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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70)...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푸차 씨는 온유하고 지혜로웠다. 건륭제에게 깊은 애정을 줬으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여인은 정치에 간섭할 수 없다는 대청제국의 전통을 푸차 씨는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황권에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 건륭제의 개성도 잘 알고 있었다.

 

군주의 어려움을 후비가 된 자는 이해할 수는 있어도 분담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 황상을 묵묵히 안위하고 긴장을 풀어주고 유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자신은 온몸으로 다가가 다정다감하게 보살피고 안전하고 쾌적한 남편의 피난처가 돼 주면 됐다.

 

한번은 건륭이 절창(癤瘡, 절양癤瘍)을 앓았다. 어의가 기본적으로 치료하고 백일을 요양해야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고 당부했다. 황후가 듣고서는 태후를 봉양해야 하고 육궁의 일을 대행해야 했고 자녀를 양육에 전력을 해야 했기에 기진맥진했지만 다른 비빈에게 맡기지 않고 매일 친히 침상을 지키며 시봉했다.

 

매일 밤 황제의 침궁에서 잠을 자면서 차를 올리고 물을 따라줬다. 황제가 요양하는 기간 동안 약을 따르는 등 어느 하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백일 정도 지나 건륭제가 건강을 회복하고 처음처럼 강건하게 돼서야 본궁으로 돌아갔다.

 

백일 동안 건륭제의 건강은 회복됐으나 푸차 씨는 많이 수척해 졌다. 좌우 대관들이 황제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축하하며 무상의 행복을 축원할 때 건륭제는 마음속으로 푸차 씨와 같은 현모양처가 있다는 게 자신의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기 청 왕조 궁정은 실로 포근하고 조화로움이 넘쳐났다. 건륭제는 집안 걱정 하나 없이 일심으로 국가를 다스렸다. 관리 조직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폐해를 적소 했다.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민중들은 숭고한 명망을 향유했다.

 

사서는 당시 “만민이 즐거워했고 우레와 같은 칭송이 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민간에는 “건륭보(寶)는 수명을 늘이고 건륭전(錢)은 만 만 년 간다”는 가요가 출현했다. 대청제국은 바야흐로 국태민안의 번영을 이룬다.

 

그러나 운명은 금슬 좋은 부부를 고의로 어긋나게 만드는 듯. 건륭 3년(1738) 10월 12일, 그들이 애지중지했던 아들, 9살밖에 안된 영련이 갑자기 한질(寒疾)을 앓더니 급사한다. 건륭과 푸차 씨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영련은 나이가 어리기는 했으나 품성이 선량하고 이해력이 뛰어났다. 독서하기 좋아했으며 말과 행동거지가 제왕가 특유의 존귀한 기질이 드러났었다. 건륭제는 그에게 큰 희망을 품었었다.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옹정제의 예를 따라 영련을 비밀리에 황태자로 정하고 친히 전위한다는 밀조를 써서 건청궁(乾淸宮)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감춰뒀었다. 만일 어느 날 자신에게 의외의 일이 생기면 군신들이 편액 뒤에서 조서를 꺼내 영련을 황제로 앉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밀스럽게 황태자를 앉히는 것은 영구적인 해법이 될 수 없소. 후에 황자(영련)가 자라 지식이 배가되고 도덕이 세워지면 사악한 사상으로 인해 나쁘게 되지만 않는다면 짐은 천하에 조서를 반포해 공개적으로 황태자를 세울 것이오.” 그러나 그런 희망은 사라져 버렸다. 건륭제는 당초 자신이 직접 쓴 밀조를 대신들에게 보이며 슬픔을 금치 못해 눈물을 쏟아냈다.

 

 

그 재앙으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황후 푸차 씨였다. 부음을 듣고는 숨이 끊어질 듯 아팠다. 어제까지 천진하고 활발히 뛰어놀던 아들이 영원히 떠나버렸다니,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영련의 그 청수한 얼굴과 낭랑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녀는 식음을 전폐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영련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 봤던 책, 썼던 붓 모두 묵묵히 수장했다. 감히 볼 수도 없었지만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나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번이나 꿈속에서 아들을 껴안았고, 깬 후에 양손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알아챈 후에는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됐다.

 

그러면서도 다음날 황태후와 건륭제를 만나러 갈 때면 억지로라도 웃는 얼굴을 했다. 아들을 잃은 자신의 슬픔 때문에 모친과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유약한 몸으로 자신의 슬픔을 감내해냈다.

 

황후의 마음을 달래려 건륭제는 이전보다 더 자상하고 부드럽게 그녀를 대했다. 건륭 10년(1745) 여름, 푸차 씨는 또 임신했다. 그것은 푸차 씨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큰 경사였다. 배속의 영아를 어루만지며 충만한 행복을 느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지만 자신의 모든 심혈을 바쳐 아이를 기르리라 마음먹었다. 아이의 성별과 얼굴을 상상했다. 출생 후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치기가 넘쳐흐르는 일거수일투족을 상상했다. 뱃속의 아이는 그녀를 절망의 늪에서 끌어내는 희망의 불꽃이었다.

 

점차 붉어지는 푸차 씨의 얼굴색을 보고 태후와 건륭제는 홀가분해짐을 느꼈다. 건륭제는 몰래몰래 푸차 씨에게 만약 아들을 낳으면 짐은 반드시 태자로 삼으리라는 말을 했다. 푸차 씨는 그 말을 듣고 희비가 엇갈렸다. 머릿속에 영련이 떠올랐다. 그리고 복중의 영아를 생각했다. 자신에 대한 황제의 관심과 은애를 생각했다. 슬펐으나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인해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건륭 11년(1746) 4월 8일, 푸차 씨는 건장한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영종(永琮)이라 지었다. 흥성하여 장수하고 종사를 이으라는 뜻이었다. 건륭제는 내심 그 어린 아들을 계승자로 점찍었다. 좋은 교육으로 정심으로 길러 어른이 된 후 천하를 통치할 중임을 담당할 수 있기를 바랐다.

 

마음속으로 미래의 황위는 영종에게 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았다. 영종이 한 살 하고 8개월이 됐을 때, 그해 30(음력 12월 29일) 천연두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과 하직해 버린다.

 

전대미문의 공포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건륭제는 비통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불행이 적자에게만 생기는 것인가? 본 왕조는 황후가 낳은 적자가 황위를 계승할 수 없도록 하늘이 정했다는 말인가.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선조들이 하지 않은 일을 자기 고집대로만 하려고 해서 적자가 일찍 요절하는 것이란 말인가.

 

이번 충격은 푸차 씨를 철저하게 무너뜨려 버렸다. 8년 동안 사랑하는 아들 둘을 잃었다. 자신이 낳은 4명의 아이 중 3명을 잃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다. 황후 푸차 씨는 황태후와 건륭제 앞에서 억지웃음을 짓는 것 이외에 하루 종일 아무 말 없이 침울하게 앉아 있었다. 혼자서 머나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영련, 영종의 이름을 가만가만 불렀다. 어떤 때는 다른 세상으로 떠나 자신의 아이들을 안고 싶은 마음도 생겨났다.

 

두 아들을 떠나보낸 충격은 효현황후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했다. 영종 사후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즉 건륭 13년 정월, 황후 푸차 씨는 슬픔을 머금고 아픔을 참으며 황태후를 시봉해 산동으로 순행을 나간다.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황후는 태후 앞에서 억지웃음을 지었다. 기쁘게 해드리며 인내하며 시봉했다. 건륭황제가 태후를 모시고 황후를 데리고 순행을 떠난 데는 목적이 있었다. 바로 황후에게 산천을 구경시켜 근심을 잊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비통의 무게를 얼마만이라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황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건륭은 특별히 푸차 씨의 오빠, 당시 호부상서 부항(傅恒)을 동행시키면서 순행 중의 내각 사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행렬은 장관을 이뤘다. 방대한 순행 대오를 갖춰 유적지를 탐방하고 산천을 유람했다. 노구교(盧溝橋)를 지나 홍은사(弘恩寺)에서 쉬고 고탁주(古涿州)를 유람하고 곡부(曲阜)에서 노닐다 태산(泰山)을 오르고 옥황묘(玉皇廟)를 방문한 후 제남(齊南)에서 열병하고 대명호(大明湖)에서 뱃놀이했다. 황후는 태후와 황제를 시봉하면서 동토의 아름다운 산수풍경과 백성들의 풍속을 관상하면서 일시에 마음속 고통을 잊은 듯 보였다.

 

그러나 푸차 씨의 흥미를 갖는 모습은 건륭제와 태후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는 것에 불과했다. 내심의 우울은 여전히 존재했고 가면 갈수록 더 깊어갔다. 그녀가 백성들의 풍속을 살피며 마을을 돌 때 평민의 아이들이 곳곳에서 활발하게 뛰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꼈다.

 

산동(山東)의 늦봄은 갑자기 비가 왔다 갰다 온랭이 일정치 않다. 북방의 한랭하고 건조한 기후에 습관이 된 푸차 씨는 제남에서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태의는 한질이라 진단했다. 건륭제가 소식을 듣고 제남에서 며칠 쉬면서 건강을 회복시킬 것을 명했다.

 

그러나 푸차 씨는 자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오랫동안 외지에 머물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도성에도 황제가 돌아가 처리해야 할 정무가 많지 않던가. 더욱이 제남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태후가 무슨 일인가 궁금해 할 것이 아닌가. 그녀는 태후가 자신의 건강 걱정 때문에 몸을 해칠까 염려됐다.

 

황후가 순행을 계속할 것을 고집하자 건륭제는 어쩔 수 없이 응했다. 그러나 황후의 몸은 너무나 약해져 있었다. 거기에다 여행으로 쌓인 피로는 질병의 침습을 막아낼 수 없었다.

 

3월 11일(양력 4월 8일) 용선이 덕주(德州)에 이르렀을 때 푸차 씨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됐다. 건륭제는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며 황급히 어주(御舟)로 옮기게 한 후 의사들을 모아 회진케 했다. 그때 순행에 동행했던 여러 왕들과 대신들도 소식을 듣고 문안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푸차 씨는 마지막 숨을 모으고 있었다. 한밤중에 돌연히 세상을 떠났다. 아들 영종이 죽은 지 3개월밖에 안 된 때였다.

 

 

건륭제는 황후를 위해 성대하고 장중한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는 22년 동안의 푸차 씨와의 부부의 정을 생각하고 황후를 애도하면서 융숭하게 제전(祭奠) 행사를 거행했다. 황태후가 거주하는 창춘원(暢春園)으로 가 문안드리고 경산(景山) 관덕전(觀德殿)으로 건너가 황후의 재궁(梓宮) 앞에서 제주를 올리며 애도했다.

 

그해 윤7월까지 황후가 죽고 4개월 동안 제전은 그치지 않았다. 10월이 돼서야 효현황후의 재궁을 도성의 동쪽 정안장(靜安莊)으로 옮겼다. 건륭제도 함께 했다. 그리고 1년에 매월 한두 번은 정안장에서 제사를 지냈다.

 

생각해보자. 건륭제는 일국의 군주다. 금천(金川)의 난을 평정하는 기간으로, 매일 여러 가지 사무를 처리하는 그런 바쁜 와중에 짬을 내 애도행사를 거행했다. 이 사실만 봐도 이별을 아쉬워하는, 효현황후에 대한 건륭제의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1주년이 지나도 여전히 황후의 빈소에 가서 제사지내며 애도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리움, 그윽한 정은 17년 10월 직예(直隸) 준화주(遵化州, 현 하북 준화현) 청동릉(淸東陵) 승수욕(勝水峪) 지하궁, 즉 이후 건륭제의 유릉(裕陵)에 안장할 때까지 계속됐다. 가경(嘉慶) 4년, 건륭제가 죽자 그 지하궁에 합장해 금슬 좋은 부부가 저승에서도 반려하도록 했다.

 

황후 푸차 씨 사후 그녀를 위해 성대한 책시례(冊諡禮)를 거행했다. 시호는 효현황후(孝賢皇后)다. 황후가 효현이라는 시호를 받은 데에도 곡절이 있다. 3년 전, 즉 건륭 10년(1745) 정월, 건륭제의 총비 고가(高佳) 씨가 병으로 죽자 황귀비(皇貴妃)로 추봉하고 혜현(慧賢)이란 시호를 내렸다.

 

당시 황후가 옆에서 고가 씨가 혜현이라 명호를 받는 것을 보고 있다가, “저는 다른 날 효현이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이 말은 원래 부부간에 나눈 우스갯소리였다. 당시 푸차 씨는 34세에 불과했고 건강도 좋았다. 건륭제는 당연 마음에 두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게 3년 후에 우스갯소리가 진짜가 돼 버렸다. 황후가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죽은 것이다.

 

건륭제는 시호를 생각하면서 당시의 황후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의 일생의 현숙한 품성을 생각했다. 효현이란 시호와 명실상부하지 않은가. 그리고 우스개 같은 약속도 지키는 것이고.

 

그로부터 48년 후 건륭제는 그의 아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된다. 그의 나이 86세의 고령이었다. 그해 늦은 봄, 그는 또 효현황후의 묘 앞에서 술을 올리며 제를 지냈다. 황후의 장례를 지내며 친히 소나무를 심었었다. 이미 하늘 위로 치솟아 있었다. 경물을 대하니 감정이 일었다.

 

지난 날 부부가 해로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비탄에 잠겨 시를 써서 그 일을 기록했다. “해로하자는 맹세 헛되니 추억할 수조차 없구나.” 이런 것으로 보면 효현황후에 대한 건륭제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면면했는지를 알 수 있다.

 

건륭제의 결발부부에 대한 사랑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민국 시기, 청 왕조를 깎아 내리기 위해 많은 문인들이 멋대로 꾸며내 황후의 사인이 건륭제의 스캔들과 관련 있다고 유포했다.

 

사실은 아무런 근거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일 따름이다. 한족들이 여진족(만주족)의 뛰어난 황제에 대한 자격지심인 셈이다. 믿을 수 없는 헛소리로 타 민족을 내리까려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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