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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회] 강화, 태안, 교동도 이어 제주 온 광해 ... 1641년 위리안치에서 생 마감

 

바다를 유영하던 고기들이 포구로 떠밀려 오를 만큼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포구라는 의미를 담은 어등포는, 광해 임금이 오른 포구로도 유명하다.

 

광해 임금은 제주도의 어등포(구좌읍 행원리)로 상륙했다. 이때 호행별장(護行別將)인 무신 이원로 등 호송하는 그 누구도 광해 임금에게 가는 곳을 말하지 않았으며, 배 위의 사면은 휘장으로 막았다가 배가 제주에 닿아야 비로소 휘장이 열리고 제주라고 알렸다.

 

배가 도착해 휘장을 떼고 광해 임금에게 내리기를 청한 뒤 제주라고 알리자 광해가 깜짝 놀라고는 크게 슬퍼하며,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내가 어찌 이곳까지 왔느냐’ 하였다.

 

제주목사 민기가 무릎을 꿇고 나아가 말하기를 “만약 임금으로 계실 때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물리쳐 멀리하고, 환관과 궁첩들로 하여금 조정 정사에 간여하지 않게 하였더라면, 어찌 이런 곳에 오셨을 것입니까? 덕을 닦지 않으면 배 가운데 사람이 모두 적국이라는 옛말을 모르십니까?” 하니 광해가 눈물만 뚝뚝 흘리고 말을 못하였다.

 

임금으로 있을 당시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라는 대북파 신하들의 끈질긴 요청에 진저리를 치며 다음과 같이 독백했던 사람이 광해군이었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도대체 내가 무슨 죄가 있기에. 어쩌면 이다지도 혹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입니까? 차라리 신발을 벗어 던지고, 인간세상을 벗어나 팔을 내두르고 멀리 떠나서 바닷가에서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구나.”

 

그의 말이 씨가 되었는지 그는 강화와 태안, 교동도를 거쳐 결국 절해고도 제주에서 그의 나이 67세인 1641년 7월 가시가 쳐진 위리안치 안에서 한 서린 생을 마감했다.

 

 

광해 임금은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지만 재임 당시 업적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1608년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했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했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한성부의 질서를 회복하고 창덕궁을 중건했다. 또 경덕궁(경희궁)ㆍ인경궁을 준공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웠다.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신흥국가로 성장하여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조선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에 대비하여 성지와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방비에 힘썼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여 명에서 원군 요청이 있자 강홍립에게 1만의 병사를 주어 파견하나, 의도적으로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과 후금 사이에서 능란한 양면 외교솜씨를 발휘하기도 했다.

 

1609년에는 일본과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임진왜란 이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다. 1617년 회답사(回答使)로 오윤겸을 일본에 파견하여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을 되찾아오게 했다.

 

또 병화로 소실되었던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우려, 선조실록 등 세계기록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허준의 동의보감 등을 간행케 했으며,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성에 사고를 설치했다.

 

오늘날 광해군의 공과는 양면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붕당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현명한 군주였다고 여겨진다. 광해 임금이 죽은 지 500년이 가까워지며 그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 ‘왕의 여자’도 그중 하나이다.

 

제주에 광해군에 대한 흔적은 남문로터리에서 탑동으로 가는 중앙로 서쪽길가에 위치한 국민은행 제주지점 입구 앞에 초라한 표지석인 ‘광해군의 적소 터’로 남아 있다. 광해군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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