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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9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장개석(蔣介石, 1887년~1975년), 이름은 중정(中正), 자는 개석(介石)이다. 유명은 서원(瑞元), 족보 이름은 주태(周泰), 학명은 지청(志清)이다. 본적은 강소(江蘇) 의흥(宜興)이고 절강(浙江) 봉화(奉化)에서 태어났다. 근대 중국의 저명한 정치인물이요 군사전문가이다. 역대로 황포군교(黄埔軍校)교장, 국민혁명군(国民革命軍)총사령, 국민정부 주석, 행정원 원장,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위원장, 중화민국 특급상장, 중국국민당 총재, 삼민주의청년단 단장, 제2차 세계대전 동맹국 중국전구 최고통수, 중화민국 총통 등 직을 역임하였다.

 

장중정은 손중산(孫中山)의 총애를 받아 민국정단에 들어섰고 손중산 별세 후 중국국민당을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국민정부시대에 줄곧 군정 핵심으로 중국의 항일전쟁과 세계대전을 이끌었고 제헌 이후 1대부터 5대까지 중화민국 총통을 27년 동안 역임하였다. 정치방법과 독재정치로 비평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 생애는 북벌(北伐), 훈정(訓政), 국공내전, 항일전쟁, 제헌, 민국정부 대만 이전 및 동서양 냉전을 모두 거쳤다. 중국근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75년 4월 5일, 대북(台北) 사림(士林) 관저에서 별세하였다.

 

1927년 4월 12일은 중국공산당 역사에 암흑의 날이었다. 그날 장개석(蔣介石)이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이 상해에서 공산당원을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청당(淸黨)’을 실행했다.

 

그 때는 바로 대혁명과 북벌전쟁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시기였다.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국민당원과 공산당원이 왜 갑자기 적으로 변했을까? “석 자 얼음이 하루 추위에 언 게 아니다”라고 했던가. 그렇게 악화된 것은 결코 한두 사람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정치적 원인, 당파적 원인이 있었고 공산국제의 영향이 내재돼 있었다. 상세하게 서술한다면 잡다해질 것이고 요점을 잃을 수도 있다. 사실, 양당의 국민혁명 개념은 시작부터 달랐다. 이 점 때문에 노동자농민운동 중 충돌을 불러왔다. 혁명과 북벌이 승리를 거둬 전국 정권을 건립하려고 할 때 국민당은 공산당을 봐주지 않았다.

 

국공 ‘분가(分家)’는 언젠가는 생겨날 일이었다.

 

국민당은 본래 조직이 느슨한 정치단체였다. 손중산(孫中山)은 줄곧 암살, 폭동 등의 수단으로 청 왕조를 전복시키려 했다. 강한 조직과 자신의 군대가 없었던 까닭에 청 왕조가 와해된 후에는 군벌 세력이 대체했다.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손중산은 그저 대총통을 원세개(袁世凱)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민국은 또 군벌 혼전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손중산은 광동 군벌에 의지해 북양 군벌에 맞서려고 했다. 결과는 실패하고 도피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때 소련이 원조의 손을 뻗친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에게 그와 합작하라고 지시한다. 손중산은 “소련과 연합, 공산당과 연합, 농민 노동자 원조”의 3대 정책을 제정하고 소련의 도움아래 국민혁명군을 조직한다.

 

 

손중산이 절대적 위난에 처했을 때 장개석이 그의 곁에서 지켜주면서 가장 신임 받는 간부가 된다. 1923년 8월, 공산국제(코민테른) 대표 마린(Henk Sneevliet)의 안배아래 손중산은 장개석(蔣介石)과 공산당원 장태뢰(張太雷) 등 4명을 소련으로 보내 군사 정치와 당무를 고찰하도록 했다.

 

장개석은 소련에서 돌아온 후 황포(黃埔)군관학교를 건립하고 그것을 기초로 국민혁명군을 조직한다. 소련 붉은군대(홍군, 紅軍)의 정치 체계를 모방해 국민당 당대표 제도를 만든다. 국민당은 자신들이 무장하기 시작하면서 큰 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러나 소련을 방문해 여러 분야를 고찰한 장개석은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 “소비에트(Soviet) 정치제도는 전제와 공포의 조직이다. 우리 중국국민당의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정치제도와는 본질적으로 어울릴 수 없다. 내가 직접 소련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국내에서는 결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이런 생각은 장개석이 공산당을 뿌리 뽑아야한다는 사상의 기초가 된다.

 

중국공산당은 공산국제의 직접적인 도움아래 건립됐다. 국민당과 다른 것은 공산당이 성립한 그날부터 독립된 정당이 아니고 공산국제에 소속된 지부였다. 중국공산당은 공산국제의 지시를 받고 공산국제의 노선을 따라야 했으며 공산국제가 제공하는 경비를 받았다.

 

공산국제를 이끌고 있는 인물들의 안배에 따른 것은 물론 공산국제의 명령아래 움직였다. 이런 시작점이 중국공산당 발전에 상당히 중요한 작용을 했다. 특히 공산국제의 지도아래 형성된 몇 차에 걸친 좌경노선은 중국 혁명에 중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는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비밀리에 거행됐다. 상당한 기간 동안 중공은 비밀리에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1923년 7월, 공산국제 대표 미하일 보로딘(Mikhail Borodin)이 중국으로 가 손중산이 국민당을 개조하고 신삼민주의의 정치 강령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줬다. 그리고 중공 지도자들과 긴밀하게 논의해 손중산으로 하여금 공산당원들을 받아들여 국민당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면서 국공합작을 실현시켰다.

 

합법적 지위가 생겨나자 중국공산당의 역량은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많은 혁명 청년들이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고 유명한 공산당원들이 황포군관학교의 교관과 국민혁명군의 각급 당 대표를 맡았다. 더 많은 공산당원들이 도시와 향촌으로 깊숙이 들어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대혁명 시기, 광동과 호남의 농민운동은 중국역사상 전대미문의 혁명이었다. 천백 년 이래로 향촌을 통치한 것은 지주와 향신(鄕紳)이었다. 미국학자 존 킹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는 “지방에 있어 현지의 소신사(小紳士), 그리고 어떤 때에는 대신사들이 나타나 많은 일들을 좌지우지했다. 그들은 공동으로 각종 공공사무를 주관했다. 예를 들어 교량 수리, 나루터 건설, 엔담과 사묘 건설, 학교와 서원의 비용 조달, 지방지 발기 및 인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지주 향신이 그렇게 자선사업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지주와 호신(豪紳, 지방 토호)들은 향리에 군림하며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가난뱅이의 토지를 빼앗았고 고리대금을 자행했으며 소작농을 착취했고 사당을 틀어쥐었으며 관부와 결탁했다.

 

공산당이 광동, 호남, 호북, 강서(江西) 등지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할 때 몇 년 동안 억눌려 있던 군중들의 원한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각지에 농회(農會)가 잇달아 성립되면서 지주들 부류가 향촌을 틀어쥐고 있던 권력을 빼어왔다.

 

토호와 지방의 악덕인사들에 대해 농민들은 ‘흘대호(吃大户, 굶주린 사람들이 떼를 지어 부잣집에 몰려가 음식을 먹거나 양식을 약탈함)'하거나 고깔모자를 씌워 거리에 끌고 다니면서 조리돌리거나, 범칙금을 물어 죄를 사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대처하다가 공개처형을 자행하기도 했다. 일시에 뒤죽박죽됐다.

 

 

사실 대다수의 농민은 천성이 소박하고 성실했다. 몇 평의 농지만 있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특히 사람을 폭행하고 살인까지 하는 그런 포악한 행동은 함부로 하지 않았다. 공산당이 농민봉기를 조직하고 발동해 지주와 관부에 반항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농민운동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반란이 일기만 하면 과거의 제도를 전부 뒤엎어 버렸다.

 

향촌이 대란이 일자 지주와 향신들 중 우두머리 급은 상해로 피했고 두 번째 급들은 한구(漢口)로 피했으며 세 번째 급은 장사(長沙)로 피했고 제일 약한 급들은 현도로 피했다. 그들은 피난처에서 여론을 조작했다. 농민운동을 ‘깡패 운동’이라 저주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향신들의 여론은 중국공산당 지도급 인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호남 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이유한(李維漢, 라매羅邁)은 만년에 회고록에서 인정했다. “그 농민혁명의 폭풍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좌(左)’ 편향의 잘못이 생겨났다. 제멋대로 사람을 잡아다가 조리돌리기를 했고 아무렇게나 벌금을 물리고 구타했으며 현지에서 처결하기도 했다. 강제로 쫓아내기도 했고 강압적으로 머리를 자르기도 했으며 불상을 파괴하고 조종의 위패를 때려 부수기도……. 이외에 북벌 군관의 가족 몇몇을 공격해 호남 농촌과 관련 있는 호남 출신 군관들의 불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중공 중앙 총서기 진독수(陳獨秀)는 본래 이름 있는 교수였다. 그는 농민반란을 찬성하지 않았고 그것으로 인해 국공합작이 결열 되는 것을 원치도 않았다. 1926년 말, 진독수는 중공 호남지구 위원회 서기 이유한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면서 이유한에게 농민운동을 제한할 조치를 강구하라고 요구했다.

 

1927년 1월의 중앙회의에서 진독수는 농민운동이 “지나치고”, “유치하며”, “북벌군의 마음을 동요시킨다”고 질책했다. 진독수의 지시에 따라 호남 공산당 조직은 1927년 초에 ‘세회(洗會, 농민회 정리)'를 진행했다. 행동이 바르지 않은 불량배 같은 무산자를 농민회에서 쫓아내고 국민당 내의 불만을 잠재웠다.

 

반면 모택동(毛澤東)은 농민의 지주와의 투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무릇 극력하게 반항하고 가장 소란을 일으키는 지역은 바로 토호와 지방의 악덕인사, 불법적 지주들이 죄악을 가장 심하게 저지른 지방이다. 농민의 안목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누가 악덕분자인지 누가 악덕이 아닌지, 누가 가장 심한지 누가 그 다음인지, 누구를 엄하게 처벌해야 하는지 누구를 가볍게 처리해야 하는지 모든 농민은 확실하게 구별해 낼 수 있다. 부당한 죄를 묻는 경우는 지극히 적다.” 모택동은 사람을 놀래게 만드는 구호 “토지가 있으면 반드시 토호가 있고, 향신이 없으면 악덕지주도 없다(有土必豪,無紳不劣)”는 구호를 제창한다.

 

모택동의 글은 당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진독수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중공 중앙정치국 위원 구추백(瞿秋白)은 모택동을 지지했다. 그는 모택동의 글을 책자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열정이 가득 넘치는 서(序)를 썼다. “중국 혁명가는 3억 9000만 농민을 대표해 얘기하고 일을 진행해야 한다. 전선으로 나아가 분투해야 한다. 모택동은 시작일 따름이다. 중국의 혁명가들은 개개인이 모택동의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

 

 

농민들이 농촌에서 봉기할 때 노동자운동의 열기가 하늘을 찔렀다. 공산당은 여러 도시에서 공회(工會, 노동조합)를 결성해 노동자를 이끌고 자본가와 투쟁했다. 장기간 동안 노동자의 노동 강도가 지나치게 컸다.

 

노동 환경과 각종 보장의 차이는 현격했다. 임금도 무척 적었다. 대다수는 최저한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임금 인상은 물가 인상을 따라잡지 못했다. 실제 생활수준이 높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떨어졌다.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은 하루 10시간 이상이었다.

 

심지어 “닭이 울 때부터 한밤중까지, 연초부터 연말까지, 아침과 저녁도 없었고 겨울이나 여름도 없었다.” 더불어 민국초기에 군벌이 혼전을 벌이면서 교통이 막히고 공장이 폐쇄되면서 실업률이 급증했다. 노동자는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노동운동은 중국내 민족자산계급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반감을 불러왔다. 1926년 11월, 상해 민족자본가 영종경(榮宗敬)은 동업자들과 연합해 한구(漢口) 노동중재위원회에 서한을 보내 한구 노동쟁의에 불만을 표시했다.

 

“임금을 높이면 일이 감소하고, 열심히 작업하지 않으면 상품이 우수하지 못하다.” 그렇게 계속되면 “물살에 파도가 겹치는 현상이 더더욱 심해져 상점이 휴업하고 공장이 멈추게 돼 시장불황을 초래한다. 어찌 그런 상황이 돼야 하는가!”

 

이 방면에 국민당원과 민족자본가의 입장은 일치했다. 한구의 국민당 중앙 집행위원 주제청(朱霽青)은 노동운동의 문제를 분석했다. “노동자 생활의 고통 대부분은 제국주의 경제 침탈에 있다. 중국의 대자본가는 그리 많지 않다. 무한(武漢)에 있는 다수의 대기업은 모두 외국인이 경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자본가가 경영하는 대기업은 무척 적다. 금일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려면 반드시 노사가 협력해 외국의 경제 압박에 저항해야 한다. 노사 양측의 이익 속에서 노동자의 이익을 구해야 한다. ……현재 공산당이 걸핏하면 파업이라는 수단으로 중국 자본가를 다루는 것은 중국의 미숙한 공업의 발전을 파괴하는 것과 다름없다. 공장이 문을 닫는다면 노동자의 이익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해(害)만 된다. 설령 파업이라는 수단으로 외국 기업가들에게 대응한다고 해도, 파업은 대부분 정치적이라 일반 외국자본이 철수하면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실업을 당하는 고통을 맛보게 된다.”

 

이처럼 국민당이 정치적으로 자본계급 입장에 서있었다. 공산당과 모순(갈등)이 생기고 충돌이 생겼다. 국민당의 대의는 제국주의와 군벌을 전복시키고 삼민주의의 자산계급 공화국을 건립하는 데에 있었다.

 

공산당은 그렇지 않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무산계급혁명의 관념에 따라 폭력혁명으로 모든 착취계급을 전복시키고 노동자농민이 권력을 잡는 무산계급 전제정권을 건립하는 데에 있었다.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다.

 

이것은 국공합작이 언젠가는 ‘분가’해야 한다는 예시나 다름없었다. 노동운동은 국공분열과 정치투쟁의 도화선이 됐다. 1927년 3월, 국민혁명군 제1사단이 강서 공주(贛州)에서 총공회 위원장 진찬현(陳贊賢)을 총살한 것이 신호탄이 됐다.

 

진찬현은 1926년 하반기 공주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1만여 노동자를 조직해 총공회(總工會)를 결성했다. 그리고 56개 기층 공회와 공회 지부를 조직했다.

 

노동임금 인상, 처우 개선, 8시간 노동제 실행을 위해 투쟁했다. 1927년 1월, 국민혁명군에 재편된 제1사단이 공주에 진주한다. 공주 상인과 자본가는 계속해서 당대표 예필(倪弼)에게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

 

당시 여교사 사건이 발생해 노동자와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예필의 정치태도는 반공이었다. 명령을 내려 진찬현과 종우천(鐘友千) 등을 추포했다. 나중에 진찬현은 국민당 우파 군관에 의해 현청에서 총살됐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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