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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일제강점기 제주관광과 여행 후기 모음 ... "제주행 차표 주시오!"

 

바다의 조선명소로 제주도 등장
명미(明媚)의 다도(多島)와 탐라(耽羅)의 고국(古國)
철도국(鐵道局)서 관광을 선전

 

삼신산의 하나로 유명한 영주산(瀛洲山)이란 탐라고국 제주도(耽羅古國 濟州島)를 조선의 새로운 관광지로서 인식하게 되어 철도국에서는 제주도 관광의 연락활인(聯絡割引)을 사월일일부터 하기로 결정하야 근간 그 관광일정 여비 등을 발표하기로 되엇다. 이리하야 새로운 관광명소로서 소개될 제주도는 구화산구(舊火山口)를 둘러 폭포 삼림 등이 선창으로부터 일반 관객의 눈에 명미하게 비칠 터이고 제주로 가는 연해의 다도해 풍경이야말로 새로 해중 조선의 맛을 일반이 새삼스럽게 맛보게 되리라 한다(동아일보 1935년 3월 2일).

 

서울서 산 표 한 장으로 해녀(海女)의 나라에!
철도(鐵道)와 제주도간 교통편리

 

오는 사월일일부터 조선기선의 목포 제주도(목포 제주도)간의 항로와 철도국선의 좌기 각 역간의 려객급 수하물의 련대 수송이 개시되기로 되엇는데 이로써 경성정거장에서 “제주도 차표 주시오”소리를 할 수 잇게 되엇고 또 표 한번 사면 다른 번잡이 없게 되어 퍽 편리케 되엇다.

 

호남선과 광주선 각역, 경성, 용산, 영등포, 수원, 천안, 조치원, 대전, 전주)등 각역으로서 제주도간의 려객운임은 삼등 구원구십사전, 이등 십육원칠십오전이다. 시간은 매기 숫일에 목포를 오후 칠시에 떠나 제주도는 그 이튼날 오전삼시반에 닷고 제주도는 우숫일 오전구시에 떠나 오후 오시에 목포에 닷는다(동아일보 1935년 3얼 24일).

 

 

제주도 한라산 탐승단원 모집

 

혹독한 더위가 장차 박도함으로 불구에 학교에서는 방학을 하고 세상에서는 업을 쉬고 더위를 피하랴 산으로 바다로 향하게 되엇다. 산으로는 금강산 바다로는 원산 인천 등도 잇거니와 그보다도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세상사람의 발자최가 희한할 남도의 비경(祕境)인 제주 한내산(漢拏山)을 탑승하는것도 물론 의의가 잇다.

 

제주로 말하면 멀리 떨어저 잇는 고도(孤島)인만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졸연히 가볼 수 업슬 뿐 아니라 단독으로는 비용도 만히 되는데 본보 인천지국에서는 긔업동맹기선부(企業同盟汽船部) 인천지부에 특별교섭하야 선임(船賃)과 식비를 특히 싸게 하야 왕복전부비용이 보통사람은 이십일원 학생은 십삼원 보통비용의 삼분의 일이면 족하게 되엇다(동아일보 1931년 7월 2일).

 

제주도 시찰일정은 다음과 갓다 한다.

 

칠월이십이일 오후 인천 출항
이십삼일 목포 착상륙 시찰
이십사일 목포출항
이십오일 제주 도착 도일주
이십육일 서귀포 착상륙(着上陸)
이십칠일 이십팔일 이십구일 한라산 탐승(探勝)
삼십일 제주성내 시찰(視察)
삼십일일 제주서 정구 등 경기(競技)
팔월일일 산포조어(山浦釣魚) 해녀작업 시찰(視察)
이일 명승고적 시찰
삼일 용연선유(龍淵船遊)
사일 제주 출항
오일 오후 인천 귀착(歸着)(동아일보 1931년 7월 15일).

 

 

제주도송(濟州島頌)

 

여름밤 꿈꾸듯이 다녀온 제주도건만 사흘 지나 닷새 돼도 잊혀지지 안하 애를 씁니다. 섬이라 제주땅은 곱고 고운 꿈의 나라울도 문도 없는 초인(超人)들의 살림터라 네 것 네 것이 우리 것이니 금처서 안 가린 듯 그 뉘라서 탄하리.

 

늙은 꾀꼬리 목쉬어 내천(川)찾을 때 밭갈이에 지친 아낙네 점북따러 포구(浦口)로 가네. “이러러” 말새끼야 조밟이도 끝낫으니 천지연(天池淵) 물마시고 거듭철에 오려므나 거울면(面) 같은 산지포구(山池浦口)에 매엿던 목선(木船)이여 섬색시 머리처럼 부드러운 한라산맥 노송 욱어진 기암유곡(奇岩幽谷)을 나려패는 정방폭(正房瀑)의 물소리가 눈감아도 보이듯 귀막아도 듣기는 듯.

 

한라산록(漢拏山麓) 소요(逍遙)하든 고삐없는 말의떼 “우러러” 말 부르는 농군(農軍)네의 애타는 소리 못 듣는가 나믈 마소 저물 소리에 들리겟소.

 

뜨는데도 성산(城山)바다 지는 곳도 사라봉(沙羅峯)이라거니 햇님아 재촉마오 한라산이야 못 넘으리 비포(琵浦)아가씨네 해삼(海蔘) 광주리 텅 비엇으니 백록택변반송(白鹿澤邊盤松)우에 쉬엄쉬엄 땀 드려 가오.

 

산에 물에 놀다온 나이건마는 간 듯도 안간 듯도 갈피 못 차려 애를 씁니다.
뭇노니 꿈속의 나라 제주섬이어 내 그대 찾앗음여 생시런가 꿈이런가?
이무영(李無影) (동아일보 1935년 7월 12일).

 

 

산지포(山地浦), 용연(龍淵)의 절경(絶景)과 삼사비(三射碑)

 

삼성혈을 보고 돌아서려니 흐렷던 날이 금시에 바짝 들며 해가 쨍쨍 나려 쪼인다. 서문교(西門橋)를 지나서 공자묘를 구경하고 다시 밭이랑을 타고 해변으로 나가려니 노송가지 사이로 무엇인지 뻔쩍한다 물이다.

 

아, 이토록이나 맑은 물은 어다 잇으며, 물이면 물이엇지 이토록이나 잔잔한 수면이 잇을 수 잇을까? 이것은 달 밝은 밤, 제주도 시악들의 목욕터라는 용연(龍淵)이다. 수면까지 삼사십척이나 되는 절벽이 양쪽 언덕이 되고 그 사이를 수은같이 맑은 물이 흐른 다아. 그러나 이 물을 그 누가 흐른다 할 것인가? 잔물살 한줄없는 물속에서는 가끔 잉어의 허연뱃대기가 번적인다.

 

용연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괴벽(怪癖)을 다하야 만든 석함(石函)이다. 천태만상의 기암(奇巖)이 변두리가 되어 잇는 것도 장관이려니와 그 기암절벽 틈을 파고난 반송(盤松)이 거올 속 같은 물에 비치어 물속의 해송(海松)이 절벽에 비치엇는지 절벽의 반송이 물속에 비친것인지 분간키 어려울만하다. 아람드리 노송에 등을 기대고 가마니 물가에 앉앗으려니 세상만사(世上萬事)는 잊히는 듯 물러가고 조름만 포옥 포옥 쏟아지네. 구렝이도 십(十)년에 용되엇다 하거늘 용연에 몸 닦고도 지은 죄 못 벗으랴. 잉어인지 꼬리로 물살 지을때야 현긔가 나네, 이 몸도 용되어 오르는가 하엿소.

 

산지포구(山地浦口) 여관으로 돌아온 것은 한시, 간단한 오찬을 마치고 자동차를 달리어 삼사석비(三射石碑)를 찾앗다. 이 삼사석비는 탐라국의 시조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 세분이 서로 도읍을 다투다가 이 삼사석비가 선 곳에서 활을 쏘아 자긔의 화살이 떠러진 곳에 자긔의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활을 쏜 바로 그 지점이라 한다. 삼사석비를 지나니 왼편에는 바다요, 오른편에는 펀한 평야다.

 

사긔(史記)에 의한다면 피란 다니든 몽고족(蒙古族)이 제주도에 와서 영주(永住)하게 된 일이 잇다고 한다. 그래 그럼인지 제주도 농민들의 밭갈이 광경은 그게 통이 몽고족과 같은 데가 만타. 수십필의 말을 몰아서 조밭 밟이를 하는 것도 일즉이 보지 못한 광경이려니와 고삐도 없는 말의 떼가 편한 들판을 어슬렁거리는 풍경은 제주도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해가 어스름만 하여도 마소(馬牛)를 오양 속에 가두고 대문을 첩첩히 닫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 농촌이오 세게 각국의 풍속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농민들은 이와 꼭 반대다. 해가 질 무렴이면 마소를 집에서 몰아 들과 산으로 내보낸다. 들이나 산에 가서 자고 해 뜨거던 다시 들어오라는 것이다. 호박닢 한나를 가지고도 네 것이니 내 것이니 싸우는 것이 세상의 상태거늘 마소에 굴레도 안 씨우고 고삐도 매지 안흔 나라가 어디 잇을 것인가? 물론 이것은 이십사(二十四)만의 도민 중에 거지는 또 한사람도 없다는 제주도민들의 생활안정에서 온 미풍(美風)이겟지마는 그 천성이 그만큼 아름답지 못하다면 이때껏 말목에 고삐가 매어지지 안핫 을리가 만무할 것이다. 이무영(李無影)(동아일보 1935년 8월 4일).

 

 

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

 

제주도는 물의 나라, 폭포의 나라다. 한라산맥에서 흘러 나린 백사십여개의 고고만외, 그 뫼를 흘른 수천 골작, 옛날의 분화구(噴火口)엿던 산상의 백녹담(白鹿潭)에서 새어 나린 물줄기는 혹은 게류가 되어 섬처녀들의 목욕터가 되고 혹은 모디어 수심(水深) 수백척의 호수가 되엇다. 직경 삼사십척이 물확을 채운 옥수는 지세따라 폭포가 되어 산채캐던 처녀들의 목말도 시켜준다.

 

이 허다한 폭포 중에서도 천지연(天池淵)은 폭포의 나라 제주도에서도 이름난 폭포다. 서귀포(西歸浦) 어촌에서 런넬 처런된 산골을 타고 □□으로 이삼정 들어가면 벌서 획을 내려 패는 물소리가 산뿌리를 잡아 흔든다. 골작에 들어서니 때 아닌 안개가 자옥하여 십여척 거리에 선 사람이 얼굴까지 몽롱하고 금시에 옷이 눅눅하게 적어버린다.

 

물확의 주위는 한 백척 가량이나 될까? 확안에 솟은 바위도 물에 못 견디는 듯 잠겻다 솟앗다 담방구질을 한다. 인가에서 육, 칠정이고 보니 인축(人畜)의 소리를 들을 길도 없거니와 그 울창한 밀림 속이건만 새소리 한마디 안들린다. 천지연은 사람에 따라서는 비연폭포(悲戀瀑布)라고 부르는 사람까지도 생기게까지 산채캐던 섬처녀와 편발의 초동들이 애틋한 연정을 정산한 사건이 한두번이 아니라 한다. 이무영(李無影) (동아일보 1935년 8월 5일).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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