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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회] 사(祠)로 충암묘, 재(齋)로 장수당 ... 재생(齋生) 20명으로 시작

 

제주에는 서원으로 귤림서원과 삼성서원 두 곳이 있었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 이념에 따른 유교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 지방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1543년(중종 38년) 풍기군수 주세봉이 지금의 경북 영주에 세운 소수서원 설립 이후, 타 지방에는 사학인 서원이 들어섰지만 제주에는 백년이 지나도록 서원이 세워지지 않았었다.

 

사액서원은 왕으로부터 편액, 서적, 토지, 노비를 하사받는 등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이다. 서원이 국가에서 재정지원을 받는 사액서원이 되려면 사(祠: 제사기능인 사당)와 재(齋: 교학기능인 교실)를 갖추어야 했다.

 

1578년(선조 11년) 조인후 판관은 제주에 귀양 왔다가 사사된 충암 김정(1486-1521)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사후 57년 만에 산지천변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廟)를 세웠다.

 

기묘사화시 조광조 등과 함께 화를 입어 간신들의 모함에 제주에서 사사된 충암 김정은, 1년 4개월 동안 지방 유생들을 교학하고, 그의 조카에게 보낸 ‘제주풍토록’은 당시 제주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충암은 왕의 자진 명령에 따라 사약을 받고 36세 나이에 제주에서 목숨을 끊었다. 충암 김정의 제주 제자인 김광필은 1534년(중종 29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심연원에게 건의하여 향교의 명륜당을 중수하고, 성안 남쪽에 향학당을 설립토록 했다.

 

1658년(효종 9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회는 제주항교 옆에 초가집 6칸을 짓고 학생 중 뛰어난 20명을 선발하여 관비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듬 해에는 이회 목사가 제주선비 김진용의 건의를 받아 드려, 1660년(현종 원년)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의 집터에 장수당(藏修堂: 쉬지 않고 공부 하는 집)이라 이름 지은 학사를 짓고, 유생 35명을 수용해 사서삼경을 익히게 했다.

 

이회 목사는 초하루와 보름에 직접 강연을 하면서 향교의 선비들도 참석하게 했다. 장수당은 춘궁기에 빌려주는 환곡에 대한 모곡(이자로 받는 곡식) 일부를 학생들의 식량으로 제공하기도 했으며, 콩·밭벼·목 면도 지급했다. 또 배 한 척을 지정해 육지와의 교역을 통해 운영경비를 조달했다.

 

 

1665년(현종 6년) 최진남 판관은 외진 곳인 가락천에 있던 김정의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으로 옮기면서 사(祠: 제사기능인 사당)와 재(齋: 교학기능인 교실)를 갖춘 명실상부한 서원을 세웠으니, 이때부터 귤림서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제주에 처음으로 사(祠)로 충암묘와 재(齋)로 장수당을 갖춘 서원이 세워지게 된 것이 다. 다음은 제주성지 안에 있는 귤림서원 안내판 내용이다.

 

귤림서원(橘林書院): 귤림서원은 1578년(선조 11년)에 제주판관 조인후가 기묘사화로 1520년(중종 15년) 6월 제주도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적거지에 사묘를 세운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1660년(현종 1년) 제주목사 이괴가 장수당을 건립하였고, 1667년(현종 8년)에는 제주판관 최진남이 김정의 사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 짓고, 이를 사(祠)로 하고 장수당(藏修堂)을 재(齋)로 하여 귤림서원이라 현액하였다. 1682년(숙종 8년) 신경윤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숙종이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의 4현을 봉향하다가 1696년(숙종 22년)에 이익태 절제사 때 송시열이 추향됨으로써 5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그 뒤 1850년(철종 원년) 제주목사 장인식이 귤림서원 묘정비를 세웠다. 초기의 재생(齋生)은 20명이었으나, 뒤에 15인을 늘려 35인이 되었다.

 

위의 안내의 글에 적힌 이괴 목사는 이회 목사를 잘못 쓰인 것으로 보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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