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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4월 13일 오후 1시, 노동자 시위대는 청운로(靑雲路), 동횡빈로(東橫濱路)를 경유해 보산로(寶山路)에 이르렀다. 기세등등한 시위대는 1킬로미터나 이어졌다. 시위대는 목소리 높여 구호를 외쳤다.

 

보산로 삼덕리(三德里) 부근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시위대를 향해 군인들이 사격하기 시작했다. 앞에 있던 군중들이 연달아 쓰러졌다. 현장은 혼란에 휩싸였다. 반시간 후, 총소리가 멈췄다. 군인들은 수많은 노동자를 체포했다. 이것이 ‘보산로 유혈사건’이다.

 

살계를 펴면서 장개석은 ‘청당’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4월 17일, 장개석은 우파 국민당 중앙위원과 함께 남경(南京)에서 정치회의를 개최하고 ‘청당’을 발표했다. 그리고 비밀 1호 명령을 내려 공산당의 수뇌부 197명을 지명 수배했다.

 

주요 인물은 첫째 보로딘, 진독수, 다음으로 임조함[(林祖涵), 임백거(林伯渠)], 구추백(瞿秋白), 모택동, 운대영(惲代英), 주은래, 류소기(劉少奇), 장국도(張國燾), 팽배(彭湃), 등영초(鄧颖超), 채화삼(蔡和森), 방지민(方志敏) 등이었다.

 

공산당 좌파 인사, 예를 들어 심안빙(沈雁冰), 류아자(柳亞子), 등연달(鄧演達), 장백균(章伯鈞) 등도 지명 수배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국공합작의 대혁명 시대는 끝을 맺었다. 피바람이 공산당을 덮쳤다.

 

검은 구름이 소용돌이치니, 공산당은 어디로 갈 것인가? 상해 공산당의 유일한 출로는 무한(武漢)이었다.

 

왕정위가 주재하는 무한 국민정부는 당시에도 여전히 보로딘, 중공 중앙과 협력하고 있었다. 4월 10일, 왕정위가 무한에 도착해 공산당원과 군중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왕정위는 강연을 통해 국민당 중앙의 권위와 기율을 강화시키자고 천명했다. 그리고 “혁명가여 좌(左)로 돌리라, 비혁명가들은 어서 비켜서라!” 직접 쓰고 신문에 게재하면서 창끝을 장개석을 향해 돌렸다.

 

4월 18일, 장개석은 남경에서 국민정부를 세운다고 공포했다. 22일, 무한 국민정부는 왕정위를 수령으로 하고 손과(孫科), 등연달, 송경령(宋慶齡), 장발규(張發奎), 오옥장(吳玉章), 모택동, 운대영 등이 연명해 장개석의 분열행동에 대해 질책했다. 이렇게 ‘영한대립(寧漢對立)’ 국면이 조성됐다.

 

 

4월 하순, 상해의 ‘백색공포(白色恐怖)’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다. 많은 공산당원들이 잇달아 상해를 떠나 무한으로 향했다. 당시 무한 보도에 의하면, 상해 노동자 규찰대 총지휘 고순장이 22일 무한에 도착한 후 기자들에게 장개석이 상해에서 대대적으로 공산당을 학살하고 있다는 죄행을 알렸다. 고순장은 중공오대(五大)에 참가한 상해 대표로 움직임이 빨랐다.

 

진독수의 비서 정초린(鄭超麟)의 회고에 따르면, 진독수는 4월 초 상해를 떠나 무한에 도착했다. 그는 22일을 전후하여 비밀리에 상해를 벗어났다. 그와 동행한 사람은 육정일(陸定一)이었다.

 

영국 증기선을 타고 영국 군함 두 척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했기 때문에 국민당 특무가 체포할 수 없었다. 표 값은 비쌌지만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배에 중앙위원 나역농과 이립삼(李立三)을 보았고 곽말약(郭沫若)도 배에 타고 있다고 들었다.

 

배가 남경을 지나 안경(安慶)을 지났을 때에야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생기를 되찾았고 고담준론을 펴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대부분이 험지를 벗어난 공산당원들이었다. (『정초린회고록』)

 

그때, 주은래는 어디에 있었을까? 관방의 『주은래전』과 『연보』에는 상세하게 적혀 있지 않다. 역시 주은래가 만년에 자술한 부분이 정확할 것이다. 1972년 9월, 주은래와 등영초가 프랑스 대통령 퐁피두(Pompidou)와 함께 상해를 방문했다.

 

그날 오후, 주은래는 외빈을 기다리며 상해빌딩 18층 귀빈실에 있었다. 베란다로 나가 황포강과 외백도교(外白渡橋)를 바라봤다. 옆쪽으로 영국식 구 건축물 포강(浦江)호텔이 보였다.

 

주은래는 상해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과거 저곳을 애스터(Astor) 호텔이라 불렀지. 공공 조계지에서 가장 호화스런 호텔이었어. 내가 저기 머문 적이 있어. 그때가 1927년 ‘4.12’사변 이후야…….” 주은래가 40여 년 동안 입을 열지 않았던 옛일을 꺼냈다. “1927년 상해 노동자 무장봉기가 승리한 후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했지. 당시 형세가 급박해서 당 조직의 결정으로 나와 등영초가 애스터 호텔에서 지냈어.” 이튿날, 등영초가 수행원들에게 그 사실을 인증해 줬다.

 

그녀가 말했다. “맞아! 맞아! 정말 고급 호텔이었어. 당시 외국인과 ‘고등 화인(華人)’들이 머물렀어. 우리는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부자 행세를 했어. 주은래는 양복에다 구두를 신었지. 난, 몸에 치파오를 걸치고 하이힐을 신고서는 부잣집 마나님 행세를 했어. 애스터 호텔에 장장 2개월여 머물렀고. 밖에 나갈 수 없었어. 지하당 조직이 파견하는 사람들하고만 연락이 가능했지. 정말 숨이 막혀 죽을 뻔했어!”

 

애스터 호텔은 미국인이 1910년에 세운 6층 건물로 영국 신고전주의 풍격의 빅토리아 바로크식 건축물이다. 캐세이(Cathay) 호텔[현 화평(和平)호텔], 국제 호텔이 세워지기 전으로 상해에서 가장 호화로운 호텔이었다.

 

서양의 명인과 정객들이 상해에 오면 거반 그곳에 머물렀다. 조계지에 있었고 저명인사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국민당 당국은 감히 체포하러 들어가지 못했다. 애스터 호텔 가격은 비쌌다. 주은래는 311호 스위트룸에서 지냈다. 당시 방 가격은 하루에 12원이었다. 상해 보통 가정의 1개월 생활비였다.

 

기록에 따르면 4월 25일, 주은래를 석방했던 국민당 사단장 사열이 현상금 2.5만 원을 걸고 다시 주은래를 현상 수배했다. 주은래는 그때 호텔에 숨어있었다. 5월 중공은 한구(漢口)에서 중공오대(五大)를 개최해 결석한 주은래를 중앙정치위원 겸 비서장으로 선출했다. 5월 하순, 주은래는 비밀리에 영국 증기선을 타고 한구에 도착했다.

 

 

주은래는 백색공포 기간에 호화 호텔에 몸을 숨길 수 있었지만 그것은 특별한 예에 속한다. 그렇게 비싼 비용을 어떻게 지불할 수 있었을까? 당시 발생했던 다른 사건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7월 2일, 중공 중앙위원, 상해 제3차 무장봉기 책임자 조세염[趙世炎.시영(施英)]이 상해에서 체포됐다. 보도에 따르면, 지폐 3만8832원을 찾아냈다고 한다. 당시 지도부는 거액을 가지고 있으면서 필요할 때마다 부하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중국공산당 초기에 고정된 재무제도와 기구가 없는 상황에서 당의 경비는 모두 책임자가 나눠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의 고위 책임자들이 친히 재물을 담당하는 상황은 중국공산당 내에 장기간 존재했었다.(1941년 3월, 신4군정위 항영(項英)은 ‘환남(皖南)사변’ 이후 산속 동굴에 숨었는데 몸에 황금을 지니고 있었다. 부관 류후총(劉厚總)이 재물을 탐해 살해했다. 이것이 전형적인 사례라 하겠다.)

 

검은 구름이 휘몰아쳐오는 위급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은 어디로 갔을까? 유감스러운 일은, 공산국제의 조종아래 중공 중앙은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열이 흐트러져 버렸다.

 

당시 중공 중앙의 태상왕은 공산국제 고문 보로딘이었다. 그는 1923년 가을 중국으로 건너갔다. 공산국제의 중국대표로 손중산에 의해 국민당 고등고문으로 초빙됐다. 국민당을 개조하는 구체적 계획을 제출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북벌 시기, 그는 왕정위 영수의 무한 국민정부를 지지하면서 공산당원들이 정부에서 중심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장개석이 ‘청당’을 실행하자 보로딘은 더더욱 무한 정권에 기댔다. 최대한도로 왕정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스탈린은 보로딘에 불만을 품고, 1927년 2월 인도인 로이(M. N. Roy)를 중국에 파견했다. 공산국제 특사라는 신분으로 “중국 혁명을 지도하도록 했다.” 4월 로이가 한구에 도착한 이후 중공 총서기 진독수와 보로딘은 여러 가지 모순이 발생해 충돌을 일으켰다. 중공 중안 내부에 분열이 생긴 것이다.

 

먼저, 군사 행동 방면에서 진독수, 팽술지(彭述之), 장태뢰와 보로딘은 북벌을 주장하면서 장작림(張作霖)을 치자고 주장했고 ; 로이와 채화삼(蔡和森)은 즉시 토지 혁명을 실행해 호남과 호북 근거지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북벌은 토지 혁명을 실행하는 조건아래 진행해야 한다고 했으며 ; 장국도, 담평산(譚平山)은 남정(南征)을 주장하며 먼저 광동 군벌을 토벌해야 한다고 했고 ; 구추백, 주은래, 나역농은 동정(東征)해 장개석을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쟁을 거듭한 후 결국 보로딘과 왕정위의 의견에 따라 북벌을 계속하기로 했다.

 

 

‘영한(寧漢) 분열’로 장개석은 장강 하류를 점거하면서 경제의 정상적인 왕래에 악영향을 미쳤다. 5월 중순 이후, 무한 지역의 재정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한구의 은행 전장(錢莊)은 문을 닫았고 상인들은 동원[銅元, 청말(淸末)부터 항일 전쟁 이전까지 통용되던 동으로 만든 보조 화폐] 환전을 중지하고 중앙 화폐를 거절했다.

 

사람들이 중앙은행에 벌 떼같이 모여들자 은행을 폐쇄하고 군인들이 해산시켰다. 공장도 계속적으로 생산을 중지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데리고 조계지로 들어가거나 배를 타고 동쪽으로 피했다. 조계지로 피난한 시민은 3800호 4만여 명이나 됐다. 기름, 소금, 땔나무, 쌀과 일상용품이 품귀현상이 일어나게 돼 가격이 급등했다.

 

호북성 총공회는 반혁명을 진압하고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각 기층 공회에 명령을 하달했다 :

 

첫째, 전장이 보유하고 있는 동원(銅元)의 수량을 조사한 후 환전을 보장하고 중앙 지폐를 거절하지 못하도록 할 것.

 

둘째, 양식을 조사하고 수압해 무한 백성들에게 공급하여 물가 폭등을 막을 것. 쌀 1석 이내는 자유 매매를 허용하고 1석에서 5석까지는 반드시 당, 총공회의 증명을 받을 것.

 

셋째, 부두 노동자를 금지하고 자동차, 마차, 인력거, 손수레 노동자들이 운반하도록 할 것.

 

이러한 조치들은 강제성이 너무 심했다. 집행 과정에서 폐단이 적지 않았다. 사회 동란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민심을 더 흉흉하게 만들었다.

 

무한 사회경제 형세의 악화는 장개석의 남경 정부가 상류 봉쇄로 인해 조성됐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시 무한의 노동운동과 호남 호북의 농민운동으로 야기된 혼란과 관련돼 있다.

 

당시 좌경(左傾) 잘못에 대한 유소기의 반성 :

 

10년 후, 유소기는 당시 노동운동의 좌경 오류에 대해 반성했다. 장문천(張聞天)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장사(長沙), 무한, 광주(廣州) 등 도시에서 노동운동 중 좌경 오류가 대단히 심각했다.…… 기업이 도산할 정도로 요구했다. 놀랄 정도로 임금 인상을 요구했고 노동시간을 4시간 이하로 단축할 것을 요구했다. 아무렇게나 사람들을 체포하고 직접 감옥을 만들었다. 기차와 기선을 검사하면서 멋대로 교통을 통제했고 공장과 점포를 할당해 몰수했다. 당시 이러한 일들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고 지극히 보편적으로 행해졌다. 이러한 일들은 시작되자마자 더더욱 극렬하게 돼 갔다. 사회상, 정치상, 경제상, 인심에 있어 엄중한 악영향을 미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업의 도산, 자본가의 폐쇄, 업무 정지와 도피, 물가 상승, 물자 부족, 시민의 원망, 병사와 농민의 반감(당시 소도시의 공회는 농민들에 의해 파괴됐으며 심지어 농민협회가 이끌기도 했다), 장교와 국민당원의 비난 등등, 이런 엄중한 좌경 경향은 나날이 심해져 갔다. 당시 노동자운동은 공산당원의 책임이었다. 모든 비난은 공산당원에게 쏟아졌다. 사람들은 노동자를 책망하지 않았다. 공산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 질책했다. 이것은 공산당과 여러 방면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유소기(劉少奇) 『대혁명 역사 교훈에 대한 문제』]

 

농민운동도 통제력을 잃었다. 국민당의 5개월간 호남 상황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

 

“먼저 공산당이 토호, 지방 악덕인사라 여겨지는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면서 감옥이 가득 차게 됐고,……각 현과 향촌에서 동시에 계엄을 선포해 농회 공회의 완장이 없으면 통행할 수 없게 만들었다. 완장이 없으면 간세로 보거나 토호, 지방 악덕인사, 도망자로 취급했다. 상업이 시장에 발붙이지 못했다. 농민을 불안에 떨게 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람마다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꼈고 집집마다 전율을 느꼈다.”

 

왕정위는 6월 1일 무한 국민당 중앙정치회의에서 분노하며 말했다. “그들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굴면서 호남을 치면 호남이 끝납니다 ; 강서를 치면 강서도 끝나고 ; 하남을 치면 하남도 난리 납니다. 중안이 손 놓고 가만히 있으면서 무슨 혁명을 한다는 말입니까! 과감하게 한 마디 하겠습니다 : 농민협회는 공전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국공 양당 동지들은 명명백백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엔, 농산품 생산에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공상업자들을 전부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위로는 중앙이 없고 아래로는 농민이 없다면, 무슨 혁명이 필요하다는 겁니까!”

 

이것은 왕정위 개인만의 관점이 아니었다. 당시 무한정부 중 대다수 국민당원들의 관점이었다. 이렇게 되자 보로딘과 중공 중앙은 왕정위에게 미움을 살까 눈치 보게 됐고 왕정위는 또 부하 장교 당생지(唐生智), 장발규(張發奎)와 주배덕(朱培德)의 미움을 살까 염려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총을 들고 있던 장교들은 공산당이 자신들의 이익을 해친다고 생각하고 솔선해 일어섰다. 5월, 하두연(夏斗寅)과 허극상(許克祥)의 반란이 앞뒤로 일어났다.

 

 

그러자 무한국민정부와 중공 중앙은 진동했다. 진독수 비서 황개연(黄介然)의 회고에 따르면 :

 

“진독수는 농민들의 ‘과격’에 의해 생긴 것으로 여겼다. 사리에 맞지 않다고 여겨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음을 표출했다. 사변이 발생한 후, 채화삼(蔡和森), 임필시(任弼時) 등의 동지와 진독수, 담평산 등이 격렬하게 논쟁했다. 나는 진독수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중앙이 회의를 개최하기만 하면 법석을 떨며 왁자지껄 떠들기만 하면서 의견이 통일되지 않는다. 양당 연석회의에서 당은 또 의견을 내놓으라 한다!’ 그렇게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때를 회고해 보면 진독수는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고 속수무책이었다. 조급해 했고 허둥거렸다. 최악의 상태였다!”

 

‘청당’이 옳았다고만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단지 혼란한 시기, 중국의 현대사는 오류와 잘못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공산당을 이끌고 있던 진독수가 위기를 맞아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 직면했다는 것은, 그가 정당의 영수라는 직에 맞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국민당이 새로운 길을 모색했듯이 공산당도 새로운 인물을 갈구하는 역사의 전환점은 아니었을까?

 

역사는 흐른다. 과거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당시에 중국사회를 계급적 관계로만 보지 말고, 인민을 위해 사회전반에 걸쳐 연구하고 방법을 찾았다면, 지금은 어떤 중국이 됐을까? 물론, 지난 일이다. 단지, 그저 과거에 대한 아쉬움으로 되묻는 것이 아니다. 현재, 어쩌면 우리도 숙고하지 않고 피상적으로만 전체를 파악하면서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것은 아닐지, 자문하고 있을 따름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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