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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회] 조선 최초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목사 ... 목민관과 거리가 먼 삶

조선시대 제주라는 특수성으로 목사들은 병마수군절제사와 방어사, 조선 말기에는 판관까지 겸하여 그 직을 수행하였다. 그중에서도 유별한 삶을 보여주는 이가 홍종우 목사다.

 

방선문과 산방굴사 그리고 용연에 마애명이 있는 홍종우 목사는, 1903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905년 4월에 면직되어 떠났다.

 

조선 최초 프랑스 유학생으로 알려진 홍종우는 일본을 거쳐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박물관 연구보조원으로 근무하면서, 심청전 등 고문서들을 불역하고 일어와 중국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유학 후 일본에 도착한 홍종우는 망명객 김옥균과 박영효를 암살하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동경에 온 이일직으로부터 김옥균 암살 제의를 받았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만나 프랑스 정국을 소개하고, 동양과 세계정세를 논하는 한편 중국행을 유도했다. 1894년 3월 함께 중국으로 건너간 홍종우는 권총으로 김옥균을 사살하고, 그의 시신과 함께 조선에 돌아와 홍문관 교리에 특채되었다.

 

김옥균 암살의 공으로 세도를 누리던 그는, 1898년 황국협회에 가담한 뒤 수구파 정권을 옹호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1898년 말 독립협회가 해체되자 수구파 내각의 의정부 총무국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후 점차 친일 관료 세력들에게 몰리고 결국 제주목사로 오게 되었다.

 

1901년 이재수의 난인 신축민란이 발생한 후, 대한제국과 프랑스 간의 피해배상과 관련하여 양국 간 갈등이 심화되던 1903년, 조정에서는 프랑스와의 외교적인 마찰이 심각하자 홍종우를 제주목사로 임명하여 민란의 사후처리와 프랑스에 대한 배상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1904년 말에 민란의 사후처리가 종결된 데에는 불국통 (佛國通)인 홍종우가 일익을 담당했다고 한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제주를 떠난 홍종우는 행적을 감췄다. 조선후기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 프랑스 그리고 제주를 누비며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목격하고 기울어져가는 조선왕조를 지켜보았을 홍종우 목사.

 

패망해 가는 조선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홍종우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까.

 

그 역시 목민관의 길을 가려 했지만 뜻과 의지를 펴기에는 역량의 모자람을 느꼈을까, 아니면 나라의 무력함과 시국의 허무함을 탓했을까? 구한말의 세계사적 조류에 휩싸인 홍종우는 목민관과는 거리가 있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듯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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