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조보 : 장개석의 개인적인 군사 재능이 모택동과 차이가 있다는 점이 실패의 커다란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나?

 

고화 : 장개석은 군사 방면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몇 십 년 동안 전쟁을 치렀다. 그런데 장개석은 계통적인 군사 사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모택동에게는 “10대 군사 원칙”이 있었다. 어떤 때는 장개석의 전략적 안목이 정확하기는 했다. 그런데 자기의 의견이 옳은 게 분명한데도 반대가 있으면 끝까지 견지하지 못했다. 1948년 2월, 장개석은 여러 차례 위립황(衛立煌)에게 금주(錦州)로 주력군을 철군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위립황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장개석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뒀다. 부작의(傅作義)에게 철군해 남하라하고 했으나 부작의는 차하얼과 수원(綏遠, 1928년 중국 북부 내몽고内蒙古에 설치한 성으로 1954년 내몽고 자치구에 병합) 지역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화북을 지키는 것이 대세이고 강남으로 철수하는 것은 일부지역에 안거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장개석도 동의해 버렸다.

 

더 중요한 것은 장개석의 군사 전략에 중대한 결점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목에 ‘보성수지(保城守地, 도시와 지역을 지킨다)' 중심의 군사 전략의 줄이 걸려 있었다. 장개석은 한 도시 한 지역의 득실과 국제적 시선에 무척 연연했다.

 

1947년 이후, 그는 도시와 지역을 지키고 탈환하는 전략을 명확하게 했고, 도시와 토지를 확보하는 것을 작전 목표로 삼았다. 그것이 당연하고도 당연한 것이라 봤다. 국민당 정부는 집정 당국이니 이른바 “국토를 수호하고 국민을 보호하는” 책임을 담당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군이 지켜야 할 땅은 너무나도 넓었다. 해방군이 진격해 오기 시작하자 한 곳을 지키면 다른 한 곳을 빼앗겼다. 병력을 넓게 쓸 수 없었다. 해방군에 의해 각각 섬멸됐다. 장개석은 그런 현상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방어를 하려해도 모든 지역을 방어할 수 없고, 이쪽을 치면 저쪽에서 준동하니, 실로 계책이 없구나”고 탄식했다. 그래서 국민당은 “장정(壯丁)을 붙잡아다가 병력을 충당”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민원이 하늘을 찔렀다.

 

장개석은 국민당 군대를 지휘함에 있어서도 엄중한 문제가 있었다. 그는 줄곧 직급을 초월해 직접 지휘하는 것을 좋아했다. 장개석의 곁에서 작전사무를 책임졌던 국방부 삼청 청장 곽여괴(郭汝瑰)는 몇 십 년 후 다음과 같이 썼다 :

 

당시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고 전장의 상황은 수시로 변했다. 장개석은 전방의 보고를 근거로 지시하고 명령을 내렸지만 명령이 전달될 때에는 이미 상황이 변해 있었다. 사단장은 군법 심판이 두려워 장개석의 명령이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집행하기도 했다. 그 당시 백숭희(白崇禧)도 장개석은 “전방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상황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해 판단이 자주 틀렸다”고 비판하며, 국민당 군대가 실패한 것은 장개석이 군사에 간섭한 결과라고 여겼다. 하응흠(何應欽)은 부대의 용인술을 비판했다 : 연대장 이상은 모두 장개석이 직접 결정했다. 국방부 평판회의 심사를 하나도 거치지 않았다. 그래서 군사에서 실패했다.

 

 

백숭희 등의 비판을 장개석은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8년 8월 7일, 장개석은 일기에서 반박했다. “요사이 하응흠과 백숭희의 언행을 보면 군사 실패가 모두 내가 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데서 왔다고 하면서 내 개인에게 잘못을 돌리고 있다. 내가 정식적으로 명령을 내려 모 부대의 작전을 지휘했는가를 자문해 봤다. 전방의 장교들이 통신을 통해 지시를 요구했다. 내가 최고사령관이니 어쩔 수 없이 지도 감독의 책임이 있음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장개석은 하음흠에 대해 욕을 했다. “이 사람은 공을 다투는 기술이 과하다. 극도로 교묘하다. 선전 방법도 모두 공비 행위를 배웠다. 기회를 틈타 사리사욕을 취하는 데에 능한 자이다. 갖은 잔꾀를 다부려도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궁지에 빠지는 게 애석하다. 아무런 소득이 없구나. 20여 년을 배양해도 스스로 자립하는 인재가 되지 못했다. 시종일관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면서도 스스로 느끼지 못한다. 패기도 없고 인격도 없다. 실로 내 일생의 심혈을 낭비했구나.”

 

조보 : 장개석의 호오가 일본사관학교의 정식 졸업생이라는 것에 있는가?

 

고화 : 장개석의 군사교조주의는 무척 심각했다. 내전 초기에 장개석은 승리의 ‘보물’을 ‘속전속결’에 뒀다. 그리고 전술 수칙을 정했다. “공산군 주력을 궤멸시키기 전에 각 행군 종대는 전술 원칙을 엄수해야 한다. 매 종대는 1여단 병력을 기준으로 한다. 하루 행군은 20킬로미터를 기본으로 하고 많아도 25킬로미터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 행군 서열은 구 일본 전술을 따른다. 첨병, 전병, 전위, 그리고 본대, 후위, 측위 등의 부서 순으로 한다.” 이러한 지령은 세밀하고 엄정하다고 할 수는 있다. 옛날 프로이센, 일본 사관학교의 전술학 교안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다양하고 순식간에 변하는 전장의 형세에 어찌 대응할 수 있었겠는가?

 

장개석은 또 구체적인 전술을 지도했다. 예를 들어 ‘포대 전술’(포대 모양으로 포위해 적을 섬멸하는 방법), ‘반 포대 전술’, ‘견벽청야'(堅壁淸野, 성벽을 굳게 하고 곡식을 모조리 걷어 들인다는 뜻으로 적의 양식 조달을 차단하는 전술), ‘주동 출격’, ‘방어 중 공격’, ‘공격 중 방어’ 등등이 그것이다.

 

모두 결코 틀릴 수 없는 교과서적인 용어들이다. 그런데 그걸 기계적으로 운용하면 몸놀림이 재빠르고 고정적인 전법이 없는 해방군을 어찌 쫓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과 비교하면, 임표(林彪)는 전장 전술 원칙을 총결했다.

 

그에 대해 국군 장군 섭곤(葉錕)이 대만으로 패퇴한 후 50년대 초 ‘혁명실천연구원’에서 결론을 내리면서 말했다. “임표의 일점양면(一點兩面, 예를 들어 한 소대가 적의 화력이 집중된 곳을 공격할 때 1개 분대는 정면으로 공격하고 2개 분대는 적의 측면이나 뒤쪽에서 공격함) 전술은 공비의 각급 지휘관에서부터 사병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해할 수 있었고 실행할 수 있었다. 완전한 시스템을 갖추었다.”

 

 

조보 : 용인술에 있어서도 장개석은 특출한 점이 없었는가?

 

고화 : 동북지역에서 장개석은 전투에 임하면서 장수를 바꿨다. 먼저 두율명(杜聿明), 그리고 진성(陳誠), 나중에는 위립황(衛立煌) 등으로 바꿨다. 그러면서도 중용하지 않았다. ‘회해전역'[淮海戰役, 서주(徐州)를 중심으로 국민당의 류치(劉峙)군단 60만 명과 중국공산당 화동(華東) 야전군과 중원야전군 60만 명이 벌인 내전]은 국공이 사활이 걸린 결전이었다. 그때도 장개석은 규칙이 없었다. 그가 중용한 인물들은 제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모택동도 동북지방에서 장수를 바꾼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갈등을 감소시켜 전력을 통일시키기 위함이었다. 임표 등이 동북지방에서 다른 장교들과 갈등을 빚었다. 1946년 6월 16일, 모택동은 임표를 동부지역 최고 군정 수장에 임명했다. 동북지역 정치국 위원, 중앙 위원 모두 임표의 통제아래 뒀다.

 

장개석에게는 임표(林彪), 팽덕회(彭德懷), 류백승(劉伯承), 속유(粟裕)와 같은 통솔(사령관급)형 장군들이 부족했다. 1948년 3월 25일, 장개석은 일기에서 “금일 이홍장(李鴻章), 호림익(胡林翼), 낙병장(駱秉章)같은 이들을 구하려 하나 얻을 수 없음이 한스럽구나”라고 쓰고 있다.

 

장개석의 용인술을 보면 첫째 파벌을 중시하고, 둘째 복종과 예속관계를 중시했다. 백숭희(白崇禧)는 국민당 군인들 중 보기 드문 통솔형 장수였다. 그러나 장개석의 측근이 아닌 까닭에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장개석은 호종남(胡宗南)을 몇 십 년 중용했다. 그런데 그는 사단장이나 여단장의 재능과 기질을 갖고 있을 뿐이었는데 장개석에 의해 사령관으로 중용됐다.

 

1943년, 진립부(陳立夫)은 서안으로 가 호종남에게 연안을 급습하라 권하면서 “불세출의 공을 세우라”고 했지만 호종남을 실행하지 못했다. 물론 호종남이 연안을 급습했다고 하더라도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곁에 두고 있었던 웅향휘(熊向暉)가 분명 비밀리에 연안에 통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보 : 그런데 공산당과 비교하면 국민당 고급 장교들의 경력이 뛰어나지 않는가?

 

고화 : 건국 후 모택동은 여러 차례 그와 유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식꾼에서 인물이 나왔지. 우리 군구의 사령관은 백에 구십이 무식꾼이었어. 상병 출신이지.” “우리 인민해방군의 원수, 장교들 중 임표나 유백승 등 소수만이 군관학교 출신이었어. ……황포(黃埔)군관학교의 도시물 먹은 인물들이 촌놈들을 이긴 것이 아니라 촌놈들이 도시놈들을 이긴 거야.” 모택동은 자문하면서 말했다. “허세우(許世友)가 며칠이나 공부했나! ……한선초(韓先楚), 진석련(陳錫聯)도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류아루(劉亞樓)도 초등학교 나왔지.” “결국 무식꾼들이 황포군관학교 졸업생들을 이긴 거야.” 모택동의 이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국민당 군인들 중 특히 중앙군 고급지휘관은 모두 지식인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외국어에 능통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이와 비교하면, 공산당 장교들은 일반적으로 교육수준이 낮았다. 빈한한 농민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국군의 중하급 장교들은 모두 교육수준이 높았다. 많은 사람들이 “10만 청년 10만 병”을 외칠 때 붓을 내던지고 종군했는데 어떻게 교육수준이 거의 없다시피 한 ‘무식꾼’들에게 패배했을까? 공산당이 기적을 창조한 것은 분명하다.

 

 

조보 : 그 기적은 국민당 파벌 투쟁과 관련이 있을 텐데, 장개석이 그대로 내버려 뒀는가?

 

고화 : 장개석이 대륙에 있을 때 진정한 통일을 실현하지 못했다. 특히 군대 방면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각기 다른 군대 파벌 간에 첨예한 갈등이 존재했다. 형세가 위급할 때 내부 분열이 극심했다. 장개석은 늘 사심으로 사람을 썼다. 직계와 비직계를 확실히 나눴다. 장개석의 파벌 내에도 갈등이 심했다. 전쟁터에서 자신의 군대를 보유하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자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1948년 7월, 제5군 군단장 구청천(邱清泉)은 제75사 사단장 심징화(沈澄華)가 공산군에게 포위당했는데도 구하지 않아 전멸 당했다. 장개석이 분노했다. 장개석이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구청천이 명령을 어겨 공격하지 않으면서 벌어진 일이다. 중원의 전세는 이로써 극히 엄중하게 됐다.

 

장교들은 이기적이고 자기만을 지키면서, 단결해 서로 도우려 하지 않는다. 전투를 두려워해 출격할 마음가짐이 없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군대의 미래가 암담하다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청천은 장개석의 직계다. 죽음을 보고도 모른 척했고 사건이 벌이진 이후에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회해전역(淮海戰役)’ 때에도 구청천은 같은 행동을 했다. 황백도(黄伯韜) 병단이 공산군에게 포위되자 구원을 요청했는데도 구청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참모장 고축동(顧祝同)이 친히 서주(徐州)로 날아가 출병할 것을 요청했는데도 거절당했다.

 

국군의 실패의 이유에 대해 장개석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기나 장비 보급에 있어 국군은 모든 것이 선진화 돼 있었다. 어찌해서 “빠른 시일 내에 공비들을 소멸시키지 못하는가”, “공비는 어째서 열악한 장비들을 가지고, 현대적 훈련을 받지도 못한 군인들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우리 병력을 패퇴시키는가?”를 토로한 적이 있다.

 

장개석은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지 않고 부하들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욕을 했다. 욕을 하는 정도도 파벌에 따라 달랐다. 장개석의 직계가 패하면 장개석도 욕을 했지만 이종인(李宗仁)이나 백숭희(白崇禧)를 욕하는 것과 달랐다.

 

두율명과 구청천(邱清泉)이 ‘회해(淮海)’에서 패배한 후 두율명은 포로가 됐고 구청천은 자살했다. 장개석은 1949년 1월 10일 일기에서 구청천의 자살에 대해 언급했다. “두율명과 구청천 두 장군은 비록 작전에 실패했지만 시종일관 명령을 따랐다. 끝까지 싸웠다. 실로 부끄러움이 없는 혁명 군인이다.”

 

국민당 ‘군통'(軍統, 국민정부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 수장 모인봉(毛人鳳)이 ‘요심전역'[遼瀋戰役, 요서회전(遼西會戰), 동북 금주(錦州)에서 벌인 전투]에서 국군의 실패 원인을 총결하면서 제기했다 :

 

고급 군정 장교는 자주 멋대로 직무를 이탈했는데 ‘공비’가 심양에 아직 다다르지 않았는데도 먼저 도망쳤다. 이러한 상황은 해방군이 도강 이후에 더욱 심각해졌다.

 

장개석은 분노하며 말했다. “상해, 샤먼, 광주를 불문하고 매번 철수하면서 고급 장교들은 결국 부하들보다 먼저 후퇴했다. 자신의 부하들이 생사를 돌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국군은 ‘당군(黨軍)’도 아니요 ‘국군(國軍)’도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장수들의 ‘사군(私軍)’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어찌 공산군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