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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7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사람들이 식후 한담거리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청관기안淸官奇案』중의 ‘건륭휴처(乾隆休妻)’(건륭이 아내를 쫓아내다)의 고사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우라나라 황후를 천성이 강직하고 단정하며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자로 묘사하고 있다.

 

입궁 후 황후라는 자리까지 오른 존귀한 몸이 됐지만 부인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건륭제가 구애받지 않고 풍류를 즐기려할 때마다 제지했다. 우라나라 황후가 황제에 대해 권고하는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말이 없었다.

 

황제는 궁 안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효행한다는 핑계로 모친을 모시고 강남을 순행하면서 구중궁궐의 속박을 벗어나 벌과 나비를 쫓아다니고 싶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자신을 속박하는 황후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황후가 태후를 모시고 효도를 할 수 있도록 동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청했으나 건륭제는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황제가 출행하는 그 날, 황후는 황제의 허락도 받지 않고 궁녀들에게 행장을 꾸리라고 명한 후 황태후의 남순을 시봉하면서 며느리의 효도를 다한다는 것을 이유로 태후의 배인 봉주(鳳舟)에 올라 함께 강남으로 동행했다. 천자를 호위하며 순행에 나선 왕공 대신, 시위 태감, 궁비 등 인원이 너무 많았으며 태후의 배가 앞서 있고 황제의 용선은 뒤에 있었던 까닭에 건륭제는 황후가 동행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방대하면서도 당당한 황제의 선단은 오색 깃발을 펄럭이며 위엄있게 대운하를 통해 북과 징소리로 하늘을 진동시키며 남으로 내려갔다. 제남(齊南)(역사 기록을 보면 건륭제는 효현황후가 죽은 후 다시는 제남에 가지 않았다)에 이르러 건륭제는 제남 풍광이 매혹적이고 시가가 번화한 게 결코 강남에 뒤지지 않는다는 근신의 말을 듣고 즉시 관광할 수 있도록 배를 정박하라 명령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 건륭제는 미복해 태감 몇 명을 데리고 출행했다. 제남의 산수의 아름다움을 만끽한 후 그 풍류천자는 가무를 즐기는 기루로 발길을 돌려 아리따운 여인들과 향락을 누릴 생각을 했다. 근신들은 주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놀랍게도 몇 십 명의 ‘기녀’들을 골라 용주로 데리고 갔다. 황제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다. 건륭제는 가무를 즐기면서 흉금을 털어놓고 통쾌하게 마시며 더없는 쾌락을 누렸다.

 

 

황혼 무렵까지도 용주 위에서는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위에 시무룩이 앉아 있던 우라나라 황후는 쾌락을 쫓는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치밀어 봉주(鳳舟)로 돌아가 붓을 급히 휘둘러 단숨에 간언하는 주장(奏章)을 썼다.

 

지난날과 현재의 일을 얘기하면서 엄중함을 신랄하게 진술했다. 다 쓰고 난 후 주장을 받쳐 들고는 용주에 올랐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쾌락을 쫓던 연회의 깃발이 내려졌고 북소리도 멈춰있었다. 황제는 벌써 침소에 든 때였다.

 

우라나라 황후는 깊고 조용한 밤중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돛대 위에 높이 걸려 있는 홍등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 규칙에 의하면 홍등이 높이 걸려 있다는 것은 황제가 이미 비빈을 불러 시침케 하고 잠들었다는 것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내정을 주관하고 육궁을 관리했기에 비빈을 불러 시침케 하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출행 도중 어찌 홍등이 높이 걸릴 수 있다는 말인가? 분명 비밀스런 일이 있음이었다.

 

그런 생각에 미친 황후는 화가 치밀어 내감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침실로 곧바로 뛰어들었다. 마침 기녀를 품고 자고 있던 건륭제는 떠들썩한 밖의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황후가 허락을 받지도 않고 들어와 침상 앞에 서있는 것을 본 황제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대노해 오히려 황후가 패악하다고 질책하고 급히 내감과 시위를 불러 “황후, 이런 천한 년이 깊은 밤에 내감의 전달도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나쁜 짓을 꾸미려는 뜻이 있음이 분명하다. 빨리 불을 밝히고 끌고 나가 엄벌에 처하라!” 가엾은 우라나라 황후는 그 말을 듣고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다. 여러 해 부부의 정을 보고 먼저 간언하는 주장을 읽은 후에 징벌할 것을 애원했다.

 

황제는 화내며 황후의 손에서 간언의 주장을 뺏었다. 보지 않았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읽게 되니 불에 기름을 얹힌 꼴이 됐다. 황후에게 “대담한 년. 감히 짐을 주색을 탐한 수양제 혼군과 비교를 해”라고 욕하며 간언하는 주장을 찢어발기고는 바로 황후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우라나라 황후는 황제가 그토록 매몰차게 대하는 것을 보고는 애통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로 황제에게 노여움을 풀고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 애걸했다. 그러나 이미 대노한 건륭제의 귀에 그녀의 말이 들어오기나 할까. 욕설을 퍼부으면서 황후를 발로 차 내쫓아 버렸다. 그러자 내감들이 모여들어 황후를 끌고 나갔다.

 

우라나라 황후는 모욕을 받고 거기에다가 매까지 맞았으니 울분이 가슴 가득 쌓였다. 억울함에 괴로웠다. 다음날 숭경(崇慶) 황태후는 며느리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의 말만 듣고 황후의 행동이 예에 어긋났다고 책망했다. 황후에게 행궁을 잠시 멈추고 황제의 화가 풀린 후에 도성으로 돌아가라고 권했다.

 

이쯤 되니 우라나라 황후는 절망했다. 박정한 군왕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구중궁궐에서 정신적 학대를 견디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돼 여생을 보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삭발했다는 이야기이다.

 

이외에 생리학적인 시각에서 분석한 사람도 있다. 우라나라 황후는 병이 생겨 삭발한 때가 47세로 갱년기였다. 황후의 신분으로 위로는 태후와 황제가 있어 가는 곳마다 예를 갖추며 시봉해야 했고 아래로는 수없이 많은 아리따운 후궁들을 응대해야 했다.

 

하루 종일 엄격한 예를 지켜야 하는 규정에 속박돼 있으면서도 억울한 마음을 발설할 수 없었다. 때마침 생각대로 풀리지 않은 일이 발생했으니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을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심지어 한꺼번에 냉정을 잃고 궁중 법도를 어기는 삭발까지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을 테고. 남편이란 황제는 이해하고 타이르고 위로하지 않은 것을 물론 오히려 질책하고 욕하면서 궁으로 돌아가라는 둥 야박하게 굴었으니 병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목숨까지 위태롭게 돼 중년의 나이에 죽음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우라나라 황후가 삭발을 자행한 이유는 그녀가 궁에서 살면서 겪은 속박과 강직한 성격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 다시 우라나라 씨가 영광스런 황후의 자리에 앉은 그 해로 되돌아가보자.

 

우라나라 씨가 황후가 되기 전에 태후에게서 온유하고 얌전하다는 칭찬을 한두 번 들은 것은 아니지만 건륭제는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다. 더 유감인 것은 그 당시 건륭제 자신은 측복진에 대해 별다른 인상을 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가 자신과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낯선 여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건륭제는 감히 모후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후의 명대로 그녀를 황후에 앉혔다. 우라나라 씨는 황후로 책봉된 후 2년 뒤 열두째 황자를 낳았다. 18년에는 다섯째 딸을, 20년에는 열셋째 황자를 낳았다. 5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3명의 자녀를 낳았으니 건륭제와 두 번째 황후 사이에 괜찮은 감정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열셋째 황자가 25살 성년이 된 것 이외에 1남 1녀는 어릴 적에 죽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보면 우라나라 씨가 황후로 책봉된 수년 동안 그들 부부는 사이가 좋았고 상친상애 했었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건륭제가 외지로 순행할 때마다 황후를 데리고 다녔고 소곤소곤 한담을 나누기도 했으며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과 귀중한 노리개를 주기도 했다.

 

18년(1753) 우라나라 씨가 반산(盤山)으로 가게 되자 건륭은 특별히 자신의 친신 대신인 수허더(shuhede, 서혁덕(舒赫德))를 영시위내대신으로 임명하고 내무부를 관리하는 대신으로 삼아 수행토록 했다. 오래지 않아 강소에서 홍수가 발생해 백성들이 재해를 입자 건륭제는 수허더를 보내 홍수관리 임무를 수행토록 하는 동시에 아리곤(Aligon, 아리곤(阿里衮))을 특별히 수허더의 직무를 대신 집행하게 반산으로 보내 황후의 순행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우라나라 씨도 아주 어렵게 이루어진 궁중의 지위를 더더욱 소중히 여겼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황태후와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당초 효현황후의 일거주일투족을 세심히 기억하고 전심으로 본받았다. 자신도 푸차 씨처럼 그렇게 다른 비빈들의 존중을 받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건륭제가 자신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황후가 된 것은 단순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경력에 의한 것임도 알고 있었다.

 

“순서에 의해 된” 것으로 황태후가 높이 평가한 까닭일 뿐 “사랑으로 선택”되거나 “아름다움으로 된” 자리가 아님도 알고 있었다. 황제의 특별한 총애나 출중한 미색으로 얻어진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은 황후가 아닌가. 그렇다면 아내의 도리를 다하면 될 일이었다. 적어도 자신에 대한 태후의 믿음과 희망을 저버리지만 않으면 됐다. 건륭 모자는 순행을 무척 좋아했다.

 

우라나라 씨는 평상시에 묵묵히 그들을 위해 여러 가지 일상 의물, 용구를 준비했고 순행 도중에는 태후 주변을 늘 떠나지 않고 부축해줬다. 식음료를 준비했으며 어떤 때는 태후에게 우스갯소리도 들려주면서 기쁘게 해줬다. 태후의 건강이 그리 좋지 않을 때에는 아침저녁으로 시중들고 탕약을 올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건륭제가 우라나라 씨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는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황제 마음속의 우라나라 씨는 지극히 일반적인 비빈과 다름이 없었을 뿐이었다.

 

세상을 떠난 전 황후와 비교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여쁜 비빈들과 비교해도 그녀보다는 다른 비빈들이 더 건륭제의 마음을 흔들어 놨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건륭제가 푸차 씨를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리워하는 마음이 나날이 강해져만 갔다. 건륭제는 여러 차례 꿈속에서 푸차 씨와 만났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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