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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83)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원세개(袁世凱, 1859~1916), 자는 위정(慰亭), 하남(河南) 항성(項城) 사람으로 북양(北洋) 군벌의 수령이다. 일찍이 주조선(駐朝鮮)통상대신을 역임했고 나중에 천진(天津)에서 ‘신건(新建) 육군’을 훈련했다.

 

1898년 무술변법 때 유신파를 배반하고 자희(慈禧)태후의 신임을 받았다. 1911년 신해혁명 때 내각총리대신이었던 그는 출병해 혁명당과 협상하면서 한 편으로는 손중산(孫中山)에게 양위하도록 위협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청제(淸帝)를 퇴위토록 핍박해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자리를 빼앗았다.

 

1915년 12월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1916년 3월 22일 황제 제도를 취소할 것을 강요당하다 그해 6월 중국 민중의 성토아래 두려움에 떨며 죽었다.

 

중국 근대사에 있어 유명한 유신(維新)운동은 무술정변(戊戌政變)으로 종결된다. 그 사변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됐는가? 1898년 9월 21일 새벽, 자희태후는 이화원(頤和園)에서 서직문(西直門)을 통해 광서(光緖)황제가 거주하는 대내양심전(大內養心殿)으로 들어서서는 모든 문건을 가지고 간다.

 

그녀는 광서제를 “내가 너를 20여 년 무육했건만 네가 소인들의 말을 듣고 나를 모해하려 하느냐?”라며 질책했다. 광서제는 질겁해 아무 말도 못하다가 한참 후에서야 입을 뗐다. “저는 그럴 뜻이 없었습니다.” 자희는 경멸하듯이 “어리석은 녀석, 지금의 내가 없다면 내일에 어찌 네가 있을 수 있더란 말이더냐?”라고 내뱉었다.

 

자희는 그 자리에서 황제가 병이 나 일을 처리할 수 없으니 그녀가 “조정에 나가 정무를 보겠다”고 명을 내린다. 그때부터 젊은 광서제는 사면이 물로 막힌 남해(南海) 영대(瀛臺) 함원전(涵元殿), 외로운 섬에서 그의 마지막 9년의 생애를 보낸다. 그곳에서 자희태후가 보낸 태감의 감시를 받고. “그가 혁신하려 했던 일들은 모두 뒤엎여 졌다.”

 

 

이 정변이 발생한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이 궁정 정변의 내막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변의 실제 상황은 당사자들조차 여러 가지 고려하는 점이 많아 자세한 상황을 기술하지 못하고 있다. 그 정변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변이 발발한 그해 8월 3일(9월 18일), 담사동(譚嗣同)은 한밤중에 원세개를 찾아가 근왕의 병력을 동원하라고 권한다. 원세개는 거짓으로 담사동이 제시한 이화원을 포위해 황태후를 납치하고 직예총독 영록(榮祿)을 주살하는 등의 일을 진행하겠다고 대답했다.

 

8월 5일 원세개는 천진으로 돌아간 후 곧바로 영록에게 밀고했다. 영록은 당일 밤 경도로 들어가 자희태후에게 그 상황을 보고했다. 8월 6일 자희는 이화원에서 회궁해 정변을 발동했다. 비행간(費行簡)이 편찬한 『자희전신록慈禧傳信錄』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8월 5일, 원세개는 천진에서 영록에게 밀고하자 “영록은 급박하다고 생각하고 원세개에게 천진을 지키도록 당부한 후 고변하기 위해 미복차림으로 기차를 타고 입경해 이화원으로 달려갔다.

 

영록이 이화원의 문을 두드렸으나 한밤중이라 문지기는 들이지 않았다. 나중에 시위가 나와 영록임을 알고 들여보냈다. 후궁에 다다라 문을 두드리며 내시를 부르자 화재가 난 줄 알고 모든 내시들이 황급히 일어났다.

 

잠시 후 밖으로 나와 미복차림의 영록을 보고 이상히 여겨 어찌된 일이냐 물으니 영록은 급한 일이 있어 반드시 태후를 뵈어야 한다고 했다. 그때 태후는 침실에 있었다.

 

보고들 듣고 영록을 내실로 들라하고는 돌연히 ‘강유위(康有爲) 등이 어찌 변란을 도모한다는 말이냐?’고 물었다. 영록은 태후에게 원세개가 밀고한 내용을 상세히 전하자 어린 자식까지 정을 저버리게 했다며 태후는 진노했다. 환궁하도록 명하고 영록에게 도성을 지키는 군대로 가서 변란을 방비하라는 유조를 전하라 했다”고 했다.

 

역사서 기록을 보면 자희태후가 황궁으로 돌아갔을 때 광서제는 이화원으로 가 그녀에게 문안 인사를 드릴 차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광서제가 영접하면서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자신이 파출(罷黜)된 것은 당연했고.

 

이외에 외국인들도 원세개가 밀고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8월 14일(9월 29일) 청 조정은 ‘강유위 및 그 도당들’이 이화원을 도모했다는 죄상을 공포했다. 당일 천진 주재 일본영사는 일본외상에게 전보를 보냈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중국 황제가 갑자기 하야당하고 강유위 도당들이 처벌됐다고 합니다. 황제가 9월 19일(음력 8월 4일) 원세개를 접견할 때 비밀리에 소참(小站)에서 4000명의 병사들을 황궁으로 파견해 황제의 금위군을 맡도록 명령했습니다. 원세개가 소참으로 돌아간 이튿날 태후의 도당인 직예총독에게 밀고하자 직예총독은 즉시 전보로 자희태후에게 고변했고 태후는 곧바로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대만 『대륙잡지』38권 9기)

 

영국 상인들이 발간한 『신보申報』에 “먼저, 이달 초4일 후보시랑 원세개가 북경에서 폐하를 알현할 때 강유위 등이 천하의 창성을 위해 신건 육군 3000인을 입경시켜 이화원을 포위하라 상주했다. 다행히도 황상께서 천성이 총명하심이 의심의 여지가 없기에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고 했다. 원세개는 그 말을 듣고 5일 북경을 벗어나 영록에게 밀고하자 황태후에게 전보를 보내 동요하지 마시라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 대해 전혀 근거 없는 말이라 일축하는 사람도 있다. 먼저 자희태후는 8월 초4일에 이미 이화원에서 회궁해 중남해(中南海)에 머물고 있었다. 그렇다면 8월 초5일에 영록이 야밤중에 이화원으로 달려가 고변했다는 말은 전혀 근거 없게 된다.

 

둘째, 당사자인 원세개는 자신이 밀고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원세개 『무술일기戊戌日記』에 그가 8월 초5일에 천진으로 돌아가 진예총독 영록을 알현하고 “내정에 대해 간단히 알리고 황상이 지극히 효성스러우니 다른 뜻이 결코 없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여러 무리들이 결당해 선동을 부리며 종사를 위협하고 있으니 실은 그 죄가 내게 있다.” 그래서 “반드시 황상을 보위해야 한다”고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섭조와(葉祖洼) 등이 동석하고 있어 자세한 상황은 이튿날 상의하자고 약속했다. 다음날 일찍 원세개는 상세한 상황을 영록에게 알렸다. 영록은 대단히 억울하다며 “나 영록이 황상을 범할 마음이 추호라도 있다면 하늘이 날 벌하실 것이다!”라고 했다.

 

원세개는 “이 일은 황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황상에게 해가 미친다면 저는 그저 약을 먹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했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상의했지만 타당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날 저녁, 그들은 수렴청정 한다는 전보를 받았다. 정변은 “이미 안에서 먼저 일어났다”고 했다. 이 기록은 정변이 원세개가 밀고한 사실이 자희태후에게 보고되기 이전에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과거에는 원세개 일기의 기록을 믿는 사람들이 적었다. 일기는 정변 발생 후 8일째가 되는 날로 사후의 기록이며 1926년에야 『신보』에 발표됐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원세개가 “나라를 도둑질한 놈”이라 욕먹고 죽은 후 10년이 된 때였다. 그런 원세개의 말을 누가 믿으려고 할 것인가?

 

그러나 사람에게 결점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말까지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 아니라면, 그 기록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원세개의 말을 지지하고 있다.

 

소계조(蘇繼祖)의 『청정무술조변기淸廷戊戌朝變記』, 정문강(丁文江)과 조풍전(趙豊田)의 『양임공梁任公선생년보장편』과 대만 학자 황창건(黃彰健)의 「무술정변의 발발은 원세개의 밀고에 의한 것이 아님을 논하다」등이 그것이다.

 

셋째, 8월 초6일 반포한 청정 조서 중에는 담사동을 체포하라는 명령 없이 그저 강유위와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던 강광인(康廣仁) 형제를 체포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뿐이었다.

 

청 조정이 원세개의 밀고를 전해 들었다면 분명 ‘난을 꾸민 주범’ 담사동을 체포해야만 했다. 담사동이 원세개에게 “태후를 금고하고 영록을 주살해야”한다고 책동했던 주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정변의 발생이 원세개의 밀고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넷째, 외국인의 기록은 그렇게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예를 들어 글을 쓰면서 처음에 그해 9월 29일 천진 주재 일본영사가 외무상에게 전보를 쳤다는 내용(앞에서 인용한 부분)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 자료에 의하면 원세개가 밀고한 후 영록은 자희태후에게 달려가 고변하지 않고 전보로 보고한 게 된다. 이것은 사실 외국인이 자신들의 습관을 근거로 한 추측일 따름이다.

 

당시 청 조정의 실제 상황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당시 자희태후에게는 전용 전보 라인이 없었다. 왕래하는 전보는 ‘경국(京局)’을 경유해야 했다. 영록이 만약 전보를 쳤다면 광서제에게 누설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렇다면 영록은 전보로 태후에게 보고할 수 없었다. 당시 사람들의 필기나 신문 기록을 보면 무술정변 이전에 자희태후와 영록 사이에는 대신과 종실이 왕래하는 편지로 소식을 전달했었다.

 

이처럼 무술정변이 ‘밀고’에 의해 발발했다는 관점은 아직까지도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 원세개가 비록 나쁜 일을 많이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모든 죄를 그 한 사람에 뒤집어씌우는 것은 옳지 않다. 죄과를 논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

 

국가의 혼란을 잠재우고 번영을 구가하게 만든 것을 하나의 ‘영웅’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가능했다는 ‘영웅주의’는 벗어나야 할 역사관이다. 반대로 한 명의 ‘역적’을 만들어 나라 혼란의 모든 죄를 전가하는 것은 동양의 병폐인 ‘영웅주의’의 또 다른 방면의 투영일 터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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