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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성의 날씨이야기(29) 가난과 억압, 공포와 슬픔의 아프가니스탄 ... 희망은?

 

아프가니스탄은 고대부터 서양과 동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핵심루트 중 하나였다. 바닷길이 열린 후에는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요충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은 주변국들로부터 계속 침공을 받는 불행한 역사를 가지게 된다.

 

한편 아프가니스탄이 역사의 전면으로 나온 때는 기원전 550년 페르시아 제국 시대부터였는데 페르시아를 상세히 고찰한 로마인들에 의해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최초의 이민족은 페르시아인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인 키루스 대왕은 두 차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단행했다.

 

1차 침입에서 그의 군대는 ‘죽음의 사막’이라 불리던 게드로시아 사막에서 날씨로 인해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후퇴한다. 하지만 그 이후 칸다하르를 관통해 진군한 다음 북쪽으로 카불강 계곡까지 진출했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 다음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군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오늘날의 헤라트 부근인 아리아(Aria)로 진입하자 페르시아인인 사티바르자네스 총독이 항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귀족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고 이들을 아프가니스탄 통치에 활용했다. 후에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알렉산드로스는 과감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알렉산드로스군은 계속 진군해 산골짜기에 포진한 아리아인 1만 3000명과 대적하게 되고 알렉산드로스는 날씨를 활용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는 나무를 잘라 가파른 절벽을 향해 쌓았고 뜨거운 8월 동안 강한 서풍이 불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강한 서풍이 불자 알렉산드로스는 바짝 마른 나무에 불씨를 당겼다. 순식간에 산 전체가 화염에 싸였으며 아리아인은 전멸했다.

 

아리아인의 반란을 진압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계획을 바꿨다. 그는 원래 박트리아(Bactria)로 진군하려고 했었지만 아리아인을 처리한 후 남쪽으로 진군하기로 결정내렸다.

 

아프가니스탄 남부인 아라코시아(Arachosia·지금의 아르간다브 강 부근) 지방이 불안한 상태이기도 했고 박트리아로 가려고 시도했던 그 짧은 기간 동안 식량이 문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을 지난 알렉산드로스는 인도 정벌을 마친 후에 귀국길에 올랐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특한 세 가지 요소를 알아야만 한다. 첫째, 접근 불가능한 산악지대의 각 부족들은 중앙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고립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산악지형이 유리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은 외국인에게 큰 어려움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둘째, 이 나라는 전반적으로 세계 무역의 주된 흐름과 외국군의 주요 경로로부터 점차 고립돼 가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곳에서 한때 강성했던 제국들이 급속히 쇠퇴하고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던 셈.

 

셋째, 유목민으로 살아온 아프간인의 원시성 자체가 강점이었다. 도전받지 않았을 때는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상무(尙武)정신으로 무장된 전사로 남아 있었다.

 

영국, 러시아, 미국 등 세계 최강대국과의 전쟁에서도 굴하지 않는 아프간 전사들은 다른 문명권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어갔다는 것. 그래서 전사가들은 아프가니스탄의 전투능력에 대해 불가사의하다고 말했다.

 

한편 과거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사례로 자세히 살펴볼까한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은 아프가니스탄의 통치자 모하마드 한을 축출하고 허수아비 왕으로 수자 샤 두라니(1785~1842)를 세우기로 했다.

 

한때 아프가니스탄의 통치자였지만 25년 전에 축출된 수자 샤가 영국의 힘을 빌려 왕좌에 복귀한다면 그는 영국에 충성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국의 침공은 성공적이었다. 저항조차 받지 않고 1839년 8월 카불(kabul)에 입성할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남쪽지역에서도 영국 군대가 식량을 약탈하고 토지를 빼앗으면서 족장들의 분노를 샀다.

 

많은 부족이 왕과 영국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날로 악화되는 저항사태에 병력을 파견했다. 하지만 아프간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영국군은 적의 포격보다 일사병으로 더 많이 죽어갔다.

 

1841년 11월 23일 벌어진 전투에서 영국군은 대참사를 기록했다. 당시 영국군 장군이었던 엘핀스톤은 “포위된 상태로 3주 정도 진지를 지켜온 이 시점에서 식량과 사료 부족, 기아와 추위로 인한 병력의 감소, 교통 차단, 불투명한 구원 전망, 다가오는 혹한의 날씨에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다. 벌써 병사들은 추위와 동상으로 쓰러지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후 영국 병사들은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급격히 무너져갔다.

 

후퇴하던 영국군은 도처에서 아프간 병사들에게 공격을 당한다. 영국은 항복을 거부하고 최후의 1인까지 항전을 거듭하며 후퇴했다. 1842년 1월, 후퇴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1만 6500명이 기아와 추위로 죽어간, 전쟁사에서 보기 힘든 비극이었다.

 

기원전 4세기부터 알렉산드로스의 그리스군, 몽골군, 영국군,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왔다. 21세기엔 미국 등 국제안보지원군이 대테러작전을 수행중이다.

 

그래서일까. 가난과 억압, 공포와 슬픔으로 대변되는 단어가 ‘아프가니스탄’이다. 이런 곳에서 과연 희망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역사는 굴종하기를 거부하는 용기 있는 자의 것이기 때문에 과거 전쟁의 아픈 역사를 갖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곳에도 반드시 평화가 찾아오리라 믿는다. <온케이웨더>

 

반기성은?

 

=충북 충주출생. 연세대 천문기상학과를 나와 공군 기상장교로 입대, 30년간 기상예보장교 생활을 했다. 군기상부대인 공군73기상전대장을 역임하고 공군 예비역대령으로 전역했다. ‘야전 기상의 전설’로 불릴 정도로 기상예보에 탁월한 독보적 존재였다. 한국기상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군에서 전역 후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위원을 맡아 연세대 대기과학과에서 항공기상학, 대기분석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기상종합솔루션회사인 케이웨더에서 예보센터장, 기상사업본부장, 기후산업연구소장 등도 맡아 일하고 있다. 국방부 기후연구위원, 기상청 정책자문위원과 삼성경제연구소, 조선일보, 국방일보, 스포츠서울 및 제이누리의 날씨 전문위원이다. 기상예보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대통령표창,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날씨를 바꾼 어메이징 세계사>외 1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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