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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회] 오현 ...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서원에는 충절과 학문으로 추앙받는 분을 모셔야 했다. 비록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어도 훗날 복권되어 시호(諡號)를 받은 공이 아니면 안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75년(숙종 1년) 부호군 이선이 제주도를 순무(巡撫)하고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한 40가지 중 하나로 귤림서원 배향문제가 들어있다.

 

내용인 즉, 충암 김정·청음 김상헌·동계 정온을 배향함은 마땅하나, 이인 목사가 유림과 상의 없이 자신의 조부 이약동을 3현 위에 모셨는데 이는 철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귤림서원은 본사인 오현사와, 영혜사·향현사 등 2개의 별사와, 유생들이 공부하는 장수당으로 구성되었다.

 

집정초기부터 서원을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근원으로 여긴 흥선대원군은, 1871년(고종 8년) 대대적인 서원철폐령을 내려 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했다. 서원철폐령으로 200년 넘게 유학 및 유교문화의 전통을 계승해왔던 제주의 귤림서원도 폐원되었다.

 

212년 동안 제주교육의 요람이었던 귤림서원은 1871년 폐원되었다가, 1892년(고종 29년) 제주 유생 김희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 선생을 기리기 위해 조두석(俎豆石: 제단석)을 쌓아 춘추로 제사를 지내니, 이것이 오현단의 탄생으로 이어져 오늘날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1907년 제주군수 윤원구 등이 귤림서원 터에 도내 최초로 설립한 사립 의신학교는, 1909년 공립제주농림학교, 1911년 제주공립농업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현 제주제일중학교와 제주고등학교의 전신인 사립의신학교는 중등교육 및 실업교육의 본산이자 시초가 되는 셈이다.

 

 

해방 후에는 조선시대 유학의 전당이자 교학의 터전이기도 한 오현단 일대에서 1946년 오현중학교와 1951년 오현고등학교가 개교했다. 다음은 제주성지 안에 조성된 오현단에 대한 설명이다.

 

오현단(五賢壇): 오현단은 조선시대 제주에 이바지한 오현(五賢)을 배향한 귤림서원의 옛터에 조성한 제단이다.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에 제주에 유배 왔던 충암 김정, 1534년(중종 29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규암 송인수 1601년(선조 24년)에 제주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 1614년(광해군 6년)에 제주에 유배 왔던 동계 정온, 1689년(숙종 15년)에 제주에 유배왔던 우암 송시열 등 다섯 사람을 이른다. 1871년(고종 8년)에 귤림서원이 헐린 뒤에 1892년(고종 29년)에 김의정을 중심으로 한 제주 유림이 귤림서원의 자리에 제단을 조성했다. 지금은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俎豆石) 5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 제단은 1578년(선조 11년)에 제주목 판관 조인후가 가라쿳물 동쪽으로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인데, 1667년(헌종 8년)에 충암묘를 현 오현단으로 옮겨와 사당으로 삼았다. 1659년(효종 10년)에 목사 이괴가 이곳의 장수당(藏修堂)을 재(齋)로 바꾸어 귤림서원이라 했다. 1682년(숙종 8년)에 사액(賜額)을 받고 김정·송인수·김상헌·정온 등 네 사람을 모셨다가, 1695년에 송시열도 함께 모시면서 다섯 현인을 배향하게 됐다.

 

위의 글에서도 이회를 이괴로 잘못 표시하고 있으며, 제단을 조성한 이는 김의정이 아닌 김희정이다.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은 헐리지만, 선현들을 배향하기 위해 명맥을 유지해온 오현단은, 1971년 도지방문화제 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중기 대학자이자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1607-1689)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경종)의 왕세자 책봉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83세 고령임에도 제주에 유배되었다. 유배생활은 100일에 지나지 않았지만 유림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추사 김정희는 그를 기리는 시를 남겼고, 최익현은 시와 편지, 상소문에 송시열을 자주 거론했다. 1771년(영조 47년) 양세헌 목사가 제주성 내 산지목골에 송시열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유허비는, 1977년 오현단으로 옮겨졌다.

 

 

오현단 내 암벽에 새겨진 증주벽립(增朱壁立)은, 중국의 대학자인 증자와 주자가 쌍벽으로 나란히 서 있는 것처럼 증자와 주자를 공경하고 배운다는 뜻으로 송시열이 쓴 글씨이다. 이를 1856년(철종 7년) 채동건 목사와 홍경섭 판관이 탁본 해 바위에 새긴 것이 지금의 오현단의 명품바위인 증주벽립이다.

 

제주시는 2004년 오현단 경내에 귤림서원을 복원했다. 서원은 사당, 강당, 협문 각 1동과 110미터 담장이 조성되었다. 오현 선생이 제주에 머문 기간은 송시열과 송인수 3개월, 김상헌 4개월, 김정 1년 3개월, 정온 8년 6개월 등 정온을 제외하면 시간적으로 짧다.

 

제주에서는 교학을 펼친 인물인 제주 4현과 제주 5현을 추앙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 그들 모두가 제주선인의 교학과 문화에 기여한 인물인지를 검증하는 것도 후세의 몫일 것이다.

 

당시의 집권세력이나 당파의 이익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를 그대로 받아드리는 것에도 문제는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전에 진실에 바탕을 둔 바람직한 기록이여야 할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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