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바디 오브 라이즈(Body of Lies)

리들리 스캇 감독의 영화 ‘바디 오브 라이즈(Body of Lies)’는 2003년 3월부터 4월까지 약 한달에 걸친 ‘이라크 전쟁’을 둘러싸고 벌어진 거짓의 대향연을 다룬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은 전쟁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20여일 만에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개운치 않은 승리였고 전쟁의 정당성과 도덕성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리들리 스캇 감독은 ‘국가의 이익(National interest)’이라는 목적이 어떤 수단도 정당화시킬 수 있는지 묻는다. CIA 정예요원 로저 페리스(Roger Ferriesㆍ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드 호프만(Ed Hoffmanㆍ러셀 크로우)은 신출귀몰하는 이라크 거물 테러리스트 알 살림(Al-Saleem) 검거에 번번이 실패하고 농락 당한다.

 

알 살림은 결국 이들의 추적과 감시를 비웃기라도 하듯 암스테르담에서 대형사고를 친다. 페리스와 호프만은 당연히 열이 받는다. 첩보원으로서의 자괴감과 모욕감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밥줄’에 위기의식을 느낀다. 밥줄 걱정하게 된 페리스는 기상천외한 새로운 작전을 기획한다. 유령처럼 출몰하는 알 살림을 추적하기보다 알 살림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유인하기로 한다. 멀쩡한 요르단의 건축가 오마르 사디키를 하루아침에 혜성처럼 나타난 테러리스트로 둔갑시키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시시하게 ‘가짜 뉴스’ 생산 정도가 아니라 전세계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고 ‘기득권 테러리스트’ 알 살림도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의 가짜 대형 테러폭발 사고를 꾸미고 영문도 모르는 건축가 사디키를 그 배후인물로 꾸민다. 알 살림을 속이기 위해 전 세계를 속이고, CIA와 함께 알 살림을 추적하던 동지 요르단 정보국장마저 끝까지 속인다.

 

 

‘테러계 대부’의 권위에 상처를 입은 알 살림은 마침내 사디키를 추적하고 제거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고 움직인다. 알 살림은 사디키를 잡으러 깊은 굴속에서 나오고 두더지 구멍 앞에서 두더지가 고개를 내밀기만을 기다리던 CIA에게 걸려들고 만다. CIA의 작전은 결과론적으로 성공을 거뒀지만 그 와중에 강제로 ‘신분세탁’ 당한 요르단의 건실한 사업가 사디키는 영문도 모른 채 알 살림 조직에 의해 살해된다.

 

페리스가 알 살림에게 일격을 가하고 한시름 놓았다 싶은 순간, 페리스의 요르단 연인 아이샤가 사라진다. 연인 아이샤가 알 살림에게 납치됐다고 믿은 페리스는 아이샤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혈혈단신 알 살림의 근거지에 자신을 던진다. 숨소리 빼고 모두 거짓말인 첩보원에게도 순정은 있었다. 알 살림 조직에 붙잡힌 페리스는 지하실에 끌려가 알 살림과 조우하고 손가락이 하나씩 잘리는 고문을 당한다. 마지막 처형 직전 요르단 정보국장 하니 살라암(Hani Salaam)에 의해 구조된다.

 

페리스는 그제야 알 살림 제거를 위해 자신이 무고한 사업가 사디키를 미끼로 사용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마저 미끼로 사용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페리스의 연인 아이샤를 납치한 것은 알 살림이 아니라 요르단 정보국장 알 살라암이었다.

 

고기가 미끼를 따먹기 전에 낚아채어 잡으면 최상이겠지만, 대개 미끼는 고기밥이 될 뿐이다. 알 살라암이 한발자국만 늦게 나타났어도 자신의 시체가 사디키처럼 어는 쓰레기 하차장 쓰레기 더미 틈에서 썩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전율하고 깊은 상념에 빠진다. 타의에 의해 낚시 바늘에 매달린 미끼 신세가 되어보지 않고는 미끼의 마음을 알 수 없다.

 

 

페리스도 수많은 결과주의자(Consequentialist) 중 하나였지만 그 자신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고서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The end justifies the means)’는 ‘결과주의’의 비정함을 깨닫는다. 누구든 국익이라는 결과와 목적을 위해 자신이 희생돼야 한다면 ‘결과주의’가 과연 합리적이라고 승복하는 건 쉽지 않다.

 

어떠한 목적도 그 수단이 자신의 희생 위에서 달성되는 것이라면 그 어떠한 목적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생명과 재산, 가족이 국가의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결국 페리스는 사표를 던지고 어지러운 요르단 거리로 사라진다.

 

“열심히 하는 것은 의미 없다. 잘 해야 한다” “강한 놈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놈이 강한 것이다”는 말들이 지혜의 말씀처럼 횡행한다. 모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결과’로 말하라는 결과지상주의적 말씀들이다. 학생은 성적과 합격이라는 결과를 위해, 직장인은 생존과 승진을 위해, 정치인은 당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 사회다. 결과지상주의는 페리스와 같이 수단으로 전락한 희생자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국익’ ‘국가안보’ ‘경제발전’이라는 궁극적 결과를 위해서 희생을 강요하고 당연시한다. 무고한 수많은 ‘사다키’와 ‘페리스’를 죽음으로 내몰고라도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결과지상주의 사회에서 소외되고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페리스가 국가와 CIA라는 조직을 버리고 요르단 속으로 숨듯 세상을 떠나버리거나 세상을 등지고 몸을 숨긴다. /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