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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7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양수청(楊秀淸)(1821~1856), 원명은 사룡(嗣龍), 광서(廣西) 계평(桂平) 사람이다. 도광(道光)26년(1846)에 배상제회(拜上帝會)에 가입했고 30년에 금전(金田)에서 봉기했다. 함풍(咸豊) 원년 중군(中軍) 주장(主將)으로 임명된 후 계속해서 동왕(東王), 구천세(九千歲)에 봉해졌다.

 

서, 남, 북을 통제 관리하고 제왕(諸王)을 도와 군정대권을 장악했다. 함풍6년, 청나라 군대의 강북 강남 본영을 대파하는데 탁월한 공을 세웠다. 같은 해 8월 위창휘(韋昌輝)에 의해 주살됐다.

 

그의 죽음은 천왕(天王) 홍수전(洪秀全)에게 자신을 ‘만세(萬歲)’에 봉하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홍수전은 그 공을 기려 8월 4일을 ‘동승절(東升節)’로 정했다.

 

태평천국 역사상 유명한 ‘천경사변(天京事變)’은 1856년 9월 28일에 발생했다. ‘천경사변’에 대한 사전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태평천국 지도자 집단 간 분열에 의해 발생한 권력투쟁이다. 도성을 천경(天京)(현 남경)을 수도로 정한 후 태평천국의 주요 인물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양수청, 위창휘, 석달개(石達開) 등은 각자 자신의 세력 집단을 결성해 권력과 이익을 다투는 투쟁을 전개했다.

 

동왕 양수청은 군대의 대부분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의 전횡으로 홍수전, 위창휘, 석달개, 진일강(秦日綱) 등과 갈등이 생겼다.

 

1856년, 팔구월 사이 강남 청나라 군영이 무너진 후 양수청은 천왕 홍수전에게 동왕부(東王府)를 ‘만세’로 봉해달라고 핍박했다. 홍수전은 위창휘와 석달개에게 군대를 돌려 양수청을 처리하라고 밀령을 내렸다.

 

위창휘은 명령을 받은 후 즉시 군대를 돌려 천경으로 진군한 후 동왕부를 포위하고 양수청 및 권속들을 주살했다. 천경 성내에서 도살극을 벌이면서 공포통치를 실행했다. 석달개의 모든 가족을 주살하자 석달개는 안경(安慶)으로 도피했다.

 

위창휘의 도살과 폭압 통치는 천경의 군사들의 분노를 샀다. 석달개도 홍수전에게 위창휘를 징벌할 것을 요구했다. 홍수전은 11월 초 위창휘 및 그 심복 200여 명을 사형에 처했다.

 

11월 말, 석달개가 천경으로 돌아오자 홍수전은 그에게 정무를 담당하도록 명했으나 그가 딴 맘을 품고 있다고 의심해 자신의 형제들을 왕으로 봉하고 도처에서 석달개를 견제하도록 했다.

 

1857년 6월, 석달개는 예하 부대를 인솔해 출정했다. 1863년 5월, 청나라 군대에 포위당해 섬멸됐다. 천경변란은 태평군(太平軍)의 원기를 크게 잃게 만들었고 적들을 섬멸해 승리를 거둘 좋은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 태평천국이 전성기에서 쇠퇴기로 접어들게 만든 전환점이다. 이렇게 사전에는 해석하고 있다.

 

 

어쨌든 그해 그날 동틀 무렵, 태평천국의 북왕(北王) 위창휘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갑자기 동왕부를 포위하고 수장 양수청을 죽였다. 곧이어 살계를 펼치기 시작한다.

 

2만여 명의 혁명동지들이 골육상쟁 속에서 죽임을 당했다. 가장 비참하고 애통한 이런 참극을 겪은 이후 태평천국은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기세가 드높던 농민운동은 흥성하던 정점으로부터 쇠퇴해져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된다.

 

태평천국의 동왕 양수청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죽임을 당했는가? 홍수전의 밀령에 의해 살해됐는가 아니면 위창휘가 독단으로 살해한 것인가? 홍수전은 ‘밀조(密詔)’를 내렸는가 하는 점이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양수청을 주살하라는 ‘밀조’, 즉 밀령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믿는 이유는 다음 몇 가지다. 첫째, 양수청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앉아 있어 지위가 높고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위창휘가 독단적으로 행동을 했다면, 그가 실패하면 멸족을 당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설사 성공했더라도 홍수전의 처벌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홍수전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위창휘는 감히 제멋대로 행동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동왕과 북왕 사이의 갈등은 오래된 일이다. 북왕이 결심을 했더라도 그렇게 중대한 일을 벌이는 데에는 위창휘도 분명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면 북왕은 강서(江西)에서 천 리를 내달려와 급습하는 형태는 손님이 주인을 몰아내는 형국으로 너무 큰 모험을 한 것이다. 만약 홍수전의 밀조가 없었다면 실로 적합한 시기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셋째, 천경은 태평천국의 수도다. 전쟁 때 사방의 문은 막강한 군대가 수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천왕이 거들지 않았다면 북왕의 군대가 어떻게 심야에 성으로 진입할 수 있었겠는가? 천경 수비군은 동왕의 관할이었다. 북왕은 홍수전의 명을 받들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진입했고 동왕부를 물셀 틈 없이 봉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관련 사적을 보면 밀조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1957년 1월 홍콩(香港) 『중국지우中國之友』 부록에 발표한 『어떤 유럽인의 구술(某歐洲人口述)』에 “우리(아일랜드 선원 컨넝(肯能))의 주택은 동왕부에서 약 50야드 떨어져 있는 거리의 건너편에 있었다. 우리는 동왕이 북왕 위창휘의 부대에게 그들이 주둔하고 있던 지역에서 출정하라고 명령했다고 들었다.

 

단양(丹陽)의 진일강은 안휘(安徽)로 이동하던 도중 위창휘를 만났다. 위창휘는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진일강은 ‘동왕의 명령을 받아 안휘로 간다’고 대답했다. 위창위는 ‘당신은 필히 나와 함께 천경으로 가야 하오.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천왕의 편지가 있소’라고 말했다.

 

진일강은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그들을 따라 천경으로 갔다. 그들은 성 밖에 이르렀을 때 위창휘가 진일강에게 ‘천왕이 동왕을 죽이라 명령했다’고 통지했다. 바로 그때 동왕은 천왕의 부대에게 성을 나가 전투를 벌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나가지 않았다. 동시에 동왕은 그의 친구인 익왕(翼王) 석달개의 부대를 천경으로 회군하라 명령했다.

 

그러나 석달개의 부대가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위창휘와 진일강이 성으로 진입했다. 그들은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한밤중에 성으로 들어섰다. 군관과 사병들은 만약 위창휘와 진일강이 성으로 진군하지 않았으면 동왕은 천왕을 죽일 준비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월비粵匪가 착수한 내력』에 말하기 양수청이 강탈을 부려 ‘만세’에 봉해진 후 “천왕은 귀가하여 밀문(密文)을 하나 쓰고 북왕 위자경子敬(위창휘)에게 군대를 돌려 동왕으로 돌아가라 분부하고 ‘왜 천왕은 부자 3인을 만세로 봉하려 하는가?’라고 했다. 위자경은 양수청과 함께 조정으로 들어갔다. 기회를 틈타 북왕 위자경이 동왕을 죽였다”고 했다.

 

이외에 천왕부(天王府)의 왕(王) 씨 하녀가 말하길 양수청이 강제로 만세에 봉하게 하자 천왕은 “여러 우두머리들을 모아놓고 동왕을 주살할 것을 의논했다. 북왕에게 군대를 이끌고 야밤에 동왕부를 에워싸게 한 후 하나도 남김없이 살육했다.” “그 후 북왕은 망자존대하게 돼 천왕은 그를 모살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밀조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홍수전과 양수청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심지어 “협박하여 만세로 봉해달라”고 해 내홍이 생겼다고 보고 있다. 즉 북왕은 단지 명령을 받아 실행에 옮겼을 뿐이라는 말이다.

 

다른 의견도 있다. ‘천경사변’은 북왕 위창휘 혼자 실행한 것이지 밀조와 같은 명령은 없다고 보는 부류가 있다. 위창휘는 홍수전과 양수청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것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밀조를 위조해 자신의 정치적 적수 양수청을 죽였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는 다음과 같은 근거가 있다.

 

첫째, 홍수전이 “양수청을 죽이라는 밀조”에 관한 기록은 설이 너무 많다. 밀조를 위창휘에게 줬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진일강과 석달개에게 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 전해지는 말일뿐 실제의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전에 말했던 아일랜드 선원 ‘건넝’의 보고에는 ‘밀조’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가 기록돼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컨넝’은 말 잘하고 재능 있다는 데서 얻어진 이름이라 한다. 당시 그는 동왕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초에 사변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의 보고서에는 그가 직접 듣고 본 상황을 기록돼 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는 밀조에 대한 사항을 달리 얘기하고 있어 의문점도 여전히 존재한다.

 

둘째, 홍수전 곁에는 친병(親兵)이 없었다. 그가 양수청을 처리하려 했다면 분명 그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천경의 수비군들은 모두 양수청의 관할이었다. 만약 홍수전이 경거망동했다면 상황은 무척 위험해졌을 것이다.

 

양수청이 최고의 영도권을 탈취하려 생각했다면, 그가 위창휘를 강서로 파견한 것이 정권을 탈취하려 했던 행동이라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위창휘가 갑자기 전방에서 회군할 때 아무 것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 양수청이 죽은 후의 홍수전, 위창휘 관계를 보면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위창휘가 확실히 양수청을 죽이라는 밀명을 받았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더 홍수전의 공신이 돼 천왕의 후한 포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정반대다.

 

양수청이 피살된 후 홍수전이 반포한 내용은 오히려 “위 씨 죄상을 밝혀”, “태형 4백 대를 명했다.” 컨넝의 서술을 근거로 하면 그 시기에는 아직 대학살이 시작되지 않은 때였다. 즉 다시 말해 위창휘가 벌을 받은 이유는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인 죄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비교적 합리적인 해석은 위창휘가 항명해 조서를 꾸민 후 제 뜻에 따라 양수청을 죽였기 때문에 홍수전은 즉각 명을 내려 징치한 것이다.

 

넷째, 양수청이 죽은 후 홍수전은 그를 존대했다. 당초 잔인하게 양 씨 일가를 죽였다면 양수청이 죽은 후 그의 기일을 ‘동왕숭천절(東王升天節)’로 정해 태평천국의 백성들이 대대손손 영원히 기억하도록 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양수청의 죽음에 대해 『동왕승천절기』로 기록해 태평천국의 역사로 삼았다.

 

태평천국의 조유(詔諭) 문서에는 양수청의 죽음을 모두 ‘승천(升天)’이라는 존경의 문자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위창휘의 죽음에 대해서는 ‘상(喪)’이라는 글자로 폄하한다는 것을 나타냈고 죽은 후 관직을 삭탈했다.

 

홍수전은 또 ‘傳天父上主皇上帝眞神聖旨……東王(전천부상주황상제진신성지……동왕)’으로 추서했다. 그리고 기미(己未)(1859)와 경인(庚寅)(1860) 연간에 원래 위창휘의 직위였던 ‘뇌사(雷師)’, ‘후사(后師)’를 동왕이 겸하게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홍수전이 양수청에 대한 신임과 기념하려는 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반대로 위창휘에 대해서는 폄하했다.

 

 

다섯째, 천경사변은 북왕과 익왕 두 명이 ‘밀의(密議)’해 일으킨 것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설은 믿기 힘들다. 태평천국 후기의 유명한 장군 이수성(李秀成)은 이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의 말에는 허점이 많다.

 

그는 천왕(天王)이 친히 동왕부에 가서 양수청을 ‘만세’로 봉하니 북왕과 익왕 둘이 불복해 비밀리에 의견을 나눈 후 동왕을 죽이고 그 형제 3명을 죽였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에 비춰보면 자료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하급 군관이었을 뿐인 이수성은 천경에 없었다. 단양(丹陽), 금단(金壇) 일대에서 청군(淸軍) 장국량(張國梁) 부대와 전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일들은 들은 것으로 자신이 직접 목도한 것은 아니다.

 

북왕, 익왕의 측면에서 보자. 6월 초 위창휘는 강서의 일을 관리하고 있었고 석달개는 천경의 포위를 뚫고 호북(湖北) 홍산(洪山)으로 갔다. 그들이 정말 ‘밀의’를 했다면 양수청이 ‘강제’로 ‘만세’에 봉하게 놔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왕과 익왕의 출정이 양수청의 조호이산(調虎離山)의 계책이라면 그 두 ‘호랑이’는 어떻게 편안하게 호북과 강서에서 3개월이란 기간을 지내며 천왕의 목숨과 안위를 돌보지 않았을까? 실제 상황으로 보면 석달개는 북왕이 동왕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해결하려고 단숨에 달려온 게 분명하다.

 

이렇게 본다면 ‘밀의’했다는 말이나 ‘밀조’를 내렸다는 것은 석달개를 불러온 것처럼 순전히 와전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홍수전이 정말로 석달개에게 ‘밀조’를 내렸다고 가정한다면 어째서 석달개는 내버려 두고 거들떠보지도 않았겠는가? 나중에 해결하기 위해 급히 천경으로 올 때 위창휘에 의해 살해당할 위기에 빠졌겠는가?

 

이 관점 이외에 양수청이 나날이 거만해지고 독단적이며 권력을 농단하면서 홍수전의 지위를 위협하게 되자 홍수전은 밀조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북왕이 제멋대로 양수청을 주살했다고 보기도 한다.

 

양수청을 살해한 일이 아직 확대되지 않았을 때 천왕의 태도는 여전히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왕을 사로잡아 헛소문을 제대로 바로잡지도 않았다는 것이 그 증좌라 본다.

 

 

여전히 문제로 남는 것은 정말로 ‘밀조’가 존재하느냐이다. 아직까지도 정확한 물증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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