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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성의 날씨이야기(25) 왕건과 견훤의 승패를 가른 ‘남동풍’

 

왕건의 군사였던 태평(泰評)이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린다. 기도의 덕분이었을까. 강하게 불던 북서풍이 잦아들면서 풍향이 남동풍으로 바뀐다. 밀리던 왕건군은 이 순간에 화공을 이용해 견훤의 수군을 공격하고 대승을 거둔다. 지난 2001년 역사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방영된 장면 중 하나다.

 

이 장면을 보고 세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째, 이 사건이 실제 있었던 일인가 아니면 제갈공명이 적벽대전에서 사용한 남동풍을 모방한 것인가. 둘째, 과연 겨울철 서해바다에서 남동풍이 부는가. 셋째, 북쪽에 있던 왕건이 어떻게 남쪽에서 공격해 갈 수 있었는가 등이다.

 

가장 먼저 첫 번째 물음에 대해 “태조 왕건이 풍세를 타서 화공하니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군사가 태반이고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도망갔다”며 이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바람을 이용한 화공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다.

 

그리고 실제로 겨울철 서해상에서 주로 부는 바람은 북서풍이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1년에 한번정도 남동풍이 분다. 중국 화남지방에서 기압골이 북동진하면서 서해상에서 발달한 경우다.

 

1년에 많아야 1~2회 정도 발생하는데 지난 2001년 1월 7일 이런 기압배치가 형성됐다. 이때 해전이 벌어졌던 지역인 압해도(押海島·전남 신안) 기상관측자료에 의하면 화공에 이용할 수 있는 5~8m/s 이상의 남동풍이 새벽 4시부터 오후 4시까지 12시간정도 불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한국사 기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진도를 취하고 나주를 점령하자 배후에 위협을 느낀 견훤이 정병을 이끌고 나주를 공략하는 한편 해변포구를 차단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왕건이 나주로 가기 위해서는 영산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때 견훤의 수군은 목포 북서쪽 압해도의 남쪽 해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따라서 왕건은 견훤의 군대보다 남쪽에 있었으므로 이것 역시 논란이 되지 않는다.

 

한편 왕건과 견훤이 충돌한 곳은 우리나라 서남해 지방이었다. 과거 서남해 지방은 9세기 장보고가 주도하던 청해진 체제의 중심지로 일찍부터 해양세력이 크게 성장했던 곳이다.

 

장보고가 암살당한 이후에도 서남해 지방 일대는 해양세력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900년대 당시 서남해 지방의 해양세력은 섬지역을 무대로 한 ‘도서 해양세력’과 해안 육지를 무대로 한 ‘연안 해양세력’으로 나뉘었다.

 

왕건과 견훤이 맞서 싸웠던 912년 겨울로 돌아가보자. 견훤은 직접 지휘해 왕건의 군대와 맞섰다. 그는 전함을 목포에서 덕진포(전남 영암군 덕진면)에 이르는 영산강 하구에 배치시켜 왕건이 나주세력과 협공하는 것을 차단했다.

 

견훤은 이후 많은 함대를 압해도로 이동시켰다. 후백제 견훤의 군사력을 본 왕건의 병사들은 겁에 질려 전의를 상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건은 남동풍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오직 남동풍에 의한 화공으로만 승리가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왕건이 제사를 지내는 기간 내내 북서풍이 불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왕건이 남동풍이 부는 것을 확신한 것처럼 화공에 쓰는 많은 기름과 불화살, 화약까지 싣고 있었다.

 

7일째가 되던 때 갑자기 바람은 남동풍으로 바뀌었다. 왕건의 계책이 무엇인가 두려워 공세를 취하지 못해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공격하려고 준비하던 견훤군은 바람이 남동풍으로 바뀌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남동풍을 타고 불화살과 화약으로 공격하는 왕건의 전함에 견훤 함대는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속수무책이었다. 견훤의 전함들이 대부분 불에 타면서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제갈공명의 적벽대전을 연상케 하는 해전사에 길이 남을 이 전투야말로 ‘덕진포 대전’이라 불려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태평이 남동풍을 비는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남동풍이 불었을까?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배를 이용한 무역을 위주로 하던 개성을 근거지로 했던 왕건과 태평은 서해상에 나타나는 겨울철 기후와 특성을 파악하고 정확한 천기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전투가 대승으로 끝난 후 어떻게 남동풍이 불 것을 알았느냐는 질문에 제갈공명의 남동풍 불러오기를 벤치마킹했다고 말한다. 이는 오랜 기간 날씨를 관측하고 전쟁에 이용했다는 뜻이다. 이 지혜를 이용해 화공을 할 수 있도록 무기를 준비했고 이로 인해 왕건군이 대승을 거둔 것이다.

 

압해도 전투는 팽팽하게 맞서던 후백제와 고려의 균형을 깨뜨렸다. 적 후방 상륙작전, 제해권 장악 작전 등은 6·25전쟁 당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과 흡사하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견훤은 내내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은 패망하고 만다.

 

기발한 작전계획과 함께 남동풍을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활용한 왕건의 혜안은 그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의 왕으로 올라서는데 큰 밑받침이 되었다. <온케이웨더>

 

반기성은?

 

=충북 충주출생. 연세대 천문기상학과를 나와 공군 기상장교로 입대, 30년간 기상예보장교 생활을 했다. 군기상부대인 공군73기상전대장을 역임하고 공군 예비역대령으로 전역했다. ‘야전 기상의 전설’로 불릴 정도로 기상예보에 탁월한 독보적 존재였다. 한국기상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군에서 전역 후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위원을 맡아 연세대 대기과학과에서 항공기상학, 대기분석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기상종합솔루션회사인 케이웨더에서 예보센터장, 기상사업본부장, 기후산업연구소장 등도 맡아 일하고 있다. 국방부 기후연구위원, 기상청 정책자문위원과 삼성경제연구소, 조선일보, 국방일보, 스포츠서울 및 제이누리의 날씨 전문위원이다. 기상예보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대통령표창,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날씨를 바꾼 어메이징 세계사>외 1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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