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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 잘 쓰는 자, 밥 한 그릇으로도 인명 구한다"[62화] 만덕할망 ... 제주사회 불세출의 의인(義人), 대표적 위인(偉人)
진관훈 박사  |  adel@jejut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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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17  09: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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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덕 국가 표준영정 제82호(2010년 7월21일 지정)/윤여환교수 제작

‘만덕(萬德)’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얼까?

‘만덕할망’, ‘기녀(妓女)’, ‘거상(巨商)’, ‘구휼(救恤)’, ‘금강산 유람’, ‘의녀반수(醫女班首)’, ‘은광연세(恩光衍世)’, ‘채재공 만덕전(菜濟恭 萬德傳)’ 등과 더불어 ‘고두심’, ‘이미연’, ‘김만덕상’, ‘김만덕기념사업회’, ‘김만덕기념관’, ‘나눔쌀 만섬 쌓기’, ‘객주터’ 등.

개인적으로는 고(故) 김영란과 신사임당이 떠오른다. 2010년 작고한 김영란은 제주자치도 여성특보 시절, 2009년 발행될 오만원권 도안에 김만덕 초상을 올리고자 그 당시 한국은행 제주본부 고은호 본부장과 제주지역 여성단체 등과 같이 나름 엄청나게 노력했다.

현재 오만권 도안에는 신사임당 초상이 도입되었다. 당시 오만원권 도안 선정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한 건 김만덕의 인지도가 신사임당에 비해 매우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제주사회에서 만덕할망 김만덕은 불세출의 의인(義人)이며 대표적 위인(偉人)이다.

만덕(萬德) 제주교방(濟州敎坊), 행수기야(行首妓也)라 정조 갑인(正祖 甲寅)에 제주대기(濟州大饑)하거늘 만덕이 경가연곡(頃家捐穀)하야 제휼(濟恤)이 심중(甚衆)이라 목사 계문(牧使 啓聞)하거늘 왕이 목사로 하여금 만덕의 소욕(所欲)을 문(問)하라 하니 만덕이 왈(曰)“오즉 왕이 어용(御容)과 금강산(金剛山)보기가 소원이라”하는 지라 상(上)이 특히 만덕으로 하여금 승일상래(乘馹上來)함을 명하고 여의(女醫)의 품직(品職)을 특수(特殊)하야 입시(入侍)케 하고 영동 각읍 수령(守令)의게 명하야 금강산편람(金剛山便覽)을 지도(指導)케 하다. 만덕이 금강산으로부터 환조(還朝)함에 당시 공경대부(公卿大夫)와 문장재자(文章才子)가 다 신행시(贐行詩)를 부(賦)하야 만덕이 고향으로 송(送)하고 번암(樊岩) 채재공(菜濟恭)이 만덕의 전(傳)을 저(著)하니라(동아일보 이조인물약전(李朝人物略傳), 1921.10.31).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은 갑인ㆍ을묘년 대기근 때 천금(千金)을 출연해 쌀을 사들여 제주도민들을 진휼(賑恤)했다. 1792년부터 흉년이 계속되어 1794년 한 해에만 제주도민 30%가 굶어 죽었다. 만덕은 전 재산을 풀어 육지에서 들여온 곡식 500여 석 가운데 10%는 가족 친지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450여석을 관청에 진휼미로 내놓았다.

재물(財物)을 애끼지 안코 던진 자선가(慈善家) 김만덕(金萬德)

김만덕은 제주여자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의탁할 곳이 없어 기생집에가 자라더니 관가에서는 만덕의 이름을 기안(妓案)에 두엇다. 만덕은 비롯 기생노릇을 하기는 하나 기생으로서 평생을 보내려고 하지는 안핫다.

나히 스물이 넘어 그 뜻을 관가에 호소하고 울며 하소연하매 관가에서도 불상히 여기고 기안(妓案)에서 그 이름을 없애고 양인(良人)을 맨들엇다.

만덕은 미천한 집에 태어나핫으되 훌륭한 사람이 아니면 남편을 삼지 안코 돈모는 재주가 놀라워 시세가 오르고 나릴 줄을 알고 물건을 삿다 팔엇다 하야 수십년동안 이름난 부자가 되었다.

정조(正祖) 십구년에 제주가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주려 죽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곡식을 보내여 구원하엿으나 머나먼 바닷길에 미처 이르지를 못하엿다. 그때 만덕이는 천금(千金)을 내어 육지의 여러골 쌀을 급히 무역하여 들어어 그 십분의 일을 취하여 친족들을 나누어 주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관가에 바치매 백성들이 이 소문을 듣고 관가 앞으로 모이어 그 쌀을 얼마씩 타가며 그 은혜를 칭송하야 우리를 살린 이는 만덕이라 하엿다.

정조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제주목사에게 명하야 “만덕이 소원이 잇거든 무엇이든지 시켜주라”하섯다. 목사가 만덕을 불러보고 이런 뜻을 알린즉 “다른 소원은 없사오나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일만 이천봉을 보앗으면 죽어도 한이 없겟사오이다”하엿다. 그때 나랏법에는 제주여자를 바다를 건너 육지를 못오게 금하엿으나 목사가 그 소원대로 나라님께 알외어 그대로 허락하여 주고 역마(驛馬) 태우고 이른 곳마다 공궤(供饋)를 하게 하엿다.

만덕은 그 이듬해 가을에 서울을 와서 그때 정승이던 채재공(菜濟恭)을 찾어 보앗다. 채재공은 그 사실을 나라님께 알외엇다. 나라님께서는 선혜청(宣惠廳)을 명하야 양식을 주고 수일만에 내의원의녀(內醫院醫女)를 삼어 여러 의녀(醫女)의 반수(班首)가 되게 하엿다. 만덕은 준례에 의하여 궐내에 들어가 문안을 하엿다. 각 전궁(殿宮)이 각각 시녀(侍女)로 하여금“너는 한 여자로서 의기를 내어 주리는 백성을 천여명 구원하엿으니 기이하다”하시고 후히 상을 주셨다.

만덕은 서울서 한 반년을 잇다가 그 이듬해 늦은 봄철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만폭(滿幅) 중향((衆香)을 다 보고 안무재를 넘어 개잔령으로 나려 삼일포(三日浦)에 배를 디우고 총석정(叢石亭)도 올라가보고 다시 서울로 와 내원(內院)에 이르러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고하매 각 전궁이 전과 같이 상을 주엇스며 여러 공경(公卿)들이 만덕을 한번 보고저 안는 이가 없엇스며 특히 채정승(菜恭)과는 눈물을 흘리고 작별하엿다. 그때 만덕은 나히 오십팔이엇다(동아일보, 사상(史上)의 여걸찬(女傑撰)(七), 1940.01.12).

   
▲ 제주시 사라봉 모충사 내에 있는 김만덕 묘비 [제이누리DB]

김만덕은 제주 섬에 사는 관기(官妓) 신분의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신분도 타개하고 상업을 통해서 거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모은 전 재산을 지역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조정에서도 하지 못한 진휼을 했다.

또한 당시 출륙금지령 하에서 금강산 구경까지 했다.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이란 1629년(인조 7년)부터 1823년(순조 23년)까지 200년 간(실제적으로는 1850년까지 250년 간) 국법으로 시행된 유민(流民) 통제정책을 말한다. 출륙금지 250년간 제주도민들은 제주 섬을 떠나 육지로 나가는 것이 국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다.

당대(當代)의 경국가인(傾國佳人) 제주기생 김만덕(濟州妓生 金萬德)

시대는 이조 정종(李朝 正宗) 십구 년경 제주 기생 만덕은 원래 양가녀 김씨(良家女 金氏)다. 유시(幼時)에 친모(親母)를 사별하고 인동(隣洞) 모 총각과 결혼하야 치가(治家)케 되엇다. 그 총각은 반불구자(半不具者)이나 영덕(榮德)은 사부(事父),사부(事夫)의 양성(兩誠)이 여일(如一)하얏다.

그런데 그 친부가 역시 사망. 부사후(父死後) 불구하야 그 부역사망(夫亦死亡). 만덕은 가위무의무탁(可謂無依無托). 연(然)이나 공가고절(公家苦節)을 자수(自守)하든바 의외(意外) 가내(家內)에 괴변(怪變)이 매야빈번(每夜頻煩)하야 남대남아(膽大男兒)로도 수당(雖當)이어늘 황저년소여성호(況且年少女性乎)아. 부득기(不得己) 인가(隣家) 모기생가(某妓生家)에 의탁(依託)하얏다.

김만덕은 기가(妓家)에서 의탁(依託)하얏다가 필육기첩(畢育妓捷)에 입명(入名)이 되엿다. 그러나 천성(天性)으로 불긍(不肯)하야 관아(官牙)에 설기(設妓)를 환고(歡顧)하야 제기(除妓)가 되엇다.

정종왕(正宗王) 십구년 제주도가 대한재(大旱災)로 이재민아 부지기수 이엿는데 조정에서 구제에 노력하나 해안 천여리에 포유미급(撜有未及)의 환난(患難)이 잇섯는바 이에 만덕이 사재(私財)를 경(傾)하야 구급(救急)하얏다. 왕께서 문지대리(聞之大离)하사 그 소원을 문(聞)하시매 궁전배관(宮殿拜觀), 금강산구경(金剛山求景)이 엇슴으로 그 소원이 또한 의외(意外)인 것에 대경(大驚)하얏다. 그리하야 당시 채재상(蔡宰相)이 알선으로 이개 소원(二個 所願)을 수(遂)케 하얏다.

김만덕은 하향천기(下鄕淺妓 )로써 개인으로는 절부(節婦)의 미행(美行) 사회적으로는 자선의 미덕을 수행한 것이 희우(稀竽)한 사실이라 운위(云謂)치 아니치 못할 것이다(조선일보, 신정언(申鼎言), 1936.06.11).

만덕은 평소 ‘재물을 잘 쓰는 자는 밥 한 그릇으로도 굶주린 사람의 인명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썩은 흙과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만덕의 사회적 공헌과 나눔 철학으로 지금도 많은 제주도민들은 김만덕 의인을 ‘만덕 할망’이라 칭송하며 존경과 사랑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제이누리=양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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