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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나눔과 기부 ... 많아서가 아니라 어려운 생활을 경험했기에 자연 발생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설립된 지 20년이 됐다. 제주지역은 대기업이 드물고 제조업이 빈약한 반면 농수산업과 서비스업 비중이 절대적이라 모금과 기부 총량 측면에서 불리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매년 사랑의 온도탑 목표를 초과 달성할 뿐 아니라 아너 소사이어티 모집, 나눔 리더 모집 등에서 단연 전국 톱이다.

 

이러한 기부문화의 확산과 생활화는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역대 회장, 처장, 사무처 직원들이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닌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제주도민의 DNA 속에서 계승되고 있는 나눔문화의 실천적 발로라고 생각된다.

 

많이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없거나 부족해서, 물질적으로 항상 어려운 생활을 경험해 봤기에 나누고 같이 하는 나눔 문화와 정서가 자연 발생한 것으로 보아진다.

 

일제 강점기만을 놓고 본다면, 초창기에는 주로 기반 조성, 즉 학교나 공설운동장, 마을회관, 공동우물 등이나 대참사에 대해 큰 부자는 아니나(?) 자산을 선뜻 기부하는 미거(美擧)를 자주 볼 수 있다.

 

전영준(田永晙)씨의 미거(美擧)

 

제주도에는 오륙년 전부터 각종의 운동이 무던히 발달되엿스나 공설운동장(公設運動場)이 업는 관계로 학교운동장을 빌거나 그러치 아니하면 임시로 밧(畑)을 세(稅)주어서 각종의 운동경기대회를 열게 되든바 제주면 아라리에 거주하는 전영준씨(田永晙氏)는 원래부터 그리 큰 부자는 아니나 독지가(篤志家)로 유명하던 터인데 금반 제주학생친목회 주최인 제삼회 축구대회에 자기 소유인 제주남성외광장(濟州南城外廣場) 전(田) 이천칠백여평이나 되는 광장을 임시운동장으로 빌려 주엇다가 지난 구일 그 대회 상석에서 밧을 제주 성내에 잇는 중앙탐흥회(中央耽興會)에 영구히 운동장으로 기부한다는 쾌락(快諾)이 동씨(同氏)의 입에서 떠러짐에 따라 탐흥회(耽興會)에서는 자회(自會)의 운동장으로만 하지 아니하고 제주도의 공설운동장(公設運動場)으로 만들리라 더라(동아일보, 1925.08.14).

 

강희경(姜希卿)씨의 미거(美擧)

 

제주도 구좌면 세화리(細花里)와 상도리(上道里)는 오육백호의 촌락으로 음료수(飮料水)라고는 봉수(奉水) 일처(一處)에 불과함으로 음료수가 불결(不潔)할뿐 아니라 한기(旱氣)나 되이셔 일개월 이상만 되어 가면 매일 조조(早朝)부터 석양(夕陽)까지 쟁선흡수(爭先吸水)하려고 부인들이 상쟁(相爭)하는 비극을 연출하야 일반의 유감으로 녁이던 중 유지 강희경(姜希卿)씨는 자기 소유 전(田) 이십여평을 기부하고 김상호(金相浩) 문신주(文新周) 고재국(高在國)의 발기로 음료정(飮料井)을 굴(堀)하야 청렬(淸洌)한 수(水)를 득(得)함으로 일반의 행복이 된다더라(조선일보, 1923.12.25).

 

김생길(金生吉)씨 미거(美擧)

 

제주도 구좌면 종달리(終達里) 김생길(金生吉)씨는 면내(面內)에 완전한 교육기관이 업슴을 개탄(慨嘆)하야 금 일천원을 솔선연출(率先捐出)하야 사립보통학교(私立普通學校) 설립을 일반에게 권유함으로 면내 인사는 감격찬동(感激贊同)한다더라(동아일보, 1921.12.11).

 

제주도(濟州島) 대참사(大懺寺)에 현금 오십원을 긔부

 

『제주도의 대참사』에 대한 긔사를 보고 시내 황근영이뎡목에 잇는 유일관 주인 한규식(韓圭植)씨는 금오십원을 본사에 보내어 그 가련한 재앙을 당한 사람들에게 만분의 일이라도 도아 달라고 하였더라(동아일보, 1922.03.30).

 

최명효(崔明孝) 씨의 특지(特志)

 

제주도 구좌면(舊左面) 사립보창의숙(私立普昌義塾)의 운동장이 협애(狹隘)함에 감(鑑)하야 동리(同里) 최명효(崔明孝)씨는 자기의 소유 토지 삼백여평 시가 삼백오십여원을 동숙(同塾)에 기부하얏다더라(동아일보, 1922.11.26).

 

공보(公普)에 오백원 황여환(黃汝煥)씨 기부

 

제주도 구좌면 김녕공립보통학교(金寧共立普通學校)는 원래 사학년제이엿섯는데 교육상 만흔 지장이 잇슴으로 지방인사들은 항상 오육학년 과정을 교수(敎授)할만한 기관의 설치를 열망하엿스나 경비문제로 간금(干今)까지 하등(何等)의 방책을 득(得)치 못하엿섯는데 당지 특지 황여환(黃汝煥)씨가 부설과 강당 건축비로 오백원이란 거액을 김녕공립보통학교(金寧共立普通學校)에 기부하엿다더라(동아일보, 1927.04.22).

 

제주청년회(濟州靑年會)에 토지 기부

 

제주도 성내(城內)에 거주하는 청년유지 김창유(金昌有)씨는 원래 청년운동(靑年運動)에 만흔 이해가 유(有)하든바 금반(今般)에 자기 소유의 토지를 삼천평 이상의 것 이필(二筆)을 제주청년회(濟州靑年會)에 기증(동아일보, 1927.07.12).

 

김두윤(金斗潤)씨 미거(美擧)

 

제주도 구좌면 연평리(演坪里) 김두륜(金斗潤)씨는 항상 조선교육게를 위하야 힘이 미치는 대로 원조하야 오든바 다행히 경제의 여유가 생겻음으로 사립 연평심상소학교(演坪尋常小學校)에 칠천원 사립 하도심상소학교(下道尋常小學校)에 삼백원을 학교시설비로 기부(동아일보,1939.11.23).

 

한편 1920년대부터 돈 벌러 일본으로 건너간 도일(渡日) 제주도민들의 기부도 이어졌다. 특히 조천 출신 고씨 형제와 조갑출여사의 미거(美擧)는 감동적이다. 조천 출신 고씨 형제는 당시 소학교 교사 월급이 40원 정도일 때 대판에서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모은 돈 이천오백을 학교 시설에 기부한 것이다.

 

재일 제주인들의 기부와 사회적 공헌은 감귤산업 뿐 아니라 현재 제주의 밑거름이 되었다. 달리 만덕할망의 자손이 아니다. 일본에 가서도 나눔과 기부가 고스란히 실천되는 걸 보면 제주도민에게는 여전히 만덕할망의 피가 체내에 흐르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나눔 문화 실천의 피가 몸속에 흐르고 있다면 언제 입도했는지, 어디에서 무얼 하든지 간에 모두 다 따뜻하고 올곧은 ‘제주도민’ 이라는 것이다.

 

제주 고씨 형제의 미거(美擧)

 

원적을 제주도 조천면(朝天)에 두고 대판시시영화정(大阪市市施永和町)에서 이화고무공업소(二和工業所)를 경영하고 잇는 고행진(高行珍) 고중진(高仲珍)형제는 평소에 조선교육의 진흥을 희망하야 기회를 고대하던 중 금반 제주도 조천공립심상소학교(朝天公立尋常小學校) 교사(校舍) 증축비로 자진하야 이천오백원을 희사하엿다는데 듣건대 씨의 형제는 어렷을 적에 적수공권으로 대판의 노동시장에 나가서 알알이 모인 피와 땀의 결정의 거금을 항상 원하든 교육사업에 던젓으므로 일반도민은 형제의 미거에 층송이 자자하다고 한다(동아일보, 1939.07.14.).

 

 

제주도의 삼여사(三女史) 각 사백평토지 희사(喜捨)

 

제주읍 도두리(道頭里)에 도두서당(道頭書堂)은 유일의 무산아동교육기관으로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내려오나 지금까지 오막살이 협착한 집에서 연년이 백여명의 아동을 가르키고 잇다 한다. 이에 대하야 교육문제의 중대함을 느낀 유지 고정주(高貞柱)씨외 일반 재대판 도두청년장학회(在大坂 道頭靑年獎學會)에서는 수년전부터 이 방면에 주력하여 오든 중 지난 이월에 사립보교 승격 기성회를 조직하고 일방 육천원의 거액으로 지난 구일부터 서당신축에 착공중인데 이에 찬성하야 고도평(高都平)(五○), 김해옥(金海玉)(六五), 장석찬(張錫燦)의 처 김씨(金氏)(四七)등 삼(三)여사는 자긔들의 생활난도 불구하고 전 재산인 사백여평씩의 토지를 각각 전긔 서당 신축비로 희사하엿다고 한다(동아일보, 1936.03.28).

 

조갑출여사(趙甲出女史)의 미거(美擧)

 

제주도 한림면 조수리(造水里) 조수서당(造水書堂)에 금번 조갑출(趙甲出)(五八) 여사가 서당 유지비로 금 이백원을 기부하엿는데 이제 그 내력을 들어보면 동 여사는 지금부터 육년 전에 남편은 황천객이 되고 그 후로 생활에 쫓기여 대판(大阪)으로 갓엇는데 거기에서 양복 바누질 품파리를 하여 일일에 육십전(錢)의 수입으로 근근 그 생활을 유지하여가며 거기에서 절약한 눈물겨운 몇 푼의 돈으로 지금까지에도 여려 사회공공단체와 사업에 만흔 공헌을 하엿왓는데 금년 오월에 동여사의 고향인 조수리에 귀향하야 조수리의 유일한 교육기관인 조수서당의 유지경영에 곤난함을 탄식하야 동 여사 전 재산인 대판에서 피땀 묻은 돈 금 이백원을 기부하엿는데(동아일보, 1935.09.01).

 

대판 재류 제주인사 소학증축(小學增築)에 이천원 희사

 

대판(大阪)에 건너가 각 방면에 활동하고 잇는 제주도인사들이 고향에 잇는 조천소학교(朝天小學校)의 학급 증축비로 사용하여 달라고 현금 이천원을 히사한 청년과 부인이 잇다. 부인은 원적을 제주조천에 둔 고봉히(高鳳姬)여사로 지금으로부터 십여년 전에 적수로 대판에 건너가서 성공한 부인이고 청년은 원적을 제주도 조천면 신촌리(新村里)에 두고 대판시 동성구(大阪市 東成區))에서 금성고무공업소(金城工業所)를 경영하고 잇는 김정성(金正成)(二八)씨이라 한다(동아일보, 1939.08.26).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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