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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물론 진찬현은 중국에서 열사가 돼 지금까지도 존경 받고 있다. 그러나 그를 기념하면서 국민당 반동파의 죄행에 대해 증오하는 것 이외에 돌이켜 생각해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필 등은 진찬현과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그렇다면 왜 그런 독수를 썼을까? 진찬현은 당시 무슨 일을 했을까? 달리 되돌아봐야 할 일은 없는 것일까? 신중국 성립 후, 당시 강서성 남부 지역에서 당 건립과 농민운동에 종사하고 있었던 진기함(陳奇涵) 상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진찬현 동지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공성(贛城) 자산계급과 용감하게 싸우다 결국 희생됐다. 이것은 분명 영광이다. 그러나 공산당원으로써 얘기하자면 그는 엄중한 결점과 잘못이 있다. 양화, 주단, 포목 점원의 임금 인상과 삭감 실시에 대해 투쟁할 때, 그는 상황을 분석하고 처우에 대해 판별하지도 않은 채 똑같이 대하면서 있어서는 안 될 손실을 보게 만들었다. 당시 양화, 주단 점원의 임금은 금융업 점원에 맞춰 원래 임금의 14배를 갑자기 인상했다. 금융업, 양화, 주단 점주는 자본이 충분하고 점원이 많지 않아 부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목점 점원의 임금을 그들처럼 14배를 인상하면 포목 점주들은 감당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포목점의 자본은 적고 점원은 많았다. 그리고 농민 군중과 광범위하게 연계돼 있었다. 포목 가격이 상승하면 농민 군중의 불만을 불러올 것이 뻔했다. 포목 점주와 다른 반혁명분자들은 기회를 틈타 소동을 일으키면서 곳곳에서 반혁명 선전을 벌였다. 일시에 소란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에게 성위省委로 와 직접 해결하도록 요청했다. 그가 성위에 왔으나 성위도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결국 반혁명분자들이 은밀히 음모를 꾸며 그를 사살했다. 가장 애석한 것은 그가 당의 말을 듣지 않고 사사로이 공주로 갔다는 점이다. 자신의 희생을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잇달아 당의 연계가 끊겼고 당의 공작도 모두 와해됐다. 이것은 가장 비통한 교훈이다.”

 

진찬현이 피살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강서와 각 성의 공산당과 공회가 분노했다. 잇달아 회의를 열어 흉수를 엄하게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강한 정치적 압력을 받자 예필은 부대를 떠나 숨어 버렸다. 장개석도 어쩔 수 없이 예필의 직을 파면한다고 선언하면서 민중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곽말약(郭末若)은 「금일의 장개석을 보시라(請看今日之蔣介石)」를 발표하면서 장개석의 혁명을 가장하면서 실제로는 반공을 추구하는 행태를 폭로했다. 공주 사건과 연이어 발생한 충돌을 통해 장개석은 공산당 역량이 강대해지고 있다는 것을 감득하게 됐고 그의 반공의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를 노리고 있었다.

 

사실, 장개석은 공산당보다도 먼저 “권력을 총부리에서 나온다(槍杆子里出政權)”는 이치를 알고 있었다. 그는 국민당에서 원로급 인물이 아니었다. 북벌 총사령관의 직무를 기반으로 일약 국민당 최강의 실력파가 됐다.

 

그의 혁명이론은 공산당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장개석은 공산당이 국민당 내에서 역량이 하루가 다르게 강대해지는 것에 대해 심한 불안을 느꼈다. 북벌이 시작하기 전, 그는 광주에서 ‘중산함(中山艦)사건’을 빌미로 공산당을 몰아낸다.

 

장개석은 북벌군에서 청소를 시작한다. 공산당원 간부를 모두 쫓아냈다. 주은래(周恩來) 등이 그 시기 강압에 의해 황포군관학교를 떠났다. 장개석의 압박으로 소련 고문 보로딘은 국민당 중앙이 『정리당무안(整理黨務案)』 통과시키는 것을 동의해 버렸다.

 

규정은 이렇다. “공산당은 국민당 내의 모든 공산당원 명부를 국민당 중앙 집행위원회 주석에게 교부해 보관하도록 해야 한다.” “중앙당부 각 부장은 둘 이상의 당에 적을 두지 않은 자에게 업무를 담당하도록 해야 한다.”

 

공산당은 큰 손해를 봤지만 아쉬운 대로 참고 견디며 보전을 꾀했다. 장개석은 어디까지나 국민당 최고 영수는 아니었으며 국민당 주석 왕정위(汪精衛)가 좌파로 알려져 있었고 공산당과 관계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1927년 3월, 북벌군이 상해에 도착하기 전날 밤, 공산당은 북벌에 호응해 제3차 노동자 무장봉기를 발동했다.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것이 장개석 등이 ‘청당’을 결심한 계기가 될 줄을.

 

국민당 우파들은 공산당이 상해에서 폭동을 일으킨 것을 상해의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당시 상해는 경제의 중심이었다. 국민당 정권 건립의 기반이었다. 그리고 서방 열강의 이익의 중심이었다.

 

어찌 공산당의 지배를 용납하랴! 국민당의 핵심 인물들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국민당 원로 오치휘(吳稚暉)와 채원배(蔡元培)였다.

 

오치휘는 공산주의를 반대했다. 공산당의 역량이 급성장하는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었다. 3월 6일, 그는 유영건(鈕永健)과 함께 진독수와 회견했다. 자술한 내용은 이렇다.

 

“본 위원은 금년 3월 6일 저녁 8시, 유 위원을 대동하고 중국공산당 영수 진독수, 중국공산당 상해 수령 나역농(羅亦農)과 회견했습니다. 상해 환룡로(環龍路) 26호 유 위원의 사무실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본 위원이 진독수 영수에게 말했습니다. ‘공산학설을 연구해보니 공산당이 책임을 지고 공산을 실행한다면, 오륙년 전에 광주에서 손중산 총리와 대담했던 소련 대표 요페(Joffe)가 200년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했지요. 내가 미뤄 보건대 200년도 충분하지 않다고 보이오.’ 진독수 영수는 내가 고루하다고 웃었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급하게 아무렇게나 간판을 다는 것은 말뚝이나 다름없지요.’ 진독수가 말했습니다. ‘당신, 실성한 듯 보이오. 물어봅시다. 중국 현재의 공화는 가짜가 아니던가요? 당신, 강유위(康有爲)가 복벽을 한다면 거짓 공화와 비교해서 어느 것이 우수하다고 보시오?’ 본 위원이 중국공산당이 결국 거짓 공산주의를 실행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진독수 영수에게 기습적으로 물었습니다. ‘당신은 중국에 레닌식 공산주의가 실행되려면 몇 년이 걸린다고 보시오?’ 머뭇거리지도 않고 대답했습니다. ‘20년.’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나역농 영수는 진독수가 너무 솔직하게 얘기한다고 책망하는 듯이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본 위원이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렇다면 국민당의 생명은 19년밖에 남지 않았구려. 재작년에 총리가 요페에게 국민당 국민혁명을 완성하려면 30년이 필요할 것이라고 얘기를 했는데. 만약 당신들 공산당이 그처럼 급박하게 진행하면 국민당의 생명을 너무 빨리 빼앗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응당 융통성을 발휘해 의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요 그려!’ 억지로 웃으면 마무리를 했습니다.”

 

 

3월 26일, 장개석이 상해에 도착했다. 28일, 국민당 중앙 감찰위원 채원배, 오치휘, 이욱영[李煜瀛, 이석증(李石曾)] 등 5명이 채원배의 주재아래 회합했다.

 

오치휘는 진독수와 나눈 대담 내용을 보고하고 공산당에 대해 “마땅히 감찰을 실시해야”한다고 제의했다. 채원배도 동의하며 “공산당원의 국민당 당적을 취소할 것”을 주장했다.

 

의견 일치를 본 후 4월 2일, 국민당 중앙 감찰위원회는 정식으로 회의를 개최하고 관련 문건을 국민당 중앙 집행위원회에 보내면서 공산당원 신분의 위원들에게 알리지 않도록 했다.

 

오치휘와 채원배는 모두 문인이었기에 그들의 반공 주장은 장개석에게 이론적 기반이 됐다. 그러나 어떻게 ‘청당’을 실시할지는 여러 방면에서 준비해야 했다.

 

장개석은 상해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조계지 당국과 협의하고 서방 국가의 이익을 보장했다. 일본영사와도 회담했다. 외국인들에게 장개석의 입장을 이해시키고 지지를 당부했다.

 

장개석은 상해 ‘청방(靑幇, 청나라 초기부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민간 비밀결사 중의 하나)' 두목 두월생(杜月笙) 등과 밀회했다. 그들에게 ‘중화공진회(中華共進會)’를 조직하게 하고 ‘청당’에 호응하도록 했다. 그리고 광동의 이제심(李濟深), 광서의 이종인(李宗仁)과 상해에서 협의해 결정했다, 각지에서 보조를 맞춰 ‘청당’을 진행하기로.

 

‘4.12’ 장개석, 살계를 펴기 시작하다.

 

사실, 진독수와 중공 중앙 책임자들은 장개석의 음모에 대해 이미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진독수는 3월 25일 저녁, 특별위원회에서 명확하게 제기했다. “우리는 지금 저항을 준비해야 합니다. 만약 우파의 군대가 무장해제를 시키려 하면 우리는 그들과 결사항쟁 해야 합니다. 이 항쟁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장개석의 정치생명은 완전히 끝납니다.” 중공 중앙은 노동자 감찰대의 힘을 강화시켜 간부 백여 명을 선발하고 감찰대의 골간으로 삼아 훈련에 매진했다.

 

그러나 모스코바에 지시를 요청하자 무력으로 장개석에 대항하는 계획은 비준을 얻지 못했다. 더욱이 연공[(聯共, Soviet Union, 볼셰비키(Bolsheviki)] 중앙 정치국은 오히려 3월 27일, 28일, 31일 연속적으로 중공 중앙에 지시를 내렸다.

 

“그대들은 우리가 지금 내리는 조계지 반납요구 총파업 혹은 봉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필히 엄수하라. 그대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해 국민군 및 그 장관들과 충돌을 반드시 피하라.” “잠시 공개 작전을 진행하지 마라. 무기를 내놓지 마라. 그래도 방법이 없다면 무기를 숨기라.” “역량을 비교해 본 결과 대단히 불리한 지경에 처해 있다. 황급한 공개투쟁을 전개하지 마라. 무기를 내놓지 마라. 필요하다면 숨겨라.” “무장 활동으로 조계지를 어지럽히지 마라.” 공산국제의 지시는 중공의 손발을 묶어버렸다.

 

장개석이 ‘청당’을 진행하려면 국민당 주석 왕정위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왕정위는 장개석에게 축출당한 후 소련을 방문했다가 4월 1일 상해로 돌아왔다. 장개석, 채원배, 오치휘, 이석증 등이 예방하고 오치휘가 보고했다.

 

“진독수가 말하길 20년이면 중국을 공산국가로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왕정위가 말했다. “어디 20년이나 필요할까? 2년이겠죠.”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왕정위도 중국공산당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장개석은 명확하게 두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소련 고문 보로딘을 쫓아 낼 것과, 둘째 공산당을 분리할 것. 이를 왕정위에게 동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왕정위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자신에게는 군대가 없었다. 자신의 영수 지위를 유지하고 싶었다. 장개석에게 대항하려면 공산당의 지지가 있어야 했다. 전반적인 정세와 관련된 것이었다. 왕정위는 두 가지 일이 전체적인 국면과 연계돼 있다며 무한으로 돌아가 국민당 중앙위원회의에서 토론에 붙여야 한다고 했다.

 

장개석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왕정위는 상해에서 직접 진독수와 만나 담판을 벌였다. 진독수는 그 자리에서 오치휘가 전한 내용을 부인했고 계속해서 국민당과 협력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진독수가 「왕진연합선언(汪陳聯合宣言)」 초안을 작성했다.

 

 

이 선언이 발표되자 진독수는 ‘우경투항주의(右傾投降主義)’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나중에 주석 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진독수는 중공 중앙에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행위를 깊이 후회한다고 피력했다.

 

사실, 왕정위도 공산당과 협력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장개석이 선언사건을 듣자마자 왕정위를 찾아가 이해득실을 설명했다. 왕정위는 후회한다며 번복할 뜻을 비쳤다. 그러나 이미 인쇄에 들어가 철회할 수가 없었다.

 

「왕진연합선언」이 출간되자 오치휘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왕정위의 ‘연공(聯共) 정책’과 ‘양당 합작’의 입장을 책망했다. 격분한 나머지 왕정위에게 욕을 해댔다. “아무 것도 모르는 백면서생 토끼와 노기등등한 진독수가 연애하며 희희덕거렸다.” 왕정위는 충격을 받아 모든 걸 내팽개치고 상해를 떠나 무한으로 가버렸다.

 

장개석은 비밀리에 ‘청당’을 준비하면서 중공의 경계심을 풀게 만들었다. 공산당을 ‘청당’하려면 자기 수하의 군인들로써는 부족했다. 군대를 동원하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상해 청방 세력을 이용했다.

 

당시 상해 사회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암흑가를 대표하는 세력인 여러 결사[(結社, 방회(幇會)]가 상해 각계에 진출해 있었다. 조직도 방대했고 사람 수도 많았다. 청방은 상해에서 세력이 가장 방대하고 영향력도 큰 방회였다.

 

청방의 수령 황금영(黃金榮), 두월생, 장소림(張嘯林)은 독립된 지하 세계의 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해 노동자, 소상인, 떠돌이 등 사회 저층의 생계를 조종하며 상해 대부분의 공장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공장의 십장과 현장감독 대부분이 청방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노동자의 채용과 해고, 감독과 관리 등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청방에 가입하지 않으면 공장에서 일을 못하도록 했다. 공장에서 배척을 당하거나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방회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방회를 자신들이 취직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후원자로 삼았다.

 

국민혁명의 배경아래 청방도 정치적으로 점차 국민당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특히 장개석도 젊은 시절 청방이 배경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황금영, 두월생, 장소림 등은 장개석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황금생은 처음에 국민당이 공산당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 한때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두월생은 공산당이 지배적 위치에 서게 되면 자신들에게 이익이 없다고 생각해 황금영과 장소림에게 장개석과 협력할 것을 권했다. 그 중요한 시점에서 두월생의 입장이 장개석이 상해에서 ‘청당’을 진행할 수 있도록 만든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총공회(總工會, 노동조합 총연합회)를 공격하기 이전에 두월생은 먼저 총공회의 책임자를 쳐야한다고 했다. 상해 총공회 위원장 왕수화(汪壽華)와 두월생은 사적으로 잘 알고 있던 사이었다.

 

황금영, 두월생이 상해의 노동자 무장봉기 기간에 공산당의 엄호를 받은 적이 있고 조계지와 교류할 적에 협력한 적이 있었다. 공산당도 청방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었다.

 

두월생은 왕수화에게 4월 11일 저녁 두월생 공관에서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도록 초청장을 보냈다. 왕수화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차를 이용해 제시간에 도착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두월생의 졸개들이 달려들어 왕수화를 묶었다.

 

두월생이 곧바로 말했다. “집안에서 처리하지 마라.” 졸개들은 왕수화를 차안으로 쑤셔 넣은 뒤 서구(西區) 구석진 곳으로 데리고 가 살해해 버렸다. 곧바로 두월생 등은 청방의 제자들을 보내 ‘중화공진회(中華共進會)’ 명의로 ‘공(工)’자 완장을 차고 몇 길로 나눠 상해 규찰대(糾察隊) 소재지를 덮쳤다……. 하루 동안 상해 노동자 규찰대 무장대는 26군에 의해 모두 무장해제 당했다.

 

주은래가 사변의 상황을 얻어 듣고 곧바로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으로 달려가 26군과 교섭하려 했다. 곧바로 2군 사단사령부로 끌려가 고순장(顧順章)과 함께 구금됐다.

 

나역농(羅亦農)이 소식을 접한 후 황급히 주은래의 연락원 황일봉[(黃逸峰, 황징경(黃澄鏡)]을 파견해 연줄을 찾아 구조하도록 했다. 2사단 당대표의 도움아래 2사단장 사렬(斯烈)의 동의를 얻어 주은래와 고순장이 석방됐다. 그렇게 국민당 대학살 이전, 주은래와 고순장이 기적적으로 화를 면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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