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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여인천하? 서태후(西太后)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8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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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13  0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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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서(西)태후’라 부르는 자희(慈禧)태후(1835-1908)는 예허나라(Yehenala,엽혁나랍葉赫那拉) 씨로 청나라 만주 정황기(正黃旗) 사람이다. 안휘(安徽) 영지광대도(寧池廣大道) 혜징(惠徵)의 딸이다.

함풍(咸豊)원년(1851)에 입궁해 의귀인(懿貴人)에 봉해지고 6년 아들 재순(載淳, 동치제(同治帝))을 낳으니 의귀비(懿貴妃)가 됐다.

함풍제가 죽고 아들 재순이 여섯 살 나이로 즉위하자 공(恭)친왕과 공모해 쿠데타로 숙순(肅順) 등을 주살하고 반대파를 일소한 후 모후로서 동태후(東太后, 자안태후慈安太后, 니오후루鈕祜祿 씨)와 함께 섭정했다.

광서(光緖) 원년(1875) 동치제가 죽자 누이동생의 세 살짜리 아들을 옹립해 광서제(光緖帝)로 즉위시키고 섭정했다.

광서(光緖)26년(1898) 광서제가 친정한 후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추진하자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켜 좌절시키고 광서제를 궁에 구금시켰다. 퇴보적 정책을 펼쳐 청 왕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 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광서제가 죽은(광서21년) 이튿날 죽었다.

여러 문학작품 속이나 영화, 드라마 작품 중 자희태후는 흉악하고 잔인하며 완고한 보수파로 그려진다. 그녀가 무술정변을 일으키고 백일유신을 말살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신법(新法)을 폐지했지만 여러 상황들은 그녀가 개혁에 대해 반대하지 않고 대대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개혁의 성공여부는 실권을 쥐고 있던 자희태후가 과연 개역을 지지했는가 아니면 개혁을 반대했는가에 달려 있었다. 자희태후는 어떤 자세를 견지했는가? 이 또한 의론이 분분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동치 연간에 그녀는 공친왕이 양무(洋務)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지지했다. 나중에 그녀의 동의아래 증국번(曾國藩)과 이홍장(李鴻章)이 주관하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무술변법이 실행되는 가운데서도 양무운동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무술변법도 그녀의 동의가 없었다면 광서황제의 담력과 식견으로는 분위기를 형성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많은 역사기록들이 남아있다.

당시의 대신은 “우리는 태후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황상이 전력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지, 천하가 부강하고 백성이 부유해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변법을 실행함에 있어 변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녀의 마음에 달렸을 뿐입니다. 어떤 다른 관점도 필요치 않습니다”라고 단적으로 표현했다.

다른 사료에는 “광서제의 무술정변의 원인에 대해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다. 사실 태후는 결코 신법의 뜻을 적대시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돼 있다.

다른 사료에는 자희태후가 광서제에게 변법은 그녀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 온 소망이라고 늘 말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치 초년, 그녀는 증국번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국 학생들을 서양으로 파견해 유학케 하고 선박을 건조하고 기계를 제작하도록 했다. 이것들은 부강을 도모하고 국위를 떨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변화에 맞춰 움직여야 했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다.

단지 대청제국의 의복을 일본인처럼 완전히 고쳐버리고 초하루와 15일에 조상에게 제배를 올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결코 실행할 수 없다는 뜻은 굽히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자희태후의 이른바 “조상들의 법은 변할 수 없다”는 신념이다. 하지만 이 또한 변법을 하더라도 최소한 조상들에게는 체면을 세워줘야 한다는 말일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제시한 ‘개혁의 한도’다. 백일유신 이전에 광서황제가 이화원(頤和園)으로 자희를 만나러 갔을 때 자희는 광서제에게 “조상의 큰 법을 위배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변법을 시행하도록 윤허했다. 이것은 정치개혁에 대한 중대한 허락이다.

자희태후는 변법을 지지하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무술변법의 직접적인 발생 원인은 중일 갑오전쟁(甲午戰爭)의 패배와 나중의 토지 할양 및 배상에 있었다. 이 일에 대해 광서제만 커다란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자희태후는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고 태평할 수 있었겠는가?

대청제국은 광서제의 강산이고 자희태후의 강산은 아니란 말인가? 신정을 실행해 중국을 부강 시킬 수 있고 그녀의 강산이 더욱 안정될 수만 있다면 자희태후가 어찌 신정을 배척할 것인가?

갑오전쟁 후 중국은 열강들이 분할하는 위기에 당면해 있었다. 황권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위협이 눈앞에 닥치면서 자희와 열강 간의 갈등이 첨예화 됐다. 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강산의 위기를 모르쇠로 일관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비록 ‘이선’으로 물러섰지만 실제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황위에 앉아 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는 ‘자강(自强)’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그녀가 성선회(盛宣懷)를 조견할 때 성선회가 “현재 이런 시대에서는 진정성 있는 열강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자강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황태후께서도 자강하는 쪽으로 계획을 잡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자희태후는 “그대 말이 극히 옳소. 반드시 자강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외국이 나를 너무 얕잡아보고 있으니 나는 무척 조급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중에 그녀의 시위 여관 덕령(德齡)에게도 “나는 우리 중국이 장래에 강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변법은 자강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래서 변법에 동의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자희태후가 변법을 반대했다는 증거도 확실하게 존재한다. 그녀는 광서제에게 “이 황제의 자리에 앉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변법이 막 시작될 때 인사와 군대의 대권을 자신의 수중에 두고 있지 않았는가?

자, 우리 그녀의 언행을 분석해 보자. 그러면 그녀의 논리는 개혁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반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혁이 막 시작될 때 자희태후는 모든 개혁이 그녀의 머리 위에 화려한 권력의 광배가 얹히기를 충심으로 바랐다. 그래서 개혁을 희망하면서 광서제가 정치개혁을 진행하도록 허락했다.

변법을 말살한 것은 그녀가 개혁을 반대했다는 증거가 아니고 그녀가 권력을 너무 사랑했다는 예증이다.

개혁이 그녀의 권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면 어찌 개혁을 지지하지 않았겠는가? 만약에 개혁이 그녀의 권력을 약화시키거나 소멸시킨다면 그녀는 또 어찌 개혁을 반대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이미 경직돼 있었다. 차디찬 권력의 논리와 비인간적일 정도로 완강한 성격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 개혁은 그저 자기 앞길을 밝힐 도구일 뿐이었다. 권력이야말로 그녀 생존의 근본이었다.

그렇다면 광서제는 개혁이라는 기치를 빌려 그녀의 최고 권위와 지위에 도전하려 했던 것일까? 상황을 보면 그렇다고 얘기할 수 있다.

신법 속의 정치개혁 방안은 강유위(康有爲)가 제창한 것이다. 신법을 추진하려면 반드시 신법을 옹호하는 일련의 인원을 바꿔야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강유위의 생각에 따르면 “서양법을 잘 아는 초망지신(草莽之臣)”이어야 했다. 바꿔 말하면 강유위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강유위의 착상에 따르면 중앙 중추의 ‘제도국(制度局)’아래 12개 분국으로 나누어 원래 가지고 있던 중앙권력기구를 대신하게 함으로써 강유위가 정부의 각급 행정기구를 장악하려는 희망을 실현하려 했다. 그런 명확한 동기를, 개혁 배후의 진정한 의도를 어찌 속일 수 있었겠는가?

『무술이상록戊戌履霜錄』의 작가 호사경(胡思敬)은 “그 숨겨진 의도를 살펴보면 중앙정부의 권력을 빼앗아 모든 권력을 제도국으로 귀속시키고 ; 중앙 6부의 권력 전부를 12분국으로 귀속시키며 ; 지방 독무(督憮) 장군의 권한 모두를 각 지방 민정국으로 귀속시키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천자는 고립되고 전국의 상하는 모두 강유위 당의 사인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던가!”라고 한 마디로 정곡을 찔렀다.

   
 

그런데도 광서제는 찬동했다. 그는 노신들을 제거하려 했다. 그들은 모두 자희태후의 사람들이었고 자신에게는 어떤 충성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신들을 제거한다는데 과연 자희태후가 좋다고 할까? 개혁이 진행되기 시작하자 자희는 그녀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지켜주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개혁하면 할수록 자신의 권력이 약해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지어 황제가 6부를 철폐하고 예부 6당관을 폐지했으며 마지막으로 무슨 군기 사장경(四章京)을 임명했다. 모든 인사이동이 광서제의 권력은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자희태후와 반목하는 것이 아니던가. 정치적 고수였던 자희가 어찌 가만히 무장해제를 당할 수 있었겠는가? 정변을 발동하는 것은 그녀가 가장 잘 하는 것이었다. 또 다시 정변을 일으키는 게 무슨 대수였겠는가?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자희태후의 의도는 명확했다. 개혁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면 그녀는 지지했을 것이다.

개혁이 자신의 이익을 침해한다면? 그녀가 장악하고 있던 권력을 동요시킨다면? 심지어 실권을 잃고 자신이 허수아비가 된다면? 그렇다면 자희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반드시 비장의 카드를 꺼낼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자신에게로 되돌렸을 것이다.

국가의 장래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왕조의 미래가 무슨 대수랴. 권력이 자신에게만 있으면 됐다. ……광서제가 죽고 이튿날 그녀도 세상을 떴다. 그리고 만청 왕조는 무너진다! 대륙을 누볐던 여진족의 천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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