫東, 하남 동쪽)전역(戰役)’ 승리 후 속유는 곧이어 중앙군위에 ‘회해전역’을 실행할 것을 건의한다. 하루 동안 신중하게 고려한 후 중앙군위는 모택동 초안의 회답 전보를 보낸다. “우리는 회해전역의 실행이 분명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10월 31일, 속유는 또 중앙군위에 전보를 보내 건의한다. “이번 전역의 규모가 큽니다. 진의(陳毅) 군단장, 등소평 정위(政委)가 함께 지휘하기를 원합니다.” 모택동은 연구를 거쳐 즉각 동의했다.

 

11월 7일, 회해전역이 시작된 다음날 속유 등이 분석 후 제때에 결정해야만 시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판단하고 회해전역을 ‘남선(南線)’ 전략으로 변화시켜 결전해야 한다고 중앙군위에 전보를 보낸다. 그것이 유명한 ‘제진전(齊辰電)’이다. 11월 9일 심야에 중앙군위는 동의한다는 전보를 보낸다.

 

이렇듯 모택동은 누차 속유의 건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회해전역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중국 전쟁사의 기적을 이뤄냈다.

 

모택동과는 선명하게 대비되는 인물이 장개석이다. 장개석은 부하 장군들을 충분히 신임하지 못했다. 사전에 머뭇거려 결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명령을 내린 이후에도 그들을 믿고 자신들의 판단아래 진행하도록 그대로 놔두지 못했다.

 

일선 지휘관들의 판단을 초월한 지휘를 일삼으며 자주 불리한 방향으로 전투가 전개됐다. 바로 국공내전 중 ‘삼대전역[三大戰役, 중국 내전 중의 요심(遼瀋), 회해(淮海), 평진(平津)의 3대 주요 전투]' 중의 하나인 ‘요심전역’이 전형적인 예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장개석은 먼저 웅식휘(熊式輝)와 진성(陳誠)을 동북지방으로 파견해 전투를 벌였으나 해방군에 의해 참패당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장개석은 당시 가장 유능한 장군이라 칭송이 대단했던 위립황(衛立煌)을 떠올렸다. 위립황의 군사 재능과 명성을 빌어 동북 전선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했다.

 

위립황은 안휘성 합비(合肥) 사람이다. 항일전쟁 때 활략한 장군으로 일본군 화북 최고사령관 가츠키 기요시[Katsuki Kiyoshi, 향월청사(香月清司)]가 ‘중국 호랑이 장군’이라 불렀고, 미국 스틸웰(Stilwell)은 그를 국민당 군대에서 가장 능력 있는 장군이라 봤다.

 

장개석은 위립황을 동북 행원 부주임 겸 동북 ‘초총[剿總, 초비총사령부(剿匪總司令部)]' 총사령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장개석은 위립황의 능력을 믿으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위립황이 동북지역으로 출발하기 전, 장개석은 친히 위립황의 비서를 만나 한 번 더 확인하기도 했다.

 

위립황이 동북지역으로 부임한 후, 장개석이 전보를 쳐 포위망을 뚫으라고 명령하든 말든 각 지역의 군대가 긴급 상황을 타진하든 말든 그는 주력을 심양(瀋陽), 금주(錦州), 장춘(長春) 부근에 집중하고는 출전을 거부했다.

 

 

장개석은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위립황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긴급 명령을 보내 심양 전선을 뚫고 주력을 금주로 철군해 해방군이 산해관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비하라 했다. 필요하면 길림(吉林), 장춘을 포기하고 심지어 동북지역 전체 병력을 화북으로 철군하라고 했다. 그러나 위립황은 자기 판단을 견지하면서 재삼재사 장개석의 명령을 거절했다.

 

그러자 장개석은 더더욱 위립황을 믿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동북지역에서 자신의 명령만을 따르는 장군을 물색했다. 장개석은 요요상(廖耀湘)과 범한걸(範漢傑)에게 뜻을 뒀으나 만족할 수 없었다.

 

1948년 9월 12일, ‘요심전역’ 전투가 시작되자 해방군은 국민당 군대를 금주, 금서(錦西) 2개 고립 지역으로 몰아넣었다. 장개석은 형세가 심상치 않자 급히 북경으로 날아가 직접 지휘했다. 그는 위립황에게 즉각 요동 서쪽으로 출격해 금주의 포위망을 뚫을 것을 명령했다. 위립왕은 금주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는 관내 군대가 출병해서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을 견지하면서 장개석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개석은 전투가 긴박하다 여기고 10월 2일, 15일, 18일, 세 번이나 심양으로 날아가 직접 작전을 지휘했다. 위립황이 거느리고 있던 동북 당정군의 능력 있는 장교들은 완전히 한쪽으로 배제돼 버렸다. 위립황을 철저하게 제쳐놓기 위해 장개석은 두율명(杜聿明)을 동북 ‘초총’ 부사령관 겸 기료열[冀遼熱, 하북성(河北省), 열하성(熱河省), 요녕성(遼寧省)]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금주 수복을 명했다. 결과는? 동북지방 전체가 해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동북의 전 지역이 해방군 관할이 되자 장개석은 모든 책임을 위립황에게 돌려 해직시킴과 동시에 조사해 처벌했다. 위립황은 어쩔 수 없이 쫓겨났고 장개석과 완전히 등을 돌렸다.

 

모택동은 ‘법에 의한 용인술’을 강조했고 장개석은 ‘제왕지술’을 발휘했다.

 

1937년 10월 5일, 항일군정대학 제6대대장 황극공(黄克功)이 섬북공학(陝北公學) 여학생 류천(劉茜)에게 결혼을 강요했으나 이루지 못하자 총으로 사살해 버린 사건, 즉 ‘황극공사건(黄克功事件)’이 발생했다. 그 악질적인 사건에 대해 여론이 분분했다. 합당하게 처리하지 못하면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사건 발생 후, 황극공은 죄를 인정하고 체포됐다. 그는 당과 변구[邊區, 중국의 해방・항일 전쟁 시기에 중국 공산당이 몇 개 성(省)의 변경 지역에 세웠던 혁명 근거지]가 자신이 최고참이고 공로도 많기 때문에 살 길을 열어 가볍게 처벌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는 모택동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참회를 하고 있다는 말 이외에 자신이 다년 간 혁명을 위해 분투해 왔던 것을 감안해 살 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에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 : 하나는, 황극공이 홍군의 중요한 간부이고 당에 공로가 있으니 공을 세우게 하여 속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황극공이 해방구 법령을 범해 공산군의 강철과 같은 기율을 훼손시켰으니 극형에 처해 평민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한다.

 

모택동은 법에 의거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섬북공학 운동장에서 황극공을 공개재판했다. 변구(邊口) 고등법원은 황극공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법원이 판결을 선포한 후, 모택동은 10월 10일에 섬감녕(陝甘寧) 변구 고등법원장 노경천(雷經天)에게 편지를 보냈다. 모택동은 엄정하게 제기했다. “황극공의 과거 투쟁 역사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오늘에 와서 극형에 처해진 것은 나와 당 중앙 동지 모두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 공산당원으로써 홍군 간부로써 그렇게 비열하고 잔인하며, 당의 입지를 무너뜨리고 혁명의 기치를 훼손시키고 사람 된 도리를 잃어버린 죄행을 저질렀다. 이를 사면하게 되면, 당이나 홍군, 혁명가에게 교육적이지 못하고 사람됨을 교육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중앙과 군위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죄행에 대해 당과 홍군의 기율에 근거하여 극형에 처할 수밖에 없다.” “모든 공산당원, 모든 홍군 지휘관, 모든 혁명가 모두 황극공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황극공은 출당 조치를 당한 후 법에 의해 처결되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군중들은 이구동성으로 칭찬했다 : 공산당, 팔로군은 결점을 눈감아 주지 않고 법을 왜곡하지 않으며 공정무사하고 기율이 엄격하구나, 실로 대단하구나.

 

같은 급의 고급 장교, 국민당의 장령보(張靈甫)는 다른 운명의 길을 걷는다. 장개석은 사람들의 마음을 구슬리기 위해 ‘제왕지술’의 입장에서 당의 기율과 법규를 팽개치고 무고한 처를 총살한 장령보에 대해 모택동과는 다른 태도와 처리 방식을 취했다.

 

장령보는 국민당의 최고급 장교였다. 국민당 군정 제74사단 사단장을 역임했다. 장령보가 처를 살해한 사건은 여러 판본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인 이야기는 대동소이하다.

 

장령보는 헛소문을 잘못 믿어 자신이 처인 오해란(吳海蘭)이 부정하다고 의심을 품고 질투심에 휩싸였다. 음력 섣달그믐날 밤, 장령보는 오해란에게 후원 채소밭에서 채소를 뜯어다가 교자를 만들라고 했다. 오해란이 허리를 굽혀 채소를 캐려고 할 때 권총을 꺼내 등 뒤에서 사살했다.

 

이것이 서안(西安)을 뒤흔든 ‘단장고성살처안(團長古城殺妻案)’이다. 사건 직후 장령보는 시체도 수습하지도 않고 태어난 지 몇 개월도 채 안 된 딸을 내버려두고 부대로 돌아가 버렸다.

 

사랑하는 딸이 아무 이유 없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오해란 부모는 노여움을 억제할 수 없어 소송장을 작성해 고소했다. 서안 여성계도 강한 의분을 표명하면서 공동으로 전국 여성부장 송미령(宋美齡)에게 상소해 흉수를 엄격하게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송미령은 장개석과 함께 신생활운동을 적극적으로 고취하고 있었다. 사회도덕과 국민정신을 개조한다는 의미였다. 장령보 사건은 사회도덕을 위반했을 뿐만 아니라 국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장개석에게 알렸다. 장개석이 듣고는 격노했다. 호종남(胡宗南)에게 장령보를 체포해 남경으로 압송해오라고 명령했다.

 

 

호종남은 어쩔 도리 없이 장령보에게 자수하라고 권했다. 그렇게 해서 장령보는 단신으로 남경으로 건너간 후 노호교(老虎橋) 모범 감옥에 갇히게 된다. 장개석은 심판 후 엄격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때마침 ‘칠칠사변[七七事變, 노구교(盧溝橋)사변이라고도 한다.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이 중국 북경 노구교에서 중국군에게 공격을 가한 사건으로 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됐다]'이 터진다. 칠친사변은 장보령에게 활로를 열어준 전환점이 된다.

 

국민당 정부는 징역을 살고 있는 모든 장병 중 정치범 이외에는 일률적으로 군에 복귀해 공을 세워 속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호종남, 왕휘무(王輝武) 등 소위 자신이 아끼는 장교들이 청원하자 장개석은 비밀리에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장령보를 석방한다.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이기 위해, 동시에 새로이 태어났다는 결심을 보이기 위해, 재기한 장령보는 원래 이름인 ‘장종린(張鐘麟)’을 ‘장령보’로 개명한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장령보는 74군 군단장 겸 남경 경비사령관으로 승진했다. 74군단은 ‘어림군(御林軍)’이라 불렸고 장령보는 ‘어림군 통령’으로 불렸다. 장개석의 복심이며 애장이 된 것이다. 74군은 74사단으로 개편됐고 장령보는 사단장을 맡아 맹량고(孟良崮)에서 인민해방군과 결전을 벌였다. 그리고 끝내 장개석과 운명을 같이 했고.

 

분명 장령보는 장개석의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국민당의 큰 뜻을 훼손하는 방해물이 돼 중국인민의 인심을 잃게 됐으니. 그 결과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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