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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7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홍수전(洪秀全.1814~1864), 원명은 인곤(仁坤)이다. 광동(廣東) 화현(花縣)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도광(道光) 23년 배상제회(拜上帝會)를 개창하고 29년 양수청(楊秀淸) 등과 결의형제 맺어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 금전(金田) 봉기 후 나라이름을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 정하고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불렀다.

 

그 후 민중을 거느리고 영안(永安)을 점령하고 계림(桂林)을 지나 장사(長沙)를 포위하고 무한(武漢)을 공략했다. 함풍(咸豊)3년 남경(南京)을 점령해 수도로 정한 후 천경(天京)이라 명명하고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를 반포했다.

 

나중에 여러 왕들과 틈이 생겨 석달개(石達開)는 그를 떠났고 청나라 토벌대가 계속해 공격해 왔다. 동치(同治)3년(1864) 천경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의 아들 홍천귀복(洪天貴福)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1864년 6월 1일 청나라 군대가 맹렬하게 공격해 내려오는 상황 속에서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은 머지않아 함락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태평천국이라는 거대한 성이 무너져 내릴 때 천왕 홍수전은 성내 천왕부에서 죽었다. 향년 51세였다.

 

홍수전의 사인에 대해 역사학계는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살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의 근거는 태평천국의 장수들의 자백서(自白書)다.

 

 

 

 

후기 태평천국의 중요 지도자 중 한 명인 홍인간(洪仁玕)은 청군(淸軍)에게 체포된 후 『홍인간자술』을 썼다. 그 후반부를 보면 “천왕이 자살하자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라고 돼 있다.

 

태평천국의 적수였던 상군(湘軍, 호남(湖南)지역 군대) 수령 증국번(曾國藩, 1811~1872)은 같은 해 6월 23일의 상소문에 “역적 우두머리 홍수전은 금년 5월 사이 관군이 맹공을 펼칠 때 음독하여 죽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해 7월 7일 상소문에는 “궁비라 자처하는 자는 도주(道州) 황(黃) 씨 여자인데 손수 반역자의 시체를 묻었다고 합니다. 신이 친히 신문했는바 자백에 따르면 홍수전은 생전에 오랜 기간 신료들을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4월 27일 관군이 급습하자 음독하여 자살했으나 비밀로 부쳐 발상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많은 역사학자들은 홍수전이 ‘음독자살’했다고 보고 있다.

 

증국번이 간행한 『이수성자술李秀成自述』에 홍수전의 죽음에 대해 “천왕(홍수전)은 그때 초조해져 안절부절 못하다가 4월 27일 음독해 죽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수성(李秀成, 1823~1864)은 태평천국 후기의 중요한 장수다. 홍수전이 죽을 때 그는 천경에서 천경 보위 전투를 주관하고 있었다. 천왕부 상황에 대해 비교적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그가 홍수전이 자살을 했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수성자술』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연이어 책 속에서 언급한 홍수전 음독자살 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린들리(A F Lindley, 영라呤喇)는 『태평천국혁명친력기太平天國親歷記』에서 “1852년, 태평군이 남경을 점령하기 이전 만청(滿淸) 관방은 그들의 이름으로 「천덕공장天德供狀」이라는 문건을 날조해 반란군 수령의 진술이라 위조하고 거짓으로 그 수령을 포로로 잡았다고 했다. 『충왕자술忠王自述』도 어쩌면 똑 같은 경우로 믿을 수 없다. 이 문건은 유명한 어떤 포로가 위조했거나(그는 어쩌면 이 문건으로 사면을 받았을 수도 있다), 양강(兩江)총독 증국번(曾國藩)의 교활한 막료가 위조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후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이수성자술』 판본이 나타나자 사람들을 진위 문제를 둘러싸고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을 제시한다.

 

1944년 나이강(羅爾綱)은 광서(廣西) 통지관(通志館)이 호남(湖南) 상향(湘鄕) 증국번의 후손에게서 초록해 온 『이수성자술』 원고 초록 및 원고를 찍은 일부분의 사진을 근거로 필적, 어휘, 사용한 낱말, 어기, 내용 등을 감정한 후 “증국번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이수성자술』은 이수성 친필이 확실하다”고 인정했다.

 

1956년에는 사법부 법의연구소의 필적 연구 점문가의 심사 결과를 근거로 증국번 후손의 보관하고 있는 『이수성자술』은 “증국번이 위조한 것이다”라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20세기 60년대 증국번 집안에서 100여 년을 소장 중이던 『상향증팔본당湘鄕曾八本堂』「이수성 자백 자필」이 정식 출판했다. 「자필」에 “그때가 대략 3월말에서 4월초 쯤 되는 시기로 그때 나는 동문 성 위에 있었다.

 

천왕은 그때 병이 너무 깊었다. 4월 21일(천력天歷)에 사망했다.” “그 사람은 병이 들면 약을 먹지 않았다. 병이 나면 낫을 때까지 나뒀고 낫지 않더라도 약을 먹지 않았다. 4월 21일 죽었다. 천왕의 병은 감로를 먹어 병이 생겼고 약도 먹지 않아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자필』이 발견으로 증국번이 출판한 『이수성자술』은 의도적으로 고쳤음이 증명됐다. 고쳤다는 증거는 증국번의 막료 조열문(趙烈文)이 『능정거사能靜居士일기』 중 7월 7일에 이수성의 자백을 자신에게 보여주고 수정해 군기처로 넘기라 해서 밤새 작업을 했다는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증국번이 이수성의 자백 원고를 군기처에 보낼 때 “이수성의 자백한 말은 문리적으로는 말이 통하지 않은 부분이 많으나 정확한 사실들이다. 초록을 군기처에 보내 살피도록 했다”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증국번이 출판한 『이수성자술』은 고쳐진 가짜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증국번은 왜 고쳤을까? 그 동기는 무엇이며 목적은 또 무엇일까? 이는 역사학계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이외에 궁금한 점이 남아있다. 홍수전이 죽고 태평천국이 와해되기 시작할 때 태자 자리에 있던 그의 아들 홍천귀복(洪天貴福)은 어떻게 됐을까?

 

홍천귀복(洪天貴福, 1849~1864), 광동(廣東) 화현(花縣) 사람으로 홍수전의 큰아들이다. 함풍(咸豊)원년(1851)에 천국유주(天國幼主)로 세워졌고 10년 정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동치(同治)3년(1864) 6월 즉위해 유천왕(幼天王)이라 칭했다. 7월에 천경(天京)이 청군(淸軍)에게 함락되자 이수성의 호송을 받으며 성을 빠져 나갔다. 같은 해 9월 석성(石城)에서 포로가 되고 남창(南昌)에서 주살됐다.

 

탈출 후 죽임을 당할 때까지 자세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천경이 함락된 후 홍천귀복은 수행원들의 호송을 받으며 평안하게 안휘(安徽) 광덕(廣德)에 도착했다. 도왕(堵王) 황문금(黃文金)은 그를 영접해 절강(浙江) 호주(湖州)로 가 간왕(干王) 홍인간(洪仁玕)과 합세했다.

 

그리고 그는 홍인간을 정군사(正軍師)에 임명했다. 호주는 군량이 많지 않고 군사력이 약해 수도로 삼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강서(江西) 건창(建昌), 무주(撫州)로 가 시왕(侍王) 이세현(李世賢), 강왕(康王) 왕해양(王海洋)과 합세한 후 다시 호북(湖北)으로 넘어가 익왕(翼王), 부왕(扶王)과 힘을 합쳐 장안(長安)을 장악한 후 가업을 중건하기로 결정했다.

 

7월, 홍천귀복 일행은 호주에서 출발해 강서로 갔다. 8월 강서 석성현 양가패(楊家牌)에서 야습을 받고 군신이 뿔뿔이 흩어졌다. 홍천귀복은 말을 버리고 보행으로 수행 수십 명과 큰 땅굴에 숨었다.

 

만청 군대는 땅굴로 내려와 체포했다. 유천왕은 어두운 곳에 숨어 있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청군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관병이 떠난 후 홍천귀복은 땅굴에서 기어 나와 혼자 산속에서 4일을 숨어 지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자 먹을 것을 찾아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스스로 호북(湖北) 사람이요 성은 장(張)이라고 하며 당(唐) 씨 집에서 벼 베기 품팔이꾼으로 일하면서 머리도 깎았다. 4일 후 그는 또 당 씨 집을 나와 광창(廣昌) 백수정(白水井)으로 갔다. 도중에 사병을 만나 의복을 빼앗겼다. 서금(瑞金)에 이르렀을 때 사병에게 이끌려 짐꾼이 되라 했으나 거절하고 석성(石城) 관내에서 10여 일을 전전했다.

 

 

 

 

9월 25일 청 조정의 유격대 주가량(周家良)이 산을 수색하면서 그를 체포했다. 이수성의 네 살밖에 안 된 둘째아들 이기상(李其祥)도 함께 체포됐다. 동치 4년 10월 20일, 유천왕 홍천귀복은 남창(南昌)에서 시조(市曹)로 이송된 후 능지처참 됐다.

 

 

 

이후에도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헛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태평천국현명친력기』에 따르면 1864년 12월 영국인이 하문厦門에서 홍콩 『매일신문』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그가 장주漳州를 다시 방문했을 때 “반란군들이 자신에게 천왕의 아들도 이 도시 중 어느 성내에 있다고 얘기했다”고 했다.

 

이는 어쩌면 태평천국 잔여 부대가 사기 진작을 위해 유천왕의 이름을 빌려서는 기치를 드높여 백성들을 선동해 청 정부에 항거하려는 필요성에 의한 것일 뿐이 아니었겠는가?

 

사이비 성향이 강한 종교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만청 봉건세력에 맞서 백성의 나라를 꿈꿨던 태평천국은 16세의 미성년자까지 능지처참을 당하면서 실패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태평천국으로 인해 백성이 중심이 돼야 세상이 바뀐다는 인식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데…….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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