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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8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새금화(賽金花)는 청말민초(淸末民初)의 명기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래 이름은 부옥련(傅鈺蓮)이라 하기도 하고 조채운(趙彩雲)이라 하기도 한다. 강소(江蘇) 염성(鹽城)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안휘(安徽) 이현(黟縣) 사람이라고도 한다.

 

동치7년(1887)에 일찍이 장원급제했던 홍균(洪鈞)이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 첩으로 삼았다. 그때 홍균의 나이는 48세였고 그녀의 나이는 15세였다. 얼마 후에 홍균이 주 러시아 공사 및 유럽 각국의 공사로 발령되자 홍균의 부인이 사교장에 다니기 싫어해 그녀를 대신 동반하도록 했다. 홍균이 죽은 후에 상해로 가서 다시 기녀가 됐다. 이름을 조몽란(曹夢蘭)으로 개명했다가 뒤에 천진(天津)으로 가 또다시 새금화(賽金花)로 바꿨다.

 

새금화는 청나라 말기 여러 명기 중 가장 전기적인 인물이다. 시류에 부침한 기구한 운명, 일생 동안 각양각색의 호둣속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경국지색에 대해서 ; 호객을 하던 기녀들의 배에서 일약 ‘공사부인(公使夫人)’이 돼 조정명관 홍장원을 따라 유럽을 방문했던 기이한 경력에 대해서 ; 경자사변(庚子事變, 의화단 사건) 때에 8국 연합군 총사령관 발데제(Waldersee, 와덕서瓦德西)와의 예사롭지 않은 친밀한 관계, 그리고 이로써 발생한 특수한 역사적 정치적 상황아래서 끼친 영향 ; 신문화운동의 중요 인물 유반농(劉半農)과의 ‘역사상 유례’없는 조우, 그리고 만년에 다시 기루로 들어가 다시 한 번 기생으로 살아가게 된 초라한 삶 등, 새금화는 생전, 사후 모두 각계에서 주목받았던 뉴스의 인물이었다. 그녀와 관련된 방문기, 전기, 시사, 소설, 화극, 회고록 등 제목만 봐도 그 추세를 파악할 수 있다.

 

장원(壯元)에게 시집을 갔다는 것은 풍파를 겪은 여자에게는 특별한 일에 속한다. 장원 부인은 분명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오래지 않아 홍균은 황제의 명을 받아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4국 공사로 파견된다.

 

정부인은 서양 풍습이 중국과 달라 적응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 새금화에게 복식을 내주며 홍균과 함께 유럽으로 떠날 것을 명했다. 홍균은 새금화를 데리고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네덜란드를 방문한다.

 

새금화는 자신의 천성적인 교재 재능과 동방 여성의 온화함으로 유럽 상층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공사부인’으로 지낼 동안 새금화는 유럽 언어를 익혔을 뿐만 아니라 미모와 총명함으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독일 황후조차 그녀와 기념사진을 찍을 정도였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새금화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홍균은 평범하고 재미가 없었다. 노쇠하고 병이 많았다. 새금화는 자신이 “재능을 십분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크고 준수한 금발 벽안의 사회 유명 인사들과 애매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러시아 육군 중위 와히드(Wahid)가 서양에서 맺은 친한 친구라 한다.

 

새금화의 비밀과 관련하여 가장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은 1900년대의 ‘새진화와 발데제 공안’과 “강화를 서둘러 성사”시킨 일이다. 새금화의 자술은 대략 다음과 같다.

 

1900년 8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략했을 때 독일 병사가 새금화의 거처에 난입했다. 마침 새금화가 독일어를 알고 있어 독일에서 안면이 있었던 와히드를 포함한 유명 인사들의 안부를 묻자 독일사병은 놀라 감히 대하지 못하고 돌아가 연합군 총사령관 발데제에게 보고했다.

 

발데제는 이튿날 새금화를 데리고 군영으로 돌아갔고. 그 후 빈번하게 왕래하기 시작했다. 북경에서 만났을 때 “벨데제와 나는 10년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내 용모가 사절(使節)부인 때와 똑같아 벨데제도 나를 알아봤다”고 했다.

 

새금화는 자술 중 벨데제가 자신에게 군량을 담당하도록 했다고 진술했다. 당시 중국은 곡물 상점을 열지 못했다. “나는 당시 북경에서 명성을 누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새금화가 나타났다고 듣고서야 승낙했다.” “나중에 각국의 군량도 벨데제가 소개해 내가 처리했다.” “그들은 군량 이외에 화물을 필요로 했다. 여자도 필요했다. 여자는 예뻐야 했고 독살스럽지 않아야 했다. 나는 그들에게 20여 명의 양갓집 부녀자를 소개해 줬다. ……그렇게 연합군의 식(食)과 색(色)의 문제를 내가 대신해 해결했다.” 그녀는 또 민중의 재난을 당해 어려움이 처했다는 것을 듣고는 벨데제에게 간청해 군사들이 약탈을 금하도록 했다고도 했다. “벨데제 장군은 만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사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후 북경의 민중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고 했다.

 

새금화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화를 진행하기 시작했으나 교착 상태에 빠졌었다. 독일 공사 케텔러(Ketteler)가 의화단에 의해 피살되자 그의 부인은 강경한 태도를 견지했다.

 

서(西)태후가 목숨을 보상하고 황제가 사죄하라는 등 포악하고 잔혹한 조건을 내세우며 압박했다. “전권 강화 대신 이홍장(李鴻章)도 속수무책이었다. 내가 그런 상황을 보고 마음이 조급하고 견디기 힘들어 개인적으로 여러 번 발데제에게 간절하게 권했다.”

 

벨데제의 소개로 케텔러 부인에게 가서 간절히 부탁하며 케텔러 공사를 위해 큰 비석을 세우고 황제의 이름으로 비문을 새겨 공사가 살해당한 곳에 세움으로써 공사를 기념하도록 “내가 그렇게 여러 가지로 설득을 시키자 그제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건 내가 국가를 위해 작은 공헌이라도 한 것이 아니던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8국 연합군이 북경에 입성한 후 새금화가 유럽 언어를 알고 있던 까닭에 서양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가 서양에 있을 때 연합군 총사령관 발데제와 안면이 있었는데 이번 만남으로 옛정이 다시 타올라 더더욱 친밀해졌다.

 

그리고 그런 특수한 관계로 새금화는 발데제에게 강탈을 멈춰 백성들을 편안케 해달라고 부탁했다. 신축강화(辛丑講和)가 맺어진 것도 그녀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북경사람들은 그녀에게 감사를 드리며 “강화대신(講和大臣) 새이야(賽二爺)”라 존칭을 붙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도 새금화와 관련해 아직까지도 쟁론이 많은 부분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1832년에 출생한 발데제는 당시 이미 68세에 이른 노구로 새금화와 사통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많고 많은 북경의 기녀들 중 유럽언어에 능통한 새금화가 두각은 나타낸 것만은 분명하다. 또 그녀들을 위해 연합군의 환심을 사고 불편하지 않도록 소개해줬을 것이고.

 

새금화가 ‘신축강화’를 맺는데 힘을 썼는지에 대해서 역사적 사료로 증명할 방법은 없다. 민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시 다수의 기록을 보면 차를 타고 유럽인들에게 손을 흔들며 거리를 지나는 새금화에 대해 최소한 일반사람들은 반감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화대신 새이야”라는 명칭은 북경에서만은 위력을 가지고 있었음도 분명하다. 전하는 말 하나 하나가 진실성이 있다고는 말 할 수는 없지만 일정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새금화가 발데제와 긴밀한 사이가 아니고 그저 우연하게 한두 번 만났을 뿐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새금화가 몇 마디 독일어를 한다고 해서 발데제와 국가의 대사를 논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연합군 총사령관은 군사적인 사무를 주관할 뿐으로 모든 국가 대사를 논할 수는 없었다. 강화나 국가 외교는 역시 각국의 공사가 주관했다. 그렇기에 새금화와 발데제가 중심이 돼 신축강화를 성사시켰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신축조약』이 체결된 후 자희(慈禧)태후와 광서(光緖) 황제는 서안에서 귀경한다. 홍균의 동창인 친구 손가내(孫家鼐)가 북경에서 홍균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핑계를 만들어 새금화를 북경에서 쫓아냈다.

 

새금화는 소주(蘇州)로 돌아 간 후 본래 하던 기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때 그녀의 나이는 30대 후반이라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누릴 수 없었다. 그녀가 40세가 됐을 때 이전에 그녀에게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던 위사령(魏斯靈)에게 시집간다.

 

북경으로 돌아 간 후 전문(前門) 앞 앵도사가(櫻桃斜街)에서 살다가 민국 6년에서야 위사령과 정식으로 혼인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5년간 살다 위사령이 병으로 죽었다. 새금화는 홀로 여생을 지내다 고독하고 처량하게 생을 마감한다.

 

새금화가 죽자 신문에 “북경 각계의 인사들이 경자년 난세 때 이룬 공적을 기념하여 분분히 원조했다”고 기록돼 있다. 많은 저명인사들이 뒤처리하여 새금화를 도연정(陶然亭) 곁에 장사지냈다.

 

분명한 것은 새금화의 독특하면서도 복잡한 일생은, 따분하다 싶은 문인들과 통속 신문들이 떠들어 대는 기사거리였다는데 있다. 그렇게 새금화는 더욱더 신비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출신이 미천하고 풍진 속에서 살았던 그녀의 일생 중 두 번이나 역사의 풍운을 만났으니……, 유성이 스치고 지나가면 세인들의 주목을 받지 않던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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