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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7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 봉건시대에 구오지존(九五之尊)인 황제만을 칭하는 말이 ‘만세(萬歲)’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가 아니 듯이 나라에도 임금이 둘일 수 없다. 한 왕조의 ‘만세’는 당연히 한 자리만 있을 뿐이었다. 청(淸)나라 말기의 태평천국(太平天國)은 강남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청 왕조와 수 십 년을 대치했다.

 

강동(江東) 왕조의 위엄을 엄연히 갖추고 있었다. 그 지존 역시 ‘만세’라 불렀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사료를 보면 태평천국의 ‘만세’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이었다. 몇 명이었는가에 대해 현재까지도 역사학계는 논쟁 중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제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태평천국이란 청(淸)나라 말기 홍수전(洪秀全)과 농민봉기군이 세워 14년간 존속한 국가(1851∼1864)를 말한다. 청 정권은 장발적(長髮賊), 월비(粤匪), 발역(髮逆) 등으로 불렸다.

 

1843년 홍수전이 광동(廣東)성 화현(花縣)에서 창시한 배상제회(拜上帝會)에서 비롯됐다. 하늘의 주재자인 상제(上帝)를 여호와와 같은 위치에 놓고 모세와 그리스도가 여호와로부터 구세의 사명을 받았듯이 중국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상제로부터 자신이 받았다고 주장했다.

 

정통적인 요소를 짙게 풍기면서도 엄격한 우상 부정, 유교와 공자에 대한 비판, 유일신 신앙 등은 중국 역사상 최초이며 신선한 주장이었다. 박해가 가해지고 이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이 빈발해지자 홍수전은 광서성 계평(桂平)현 금전(金田)에 신도들을 결집시킨 후, 1851년 초 약 1만 명을 거느리고 봉기해 ‘태평천국’을 내세웠다. 상제의 명령과 가호를 받아 평화롭고 평등한 지상천국을 수립한다는 기원을 표명했다.

 

 

자 그럼, 태평천국에는 ‘만세’라 불린 황제가 몇 명이었을까?

 

첫 번째, 두 명의 ‘만세’가 있었다는 관점이다. 즉 홍수전(洪秀全)(1814~1864)과 그의 아들 홍천귀복(洪天貴福)(1849~1864)이다. 천왕(天王) 홍수전을 ‘만세’라 부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주(幼主) 홍천부귀도 동시에 만세라 불렀다. 기존 역사의 체제와는 달리 한 시대에 두 명의 ‘만세’가 존재한 선례를 만들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1851년 『태평예제太平禮制』에 “신하는 유주를 만세라 부른다”고 기록돼 있다.

 

두 번째, 4명의 만세가 있었다는 관점이다. 즉 홍수전과 홍천부귀 이외에 상제(上帝)와 예수를 더했다. 태평천국의 종교 관념에 의거하면 홍수전은 상제를 천부(天父)로 모셨기에 ‘만세’로 존칭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는 홍수전의 천형(天兄)이기에 그의 아들 홍천부귀를 ‘만세’라 부를 수 있다면 예수를 ‘만세’라 부르는 것 역시 순리적이다.

 

세 번째, 5명의 만세가 있다는 관점이다. 두 번째 설의 ‘4명’ 이외에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1823~1856)을 보탠다. 양수청은 홍수전에게 자신을 ‘만세’로 봉해줄 것을 요구하다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당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태평천국의 ‘만세’라 부르는 것은 ‘왕’으로 봉하는 것처럼 그리 간단한 일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네 번째, 8명의 ‘만세’가 있다는 관점이다. 이는 역사학계에서 가장 격렬하게 논쟁하는 관점이다. 이 관점의 중요한 근거는 태평천국의 옥새(玉璽)에 ‘팔위만세(八位萬歲)’라는 구절이다. 그 옥새에는 “천왕홍일(天王洪日), 천용기독(天冗基督), 팔위만세, 진왕귀복(眞王貴福)” 등 44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어떤 학자들은 그 옥새가 제조된 시기는 1861년 이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8명의 ‘만세’는 확실하게 아버지(상제), 형(예수), 짐(朕)(홍수전), 유(幼)(홍천부귀), 광(光)(홍수전의 셋째 아들 광왕(光王)), 명(明)(홍수전의 넷째 아들 명왕(明王)), 동(東)(동왕 양수청), 서(西)(서왕(西王) 소조귀(蕭朝貴))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리고 『조천조주도朝天朝主圖』에 “천왕조지(天王詔旨)”라 명확히 쓰여 있는데 ‘조지(詔旨)’란 조서, 성지의 의미로 황명이란 말이다. “아버지, 형, 짐, 유주는 진짜 천주이고 광, 명, 동, 서는 팔수(八數)라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이를 태평천국에 8명의 ‘만세’가 있다는 뜻이라 해석한다.(원문의 감(龕)을 감(堪)으로 해석하는 것을 따랐다. ‘할 수 있다’ 뜻이다)

 

어떤 학자들은 ‘팔위만세’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로 『충왕이수성자전원고忠王李秀成自傳原稿』를 근거로 한다. 그 속에 1852년 11월 “천왕은 장사(長沙)에서 옥새를 제조했다”고 돼 있다. 현재까지 어떤 자료에도 그 이후에 천왕이 다시 옥새를 만들었다는 말이 없다.

 

그렇다면 네 번째 관점에서 논한 옥새는 당연히 1852년에 제조된 것이다. 유주 ‘홍천귀부’의 이름은 1861년에 비롯됐다. 옥새 중 ‘진왕귀복(眞王貴福)’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 마땅한가? 태평군(太平軍)이 천경(天京)을 점령한 날이 1853년 3월이다. 이후에서야 명왕(明王)이 천경에서 태어난다. 이것은 근거가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1852년에 만든 옥새에 ‘팔위만세’에 어찌 명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양수청은 1856년 강짜를 부려 ‘만세’에 봉해지기 이전에는 ‘구천세(九千歲)’라 했다. 만약 1852년에 그가 ‘만세’가 됐다면 어찌 나중에 또 억지를 부려 황제라 부를 수 있도록 했겠는가? 가령 옥새를 제조한 시기가 1858년 광왕, 명왕을 ‘만세’라 부른 이후라면 양수청은 1856년에 결코 ‘만세’가 될 수 없고 그저 ‘구천세’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강짜로 ‘만세’에 봉해졌다면 찬위가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옥새에 새겨진 글자만을 가지고 ‘만세’를 정하는 것 또한 여러 역사적 사실과 모순이 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그 태평천국의 옥새는 가짜라고 고증하기도 했다. 사료를 고증해 여러 태평천국의 옥새의 크기를 거열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태평천국의 옥새의 새문(璽文)은 태평천국의 예제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더나가 『조천조주도』를 가지고 ‘팔위만세’의 관점을 증명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본다.

 

그림의 원문에 나와 있는 천왕의 조서에는 “짐이 지금 순차를 정하는 성지를 내린다”고 돼 있어 순서를 정하는 것이지 결코 누가 ‘만세’가 되는 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림에서 보면 10명이 나오는데 그중 ‘아버지, 형, 동, 서’의 4명은 인간 세상에 없고, 다른 ‘짐, 유, 광, 명, 장(長)(홍수전의 큰형 홍인발(洪仁發)), 차(次)(홍수전의 작은 형 홍인달(洪仁達))’는 홍 씨 부자형제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8명을 명시했다고 하기보다는 홍 씨 가족을 강조했다는 것이 그 그림의 진짜 뜻과 합치된다. 그림을 가지고 수를 센다면 이미 10명이 되는 셈이다.

 

 

홍수전의 아들인 유주, 광왕, 명왕을 ‘만세’라 부를 수 있다면 두 번째에 있는 홍주전의 형들은 어찌 만세라 부를 수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앞서 말한 네 번째 관점의 ‘태평옥새’는 위조품이란 말이 된다. 이런 증거를 가지고 ‘팔위만세’설을 반대하는 것은 태평천국에 몇 명의 ‘만세’가 있었냐는 관점의 다섯 번째가 되는 셈이다.

 

여섯 번째 관점은 ‘13만세’ 설이다. 장여남(張汝男)의 『금릉성난기략金陵省難記略』에 “홍적(洪賊)(홍수전)이 말하길 ‘동왕이 이미 다섯 살이 됐고 세자 역시 다섯 살이니 세대가 모두 만세다’라고 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지비자(知非子)의 『금릉잡기金陵雜記』에 “홍수전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향해 ‘이후에는 동왕을 만세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둘째 아들도 역시 만세라 부르라’고 했다. 도적떼들은 따랐다”고 쓰여 있다.

 

또 1858년 예제 중 홍수전은 다섯째 아들 홍천우(洪天祐)를 영세(永歲)에 봉했다. 만약 ‘영세’와 ‘만세’의 뜻이 상통한다는 설을 따른다면 또 다른 ‘만세’가 있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셈하면 모두 13명의 ‘만세’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 주의해볼 만한 것은 네 번째, 다섯 번째 관점 중에서 말한 그 태평천국의 ‘옥새’는 현재 정체불명이라는 점이다. 1950년 12월 ‘중앙박물관’에 있던 것을 상해 혁명문물 수집위원회로 옮겼다는 것만 알뿐이다.(현재 북경 중국혁명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남경 태평천국 기념 중 전시된 복제품) 실제 역사적 사료로 어떤 증거를 제공할 수 없다.

 

결국 태평천국에 도대체 몇 명의 ‘만세’라 불린 황제들이 있었는지 새로운 역사 자료와 실물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앞에서 말한 여러 관점 모두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근대의 중국은 사상, 정치, 경제 모든 면이 난관에 봉착돼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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