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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8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강유위(康有爲, 1858~1927), 자는 광하(廣厦), 근대 개량주의 영수로 광동(廣東) 남해(南海) 사람이다. 관료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광서(光緖) 때에 진사였고 공부주사를 제수 받았다.

 

1898년 광서제를 의지해 변법유신(變法維新)운동을 발동했으나 실패 후 외국으로 망명했다. 1917년 장훈(張勛) 복벽운동에도 참여했으나 실패한다. 일생동안 많은 저술을 남겼다.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대동서大同書』, 『중용왕中庸汪』이 그것이다.

 

1985년 4월, 일본이 강압으로 『마관조약馬關條約(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강유위가 주동해 북경에서 응시한 1300여 명의 거인(擧人)들이 연명한 후 광서제에게 상서를 올린다.

 

민족이 위급에 처한 엄준한 형국을 간곡히 진술하고 화친 거절, 천도, 병사 훈련, 변법을 실행하자는 주장을 제기한다. 그 ‘공차상서(公車上書)’는 유신변법의 서막이었다.

 

유신 인사와 황제 도당의 관원들의 적극적인 추진아래 1989년 6월 11일 광서제가 ‘명정국시(明定國是)’ 조서를 반포하고 변법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신정이 시작됐지만 9월 21일 자희(慈禧)태후가 정변을 발동할 때까지 103일밖에 유지하지 못한다. 역사는 이를 ‘백일유신(百日維新)’이라 부른다.

 

신법 조치는 봉건통치의 기초를 흔들지는 못했으나 그때 행한 여러 가지 조치들은 신흥 자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봉건주의 완고한 세력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청 정부의 세도가와 권문세가, 수구 관료들은 신정의 조치에 대해 면종복배하며 구실을 찾아 항명했다. 자희태후는 광서제가 변법을 선포한 다섯째 날부터 광서제를 핍박해 인사 임면권과 경진(京津)지역 군정 대권을 장악하면서 정변을 준비했다.

 

1898년 9월 21일 새벽, 자희태후는 갑자기 이화원(頤和園)에서 자금성(紫禁城)으로 돌아가 직접 광서제의 침궁으로 들어선 후 광서제를 중남해(中南海) 영대(瀛臺)에 유폐시키고 ‘청정(聽政)’한다는 조서를 반포 후 재차 수렴청정 한다.

 

무술정변 후 자희태후는 도망친 강유위, 양계초(梁啓超)를 체포하라 명한다. 담사동(譚嗣同), 양심수(楊深秀), 임욱(林旭), 양예(梁銳), 유광제(劉光第), 강광인(康廣仁), 서치정(徐致靖), 장음환(張蔭桓) 등을 체포한다.

 

9월 28일 북경 채시구(菜市口)에서 담사동 등 6명을 참한다. 서치정은 평생 감금에 처하고 장음환을 위구르 변방으로 보냈다. 신정 조치는 7월 개설한 경사대학당 이외는 모두 폐지해 버렸다. 6월 11일부터 9월 21일까지 103일 진행된 변법유신은 무술정변으로 실패를 고했다.

 

정변 과정 중 강유위는 이화원을 포위하고 자희태후를 구금 혹은 주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강유위 본인은 이화원을 포위하고 자희태후를 체포할 계획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상섭정왕서上攝政王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술(戊戌) 봄여름 사이 선제께서 중국이 쇠약해지고 강한 이웃국가들이 침해하고 능욕하는 것에 발분해 의연히 유신변법으로 천하를 바꾸려 하셨다. ……역신 원세개가 까닭 없이 이화원을 포위한다는 말을 만들어 냈다. 몰래 이간질해 양궁(兩宮, 태후와 황제) 사이에 간극을 만들었다. 이후 사변이 일어나 이제까지…….” 여기에서 강유위는 원세개가 유신 인사들이 이화원을 포위할 것을 도모하고 있다는 정보를 날조했고 청 조정이 그 허위 사실을 들은 후 사변을 일으켰다고 명백하게 기술하고 있다.

 

김양(金梁)이 “병사들로 이화원을 포위”하려 했던 사실에 대해 강유위를 만나 물은 적이 있다. 강유위는 발끈하며 “어찌 그런 일을 도모할 수 있겠나? 나는 예부터 효로 천하를 다스리려 했는데 누가 감히 망언을 자행해? 이 모든 것이 영록(榮祿), 원세개 등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는 무리들이 위기를 핑계로 권세를 탐하려 했던 것일 뿐이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자료들은 강유위 등이 이화원을 포위하고 자희태후를 구금하거나 체포하려 했었다는 일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무술정변 때 청 조정은 강유위를 “이화원을 도모하고 황태후를 체포하려” 했다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체포령을 내렸다. 원세개는 『무술일기』에서 유신 지사 담사동이 정변 발동 전 심야에 원세개를 방문해 병사들을 보내 이화원을 포위할 것을 요청했다고 했다.

 

그리고 “늙은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와 같은 말도 했고. 양계초는 『무술정변기』에 담사동이 밤에 원세개를 방문했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담사동이 그런 계획이 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강유위 등 유신파 인물들이 원세개의 군사의 힘을 이용해 자희태후를 영수로 하는 완고한 수구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강유위의 비밀스런 친우 왕조(王照)가 일본으로 망명한 후 이누카이 쓰요시(견양의, 犬養毅)와 필담을 나누는 중 “자희태후를 포위해 구금하려고 도모했던 일은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이요. 남해(南海, 강유위)가 군대를 이용해 정권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말하자 나는 재삼 면박을 주었소.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안면을 바꾸더군요. 그러나 쟁우(諍友)는 결코 누설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을 거요”라고 했다고 한다. 강유위는 또 왕조가 섭사성(聶士成)에게 군대를 이끌고 광서제를 보호해줄 것을 설득하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담사동의 친한 친구인 호남(湖南) 회당 영수 필영년(畢永年)이 쓴 일기 『궤모직기詭謀直記』에 강유위가 확실히 “이화원을 포위하여 태후를 체포”할 음모를 꾸몄다고 실증하고 있다.

 

필영년의 일기에는 강유위가 필영년을 자기의 집에 소집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때 “그대는 지금의 위급함을 알고 있지요? 태후는 9월 천진에서 열병할 때 황상을 시해하려고 합니다. 장차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나는 당대(唐代)의 장간지(張柬之)가 무후(武后)를 폐한 거사를 본받으려 하오. 그런데 천자에게는 병사가 하나도 없으니 정말 거사하기 힘드오”라고 했다.

 

또 “나는 이미 황상에서 상소를 올려 원세개를 끌어들이기를 청했소. 나는 그대가 원세개의 참모가 돼 그를 감독하게 할 터인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했다.

 

필영년은 원세개가 딴 마음을 먹으면 자신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자 강유위는 또 “백 명을 그대에게 붙여주면 되겠소? 원세개가 병사들을 이끌고 이화원을 포위할 때 그대가 백 명을 이끌고 들어가 서태후를 붙잡아 폐위시키면 될 것이오”라고 했다.

 

나중에 또 어떤 사람이 필영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계초가 내게 강유위의 뜻을 말했소. 황상에게는 폐위시킨다고만 말하고 이화원으로 들어가 주살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말이오. 필영년 당신은 이 일을 할지 아직은 모르지만 말이오.”

 

다른 자료를 보면 강유위는 원세개가 이화원을 포위할 때 사람을 보내 자희태후를 척살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영국 전교사 티모시 리처드(Timothy Richard)는 강유위가 광서제를 대신해 초빙한 신정 고문이다.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은 각각 광서제를 보호할 방법을 상의했다. 때문에 리처드는 유신파의 계획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아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는 『유화사십오년기留華四十五年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자희태후는) 가을에 천진에서 열병을 할 것이라 조령을 내렸다. 자희는 황제가 열병한다는 핑계를 잡고 모든 권력을 찬탈할 것을 염려해 그를 곁에 두었다. 유신당은 먼저 손을 써야한다고 권했다. 그녀를 이화원에 감금해야만 반대파를 제지하고 유신의 모든 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황제는 그들의 의견에 따라 영록의 부하 장수 원세개를 조견하고 그의 지원 아래 군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들어가 자희가 머무는 궁전을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유신당들은 모두 반동파들의 저지를 끝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자희를 유폐시키는 것임을 동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유위는 죽을 때까지 비밀리에 이화원을 포위하고 황태후를 체포나 구금하려 도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술정변 이후 강유위와 양계초 이외에 그 음모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없으니 그 역사의 의문은 여전히 안개 속에 갇혀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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