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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둘째, 중원대전에서 장개석에게 보좌에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장개석은 자수성가해 전국 영수의 자리에 앉은 인물이었다. 세가의 배경도 없이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났다. 그렇기에 과정이 순탄치 않았고 비바람이 그칠 새 없었다.

 

1924년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역임할 때에도 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당내 지위도 높지 않았다. 중앙위원도 아니었다. 몇 개월 후 손중산(孫中山)이 병으로 세상을 뜰 때 정한 후계자는 왕정위였다.

 

장개석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투쟁했다. 교군(校軍), 당군(黨軍)을 조직하고 국민혁명군 제1군을 조직하면서 점차 군권을 넓혀 나갔다. ‘중산함 사건’, ‘정리 당무안’, ‘4.12’, ‘청당(淸黨)’을 겪고 남경에 중앙을 세우면서 당권을 쟁취해 나갔다.

 

그 과정을 ‘사전적 서술’로 간단하게 살펴보자.

 

손중산이 1925년에 북경 정부의 임시 집정인 단기서(段祺瑞)와 국민회의 소집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북상했다가 병사한다. 따라서 광동 정부는 국민정부로 개조됐는데, 개조에 앞장섰던 왕정위(汪精衛)가 주석, 요중개(廖仲愷)가 재정 부장이 되면서 좌파가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좌우파의 대립이 나타났다. 요중개가 우파에 의하여 암살됐다. 황포군관학교 안에서도 좌우파의 대립이 심했다.

 

한편 중국 공산당에 의해 농민·노동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중공은 농민강습소(農民講習所)를 중심으로 공산주의교육을 받은 농촌 지도자들을 양성해 중국 국민당 조직에 침투시켰다. 또 공산당의 책동 아래 1925년 5월 30일 상해에서는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켜 반제국주의 운동, 즉 ‘5·30 운동’이 일어났다. 6월에는 성항(省港, 광동성과 홍콩)에서도 노동자의 파업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이에 우파인 추로(鄒魯)와 임삼(林森) 등은 북경 서산(西山)의 벽운사(碧雲寺)에 안치한 손중산의 영전 앞에 모여, 당 내 공산당의 활동을 제한해 공산당 당원의 당적 취소와 보로딘의 고문 해직 등을 결의했다. 이들을 '서산 회의파'라고 한다. 광주의 국민당 좌파 측에서도 이에 대응해 '서산 회의 탄핵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때 중국 국민당에 신우파가 등장했다. 이른바 ‘중산함 사건’을 계기로 노골화됐다. 1926년 3월 20일에 중산함이 광주에서 황포로 출항했다가 다시 광주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그 목적은 공산당이 장개석을 납치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라고 했다. 이를 계기로 장개석은 광주에서 소련인 고문의 숙소와 공산당 당원을 수색했으며, 국민 혁명군에서 공산당 당원은 물러나도록 요구했다. 이를 ‘3·20 사건’ 또는 ‘중산함 사건’이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장개석은 1926년 5월에 소집된 중국 국민당 제2기 2중전회(중앙위원 전체회의)에서 ‘당무정리안’을 제출했다. 공산당 당원은 중국 국민당의 당직을 맡을 수 없고 공산당 당원의 명단을 제출하도록 했다. 이로써 중국 국민당 안의 공산당 당원들은 활동을 제한받게 되고 ‘청당'(淸黨, 국민당에서의 공산당 당원 축출)이 시작된다. 이후 신우파의 세력이 당권을 장악했으며 이들이 제의한 북벌안도 좌파의 반대 아래 통과됐다.

 

이렇게 한걸음 한걸음 비주류에서 왕정위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리고 과거 동맹관계였던 중공을 제거하면서 최종적으로 국민당 당․정․군의 최고 영수가 됐다.

 

장학량이 기치를 바꾼 후 전국을 통일한 장개석의 명성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그의 지위는 아직 공고하지 못했다. 과거 동맹을 맺었던 공산당을 ‘청당’했으나 북벌의 지방 실력자 이종인(李宗仁), 풍옥상(馮玉祥), 장발규(張發奎), 당생지(唐生智) 등이 전후로 거병해 그의 권위에 도전했다.

 

전쟁이 연이어졌고 봉화가 끊일 날이 없었다.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다행이도 그들은 연합하지 않고 개개인이 거병했었다. 시차가 생긴 것이다. 장개석은 하나하나 그들을 격파하면서 잠시나마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패전한 지방 실력자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1930년 3월, 풍옥상, 염석산(閻錫山)과 이종인 3명이 연합해 장개석 반대 투쟁에 나섰다. 염석산이 ‘중화민국 육해공군 총사령’이 되고 풍옥상, 이종인은 부총사령관이 됐다.

 

이번 장개석 반대 진영의 규모는 공전의 기세였다. 전국 주요 지방 실력자들이 연합함으로써 병력이 100만에 이르는 규모였다.

 

그리고 국민당 당내 양대 중요 반대파 왕정위 ‘개조파’와 추로와 사지가 이끄는 ‘서산회의파’가 호응했다. 일시에 문무 모두 모이니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중앙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개석의 힘을 압도했다.

 

얼마 없어 장개석 반대 진영은 1927년 4월에 장개석이 조직한 ‘국민정부’를 본떠 염석산이 주석이 되고 왕정위, 풍옥상, 이종인 등이 위원이 된 새로운 ‘국민정부’를 세웠다.

 

전투가 시작되자 기세등등한 장개석 반대 진영을 막아 낼 수 없었다. 승승장구, 연전연승이었다. 풍옥상의 서북(西北)군이 앞장섰다. 용맹스러웠고 전투에 능했다. 장개석의 직계 부대는 연전연패 당했다.

 

5월 31일 당일, 장개석 반대 진영의 정대장(鄭大章)이 지휘하는 기병대가 하남 상구(商丘) 류하(柳河) 비행장을 급습해 비행기 12대를 파괴했다. 비행장 부근에서 지휘하고 있던 장개석이 하마터면 포로가 될 뻔했다.

 

오래지 않아 교전 쌍방이 끊임없이 진격하고 방어하면서 승부를 겨뤘지만 일시적인 교착상태에 빠져 자웅을 겨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전국적인 힘을 가진 군벌이었던 장학량은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장학량은 교전 쌍방이 끌어들이기에 안간힘을 쓰는 당사자였다. 장개석 반대 진영은 육해공군 부총사령관이란 직함을 줬고 장개석도 장학량에게 사람을 보내 육해공군 부사령관의 위임장 및 인장을 전했다.

 

장학량의 동북군은 30만이었다. 해군과 공군의 힘은 전국 제일이었다. 당시 동북지방은 경제가 발달돼 있었다. 자원도 풍부했다. 동북 병기공장은 선진적이었다. 장학량의 지지를 받는 쪽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장학량은 초한쟁패(楚漢爭霸) 중의 한신(韓信)이나 다를 바 없었다. “두 군주의 목숨은 내게 달렸다. 제가 한을 위하면 한이 승리할 것이요 초와 함께 하면 초가 승리할 것이다.” 한신이 했던 말 그대로였다.

 

장학량은 처음에는 중립을 표명하면서 전쟁을 멈출 것을 권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여전히 장개석 쪽에 쏠려 있었다. 그가 분석한 결과는 이랬다. “장개석을 반대하는 북방 군사연맹은 안정적이지 않은 느슨한 연맹이다. 남경 정부를 무너뜨린다고 해도 나중에 자기들끼리 분쟁이 벌어질 것은 자명하다. 그렇게 되면 혼란한 분쟁국면은 연장될 것이다. 장개석은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북방의 저 오합지졸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약간 우세하다. 모든 정세로 볼 때 언젠가는 전쟁을 끝내고 화의해야 할 것이다. 빨리 국가 동일을 실현해야 한다.”

 

그래서 장학량은 마침내 “관내로 출병해 내전을 끝내”기로 결정하고 10만 정병을 북방으로 보낸다. 장개석을 지지하고 장개석 반대 진영을 배후에서 공격한다. 장학량이 장개석을 돕기 위해 출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병력이 산해관 내로 진군하기도 전에 장개석 반대 진영은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염석산이 연이어 “끝났다, 끝났어”를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급히 ‘국민정부 주석’ 자리를 내려놓았다. 왕정위도 급히 북경을 떠나 멀리 도망쳤다. 장개석 쪽에서는 기뻐 날뛰며 서로 손을 잡고 축하했다.

 

10여 일도 지나지 않아 산해관을 넘은 동북군은 모든 화북지방을 점령한다. 전세는 급변했다. 장개석 반대 진영은 급속하게 와해됐다. 그해 11월 4일, 염석산, 풍옥상 두 명은 하야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육해공군 총사령부도 취소한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중원 대전은 장개석이 승리를 거두면서 막을 내린다.

 

 

이후, 전투에 능했으며 상당한 힘을 가졌던 풍옥상의 서북군도 완전히 와해돼 근거지조차 잃게 된다. 부하들은 항복하거나 흩어졌다. 다시는 중원에 정립할 힘을 완전히 잃었다. 궐기했던 염석산 진군[晉軍, 산서(山西) 중심 군대]도 움츠러들어 다시는 장개석에게 도전하지 못했다. 동산재기하려 했던 이종인, 백숭희(白崇禧)의 계림 파벌 부대도 큰 타격을 받았다.

 

몇 개월 후인 1931년 9월 18일, ‘9.18사건’(일본괴뢰정권 만주국에 세워지고 마지막 황제 아이신기오로 부의 등극)이 발발하면서 장개석의 중앙 직계와 함께 승전이란 영광을 안았던 장학량은 동북지방을 빼앗기면서 원기를 크게 잃게 된다. 유일하게 장개석만 끄떡도 하지 않고 정계를 제패하게 됐다.

 

장학량이 협조아래 중원 대전에서 완승을 거둔 장개석은 독단적으로 정치를 전횡한다. 천하를 굽어보면서 “내가 아니면 누가하랴?”며 혼자서 중국 정치를 주재하게 됐다. 장 씨 왕조가 건립됐다고나 할까.

 

장개석은 장학량의 과감한 두 번째의 도움을 잊지 않았다. 그에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모든 것을 주었다.

 

첫째, 정식으로 중화민국 육해공군 부사령관에 앉혀 요녕, 길림, 흑룡강, 산서, 차하얼, 열하, 수원(綏遠), 하북 8성의 군대를 통솔하는 책임을 맡겼다. 북경, 천진, 청도 3개 도시와 하북, 차하얼 2개 성을 관할했다.

 

둘째, 1030년 11월, 남경으로 초청해 극도의 예우를 했다. 천진에서 남경으로 오는 도중에 장학량을 환영하는 표어를 붙였다. “촉진 통일, 공고 변방, 노고와 공이 높고 중앙을 성심으로 옹호한 장 부사령관을 환영한다!” “장 부사령관은 평화 종전의 사절이다!” “장 사령관은 국가 통일의 모범!”

 

셋째, 친히 성대한 환영 주연을 베풀었다. 넷째, 장모 예계진(倪桂珍)으로 하여금 장학량의 처 우봉지(于鳳至)를 양녀로 삼도록 했다. 다섯째, 도원결의를 본떠 장학량과 결의형제를 맺었다.

 

장학량은 흥분을 휩싸여 말했다. “학량이 이번에 국민정부에 와서 장 주석의 정성어린 환영을 받았고, 그 성대함이 학량의 상상을 뛰어넘었습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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