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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8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광서(光緖, 1871~1908), 이름은 재첨(載湉), 순(醇)친왕 혁현(奕譞)의 아들이다. 동치(同治)13년(1874), 동치제가 죽고 후사가 없자 황위를 승계했다. 즉위 후 동서(東西) 궁 황태후가 수렴청정하다 광서 13년에 친정하기 시작했다.

 

친정하기는 했으나 조정 실권은 여전히 자희(慈禧)태후가 장악하고 있었다. 광서 14년 강유위(康有爲) 등을 처음 중용해 언로를 넓히고 과거제를 개혁했으며 구신(舊臣)들을 폐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 6일 자희태후가 태도를 바꿔 광서를 영대(瀛臺)에 구금하니 ‘변법(變法)’은 실패했다. 광서34년 10월, 함원전(涵元殿)에서 병으로 죽었다.

 

1908년 10월 21일 유시(酉時), 광서황제가 북경 중남해(中南海)의 영대(瀛臺) 함원전에서 죽는다. 이튿날, 자희태후도 북경 고궁(故宮) 의란전(儀鸞殿)에서 병으로 죽었다. 광서제의 죽음과 자희태후의 죽음, 거의 연속해서 발생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20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참으로 너무나 기이하다. 이해하기 힘들다!

 

광서제의 죽음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광서제가 죽기 이전에 약간의 병을 앓은 것은 사실이다. 광서제는 어린 시절부터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 허약했고 병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질환은 광서34년 초에 생겼다. 이후 줄곧 몸이 좋지 않다고 느꼈다. 황궁 태의의 진단에 따르면 그 증상이 음양이 둘 다 손실됐고 지엽적인 것과 근본적인 것 모두 병이 들어 가슴이 팽창하고 위가 전도 됐으며 허리와 사타구니가 시큰시큰 쑤시고 아프니 음식을 줄여 저리고 열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정신이 피곤하니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현대 병리의학 분석에 따르면 호흡기관 질병과 비슷했다. 상술한 진단을 보면 환자는 이미 열이 나고 기침을 하며 수면과 식사의 균형을 잃어 건강이 상당히 쇠약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 생명이 위험한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돌연히 사망에 이르지도 않는 병이었다.

 

게다가 환자가 죽은 당일 교지를 내리기도 했다. 내용은 : 각 성의 총독, 순무에게 교지를 내리노니 각 분할 지역 내에서 관품이 있는 자나 일반백성 할 것 없이 의술에 정통한 사람을 선발해 신속히 북경으로 보내 황제의 병을 치료케 하라.

 

이 내용을 보면 광서제 본인도 자기의 병은 치료할 수 없어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죽을 때가 가까운 사람은, 특히 임종할 즈음에 이른 사람은 어떤 예감이 생긴다고 하지 않던가.

 

더 의미심장한 일은 광서제가 죽은 당일 자희태후의 침궁 의란전에서 부의(溥儀)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섭정왕 재풍(載灃)을 감국(監國)으로 삼는다는 태후의 유지가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선을 조금만 더 앞으로 옮겨보면 부의는 광서제 임종 하루 전, 즉 10월 20일 순친왕부에 의해 궁으로 데려왔음을 알 수 있다. 유지는 황제의 명의로 반포됐지만 그 내용은 자희태후의 뜻을 전달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희태후는 이미 광서제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녀는 이미 광서제가 죽은 후의 일을 준비하고 있었단 말인가? 이런 일들은 광서제의 죽음을 더더욱 이상하다 느끼게 만들었다. 정사(正史)에서는 이 일에 대해 꼭꼭 숨기고 누설하지 않으니 민간에서는 여러 판본의 추측들이 생겨났다.

 

야사(野史) 판본의 하나 : 자희태후는 자기의 병이 이미 치료할 수 있는 단계가 지났다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측근 태감에게 명령해 광서제를 목 졸라 죽였다. 그녀가 죽은 후 광서제가 다시 대권을 잡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야사 판본 중 둘 : 광서제는 태후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희색이 만연했다. 자희태후는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이를 악 물고 “난 네 놈보다 먼저 죽을 수는 없다”고 했다.

 

청말(淸末) 명의 굴계정(屈桂庭)은 그가 쓴 『진치광서황제비기(診治光緖皇帝秘記)』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광서제 임종 3일 전,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그는 내게 배가 참을 수 없이 아프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뺨이 어두워졌고 혀는 누러면서도 검었다. 이는 그가 앓고 있던 병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증상이 아니었다.

 

『영대읍혈기(瀛臺泣血記)』에서는 이련영(李蓮英)이 광서제를 해쳤다고 돼 있다. 궁의 대태감 이련영은 태후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보고 자기의 후견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자 조급해졌다.

 

그는 광서제가 권력을 잡은 후 자신을 끝장낼 것이 분명하니 먼저 손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며칠을 고려한 끝에 독살을 결심했다.

 

 

말대(末代)황제 부의는 나중에 그의 자서전 『나의 전반생』에서 광서제가 피살됐다는 관점에 대해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또 이장안(李長安)이라는 노태감이 광서제의 죽음에 대한 의문스런 사항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광서제가 죽기 하루 전에도 생생하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약제를 복용하고서는 악화됐다는 것이다.

 

나중에서야 그 약제가 원세개(袁世凱)가 보낸 것임을 알게 됐다. ……내무부 모 대신의 후손이 내게 말하기를 광서제가 죽기 전에 처방전들을 본적이 있는데 일반적인 감기에 불과했다고 했다.

 

맥박도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그 전날 광서제를 본 사람이 있는데 완쾌된 사람처럼 보였다고 했다. ……병이 악화됐다는 소식이 전해진지 2시간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시 ‘붕어(崩御)’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결국 민간에서는 방법은 다르지만 모두 ‘피살설’에 동의하고 있다. 마수를 뻗친 사람이 광서제 생전의 숙적이라거나 자희태후, 태감 이련영이라거나 원세개라 하는 것만 다를 뿐이다. 그들 모두 자희태후가 죽은 후 광서제가 황제가 돼 다시 권력을 잡는 것이 두려웠던 인물들이다.

 

광서제는 자희태후에 의해 피살됐다는 소문이 가장 광범위하게 퍼졌지만 추측하는 단계에 불과했고 충분한 증거를 대지 못했다. 그러나 자희와 광서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는 조야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복잡한 은원과 갈등 관계 속에 광서제의 죽음에 대한 실마리가 숨겨져 있다.

 

광서제 17세 이전, 그와 자희태후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동치(同治)황제가 죽은 후 자희는 계속 수렴청정하기 위해 대신들의 의견을 배척하고 자기 누이동생의 아들인 광서제를 황위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여전히 황태후라는 신분으로 권력을 농단했다. 광서제는 4세 때 궁으로 들어갔다. 성인이 될 때까지, 즉 18세 때 결혼을 하고 친정을 할 때까지 10여 세월 동안 자희는 심혈을 기울여 전심전력으로 광서제를 양육했다.

 

만약에 자희태후가 처음 광서제를 황제 자리에 앉힐 때 정치적인 고려에 의한 것일 뿐 그 생질과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궁에서 10여 년 조석으로 만나면서 상황이 백팔십도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한 번은 자희태후가 다른 사람에게 광서제의 어린 시절을 얘기하며 감정어린 말로 둘 사이에 친자와 같은 정이 있음을 토로했다.

 

“황상(광서제)은 원래 내 생질로 대통을 이으려 들어왔어. 외가 쪽으로 말하자면 내 친여동생의 아들이지.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황제가 안겨서 입궁할 때 겨우 4세였지.

 

아직 연약할 때였어. 배꼽에서 물이 흘러 잘 마르지도 않았어. 내가 매일 친히 그를 씻기고 닦고 했거든. 저녁이면 나와 같은 침상에서 자기도 했고. 사계절 춥고 덥고, 날씨 변화가 무쌍하잖아. 난 그를 위해 조심스레 옷도 준비하고 음식도 조절해 줬어.

 

황제가 왕부에 거주하던 유년기에는 작은 소리에도 무척 놀라곤 했지. 그래서 내가 늘 궁에 함께 있으면서 어르기도 하고 같이 놀기도 하고. 난 매일 종이에다 글자를 쓰고는 황제에게 가르치기고 했어. 공부를 가르치면서 사서와 시경을 낭송해주기도 했지.”

 

비록 자신을 미화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의심을 떨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녀가 광서제를 교육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은 반영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광서제 17세 이후 두 사람 사이의 틈이 점점 커져 갔다. 자희태후는 표면상 ‘은퇴’해 정사를 보지 않고 황제에게 넘겨준다고 선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권과 관원 임면권을 여전히 틀어쥐고 있었다.

 

이 두 가지 핵심 권력이 없는 광서제는 허수아비 황제일 따름이었다. 광서제는 변법을 통해 권력을 되찾아 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중남해 영대에 연금돼 버렸다. 그때부터 광서제는 활동의 자유를 잃고 정신적으로 참을 수 없는 억압과 학대를 견뎌내야 했다.

 

영대에서의 삶은 처량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광서제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미래에 대해 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든 자희태후는 광서제보다 30여 살이 많지 않던가. 광서제가 중년의 나이가 되면 자희는 이미 70이 넘는 노인이 되지 않겠는가.

 

일찍이 자희태후와 조석으로 같이 했던 유덕령(裕德齡)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광서 30년, 곧 자희태후 70세 이후부터 그녀의 건강과 정신 상태는 확실히 이전보다 못했다.

 

태후는 광서제를 더 이상 감시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음식을 넣어주는 것 이외에 정사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매일 그저 궁에서 약을 복용하기만 했다.

 

광서제는 금궁(禁宮)에 연금됐으나 국가대사, 심지어 세계적으로 중요한 국가에서 발생한 사실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태후가 죽은 후 자신이 권력을 잡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일에 도서와 시서를 연구하는 것 이외에 매일 아침 조회를 이용해 형세의 변화를 읽고 있었다.

 

유덕령은 『청궁이년기(淸宮二年記)』에서 “매일 아침 황제를 만났다. 내가 여가가 있을 때 황제는 꼭 영어를 물었다. 알고 있는 게 많았다. 나는 황제를 만나는 게 무척 재미있었다. 태후 면전에서는 면모를 정숙하게 했다. 어떤 때는 바보스럽기조차 했다. 벗어났을 때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서제는 유덕령에게 영어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서양 여러 나라의 풍습과 인심, 정치제도, 국가 간 상호 관계 등의 문제를 끊임없이 묻고 이해하려 했다.

 

광서28년에서 29년 사이, 자희태후 화상을 전문적으로 그렸던 칼(Karl)이라는 이름의 미국 여성이 있었다. 그녀가 외출 후 그녀의 궁전 화실로 돌아갔을 때 탁자 위에 놓여있던 몇 장의 공연 팸플릿에 빨간 색으로 그려진 도선이 첨가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칼은 광서제의 필적이라 단정했다.

 

전날 자신이 외출했을 때 황제가 그곳에 와서 머물렀음이 분명했다. 황제가 그린 그림을 자세히 보니 일본과 제정러시아가 중국 동북에서 교전한 지도였다. 칼 여사는 감격했다.

 

광서제는 시국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광서제가 칼의 화실에서 조회에서 들은 소식을 분석하고 연구했던 것이었다. 조정 정무에는 발언권이 없었지만 그런 방면에 대해 시종 연구하고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

 

광서34년 초 황제가 감기에 걸렸다. 그런데 광서제 본인을 포함해 그 병 때문에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청대 궁전의 남겨진 기록을 보면 광서제의 병세가 가볍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감기가 지병을 재발하게 만들었다. 광서제는 노병(癆病)을 앓고 있었다. 현재 의학에서 말하는 폐결핵이다. 좋아졌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심한 감기는 치료됐다 싶었지만 폐결핵을 재발하게 만들었다.

 

광서제는 어릴 적부터 허약했다. 어렸을 때 자주 병을 앓았다. 청소년 시기에도 체력이 별로였다. 오랫동안 요통을 앓았고 한밤중에 몽정해 수면부족에 시달렸고 쉽게 피곤해 했다. 중의(中醫)의 시각에서 말하면 ‘신허腎虛(혹 신휴腎虧)’로 정도가 좀 심했다.

 

광서제의 건강이 왜 그렇게 허약했을까? 일반적으로 볼 때 광서제는 어릴 적부터 황부에서 자랐고 나중에 황궁에서 생활했으니 물질생활이나 의료위생은 당시 중국 일류의 수준으로, 다른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건강은 좋았어야 한다. 나중에는 어떻게 됐든 처음에는 분명 건강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왜 그리도 건강이 좋지 않았을까? 어쩌면 엉망인 정신 상태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광서제는 4세 때 입궁한 후 자희태후의 전문적인 관리를 받기 시작했다. 당연히 정신적으로 긴장했을 것이고 억압받은 상태에 놓여있었을 것이다.

 

성장 후 친정했으나 내우외환이 겹쳤다. 태후가 모든 것을 간섭하면서 마음이 편안치 않았음이 분명하다. 무술변법이 실패하고 영대에 유폐됐으니 그가 받은 정신적인 고통과 충격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진비(珍妃)(광서제의 비로 타타라(他他拉) 씨다. 예부시랑 장서(長敍)의 딸로 근비(瑾妃)의 동생이다. 광서14년(1888) 언니와 함께 입궁해 진빈(珍嬪)이 되고 20년(1894)에 자희(慈禧)태후의 눈 밖에 나 귀인으로 강등됐다가 다음 해 다시 진비가 됐다. 변법을 지지했고 정치에 간여하기 좋아했다. 무술변법 이후 유폐됐다. 경자년(庚子年, 1900) 자희태후가 경사(京師)를 떠날 때 환관 최옥귀(崔玉貴)에게 명해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의 비참한 죽음은 그를 더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정신적 부담을 느꼈으니 건강을 잃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황제의 건강이 허약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현상을 보면 그때의 병세가 광서제를 급사하게 만들 만한 것은 아니었다. 광서제의 의식은 정상이었고 병 치료에 자신도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보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광서제의 모든 치료 과정은 자희태후가 좌우했다. 당시 조정은 혁광(奕劻)에게 황제의 병 치료에 관한 사항을 주제하도록 명했다. 황제를 진찰하고 치료하는 의사는 반드시 혁광을 거쳐야 했다.

 

그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의사를 추천할 수 없었다. 태의원의 의사도 영대의 광서제 침궁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의사가 내린 처방전도 반드시 혁광의 심사를 거쳐야 했다.

 

혁광은 자희태후의 최측근이었다. 생각해보자.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목적을 가지고 ‘진단서’를 위조하거나 사실과 다른 ‘진단’을 내리는 것은 여반장이지 않았겠는가.

 

이외에 깊이 생각해 봐야할 일이 하나있다. 광서34년 10월 20일, 청 조정은 황제의 명의로 전국에 두 가지 유지(諭旨)를 반포한다. 하나는 순(醇)친왕 재풍(載灃)의 아들 부의(傅儀)를 황궁 내에서 교육을 받게 하고 상서방(上書房)에서 공부하도록 명한다.

 

두 번째는 재풍을 섭정왕으로 명한다. 무엇을 뜻하는가? 이 유지의 본질은 황위를 계승하는 인물을 제정했다는 의미다. 유지가 반포된 날은 바로 광서제가 죽기 바로 전날이다. 그리고 자희태후가 죽기 이틀 전이고.

 

유지가 반포될 때 자희태후의 병세는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였다. 그녀의 목숨은 이미 고비를 맞고 있었다. 그리고 자희 본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희태후가 그렇게 총망하게 후사를 안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광서제가 죽지 않는다면 계승자의 합법성이 어찌 보장될 것이며 천하가 믿고 따르겠는가. 광서제가 죽지 않는다면 자신이 죽은 후 황제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은 뻔하지 않던가. “땅에 묻혀 평안을 얻는” 일도 실현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보다 광서제가 먼저 죽는 것을 봐야만 안심하고 세상을 뜰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광서제는 질병 때문에 자연사했을까? 아니면 자희태후가 마지막까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광서제를 죽음으로 몰아갔는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일까?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현안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광서제가 죽자 여진족이 호령하던 중국 천하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 서태후, 그녀는 과연 조상들을 어떤 얼굴로 대면했을까? 천하를 호령하던 만주족, 그들은 언어와 문화를 거의 잃어버린 소수민족으로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역사의 흐름인가, 개인의 권력욕에 의한 결과인가? 역사는 그렇게 흐르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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