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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물고 번져 간 헛소문, 건륭 출생의 비밀(2)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68)...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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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14  0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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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사(正史)의 기록을 보자. 그 두 편액은 강희제가 쓴 것이다. 『청사(淸史)․진원룡전』에 보면 강희 39년 4월 황제가 대신들을 조견할 때 신이 나서 “그대들 집에 각기 당호(堂號)가 있을 텐데 자기 말이라도 상관없다면 짐이 글씨를 내리려 하오”라고 했다.

진원룡은 자신의 노부가 이미 80세를 넘겼는데 자부에게 효도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황상에게 ‘원일당’ 세 글자를 내려 주십사 요청하니 강희제는 호쾌하게 일필휘지로 편액을 썼다고 돼 있다. 『해녕주지(海寧州志)․열녀전』에 보면 진세관의 종조부 진방언(陳邦彦)이 어릴 적에 부친을 여의어 그의 모친 황(黃) 씨는 41년 동안 수절하면서 아들을 재목으로 키웠다.

진 씨 가문이 영광스럽게 된 후 강희제는 자모의 희생정신을 높이 사 친히 ‘절효(節孝)’ 두 글자를 써 하사했고 ‘춘휘당’이란 편액을 써서 진 씨 집안에 내렸다고 돼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진 씨 집안의 편액은 건륭의 출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건륭은 과연 진 씨 집안의 아들일까? 그들의 출생 기록을 보면 기본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먼저 황실 쪽을 보자. 옹정제는 10명의 황자와 6명의 공주를 낳아 길렀다. 건륭제는 강희 50년(1711)에 태어났다. 당시 옹정제는 34살이었다. 이 이전에 4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그중 3명은 요절했다. 그러나 어린 황자 홍(弘)은 이미 8살이었고 다른 비 경(耿) 씨도 회임한 지 5개월여나 됐다. 아들인지 딸인지도 아직 모를 때인데 다른 집안 아들과 바꿔치기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청대에 황자 황손이 탄생하면 엄밀하게 조사해 점검하고 황제에게 알리는 순서가 확고하게 정립돼 있었는데 누가 감히 투량환주(偸梁換柱)할 수 있겠는가? 포대기 바꿔치기에 성공했다손 이후에도 옹정제는 여러 황자들을 낳았는데 자신의 친생자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지 않고 빌려온 다른 아들에게 존귀한 황위를 물려줬다면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그럼 진 씨 집안의 혈통을 보자. 『해녕발해진씨종보제오수(海寧渤海陳氏宗譜第五修)』와 『서건학가보(徐乾學家譜)』를 찾아보면 진원룡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죽은 뒤 17년 후에 건륭제가 태어났다. 진 씨 집안의 딸 둘도 건륭제보다 20여 년 앞에 태어났다.

어떻게 아이들을 바꿔치기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건륭제가 태어난 그 해에 그의 첫 번째 아내 송(宋) 씨는 이미 50세였고 그해 9월에 병사했다. 진원룡의 2명의 첩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두 집안이 동시에 아이를 낳고 남녀를 바꿔치기 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렇듯 건륭제가 진 씨 집안의 아들이 아니라면 어째서 진 씨 집안을 중히 여기고 총애를 했을까? 이는 그 해에 절강(浙江) 해당(海塘) 공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당 공사란 전당강(錢塘江) 일대의 경제발전과 사회 안정을 도모하는데 관련된 큰 사업이다.

강희제 때 전당강 해구의 해조(海潮)는 늘 화근 덩어리였다. 옹정제 초기 해당을 부설하는 공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옹정제는 황제의 자리를 공고히 하느라 바빴다. 서북(西北) 전쟁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공사 과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공사가 기틀이 잡힐 때 쯤 옹정제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건륭제가 등극한 후 의사일정에 잡혀 있어 그는 6차례 남순(南巡) 기회를 빌려 4차례나 해녕으로 시찰을 나갔다.

황제가 지역을 순시하면 체통이 있는 집안에 머무는 게 이치였다. 현지에서 가장 명망이 있는 가문이 바로 진 씨 집안이었다. 진 씨의 저택은 삼엄했고 호화롭게 장식돼 있었다. 그리고 진 씨 집안에서 공부상서를 지낸 인물들이 많았다. 진원룡 본인도 수리 공사의 전문가였기에 해당 공사와 관련된 문제를 묻기에도 좋았다.

그렇게 진 씨 저택은 자연스레 건륭제의 ‘행궁의 최적지’로 선택됐다. 건륭제도 안락하게 머물 수 있었으니 진 씨 집안을 인정하게 됐다. 이후 해녕으로 순시를 나갈 때마다 진 씨 저택에 머물렀다. 분명한 것은 건륭제가 4차례나 해녕으로 왕림한 것은 결코 “친부를 확인하러 간” 것이 아니고 해당 공사를 답사하러 간 것일 따름이었다.

   
 
건륭제의 출생에 대해 야사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건륭제가 이(李) 씨라는 궁녀가 낳았다는 것이다. 그 궁녀의 이름은 이금계(李金桂)로 나이가 27세가 됐으나 아직 출가하지 않고 있었다. 원래 피서산장(避暑山莊) 행궁의 거친 일을 담당하던 여자 하인이었다. 곤궁한 집안 출신으로 부모 모두 일씩 세상을 떠났고 형제자매도 없었다.

강희 49년, 옹(雍)친왕의 넷째 아들 윤진(胤禛)은 황부 강희제의 명을 받아 승덕(承德) 피서산장으로 함께 임행했다. 1년에 한 번씩 거행되던 ‘목란추수(木蘭秋狩, 황제의 사냥터인 목란위장(木欄圍場)에서 가을에 황제가 신하들과 행하던 수렵 행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젊은 옹친왕은 어느 날 아무 할 일이 없자 자기 왕부의 머슴애를 데리고 산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거지우(아격구(阿格鳩)) 위장에서 사냥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큰 사슴이 정면에서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옹친왕이 급히 화살을 활시위에 걸고 활을 쏘아 사슴을 맞혔다. 부황에게 진헌해 강희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머슴애에게 사슴뿔을 자르라 명하고 한편으로는 신선한 사슴피를 한 사발 가져오라고 한 후 단숨에 들이켰다. 그것은 만주족 풍습이었다. 신선한 사슴피를 가장 좋은 보양강장제로 여겼다.

옹친왕이 사슴피를 마시자 과연 기운이 솟는 게 아닌가. 일시에 얼굴이 붉어지고 욕정에 불탔다. 영리한 머슴애가 상황을 보고 옹친왕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직감했다. 산장 옆에 있는 조용한 초가집으로 옹친왕을 데리고 가 잠시 쉬고 있으라 했다.

얼마 없어 머슴애가 궁녀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욕정에 불타고 있던 옹친왕은 자세히 보지도 않고 일을 끝냈다. 일을 마친 후 자세히 살펴보니 그 궁녀의 용모가 너무나 추한 게 아닌가. 그래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 원래 머슴애에게 어째서 미녀를 데려 오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려 했지만,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위장에서 어찌 미녀를 쉽게 찾을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왕야(王爺)의 신분으로 그런 풍류는 다반사로 큰 일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뜻밖에 일이 생겨 버렸다. 이듬해 여름, 강희제는 왕공 버일러(패륵(貝勒)), 황자 왕손을 데리고 승덕 목란위장으로 피서 겸 사냥을 떠났을 때 못생긴 궁녀 이금계가 회임했다고 보고받았다. 황가(皇家)의 금지에서 어떤 미친놈이 대담하게도 궁녀를 건드려 임신을 시켰단 말인가? 즉시 사람을 파견해 알아보게 했다.

이금계는 외인과 야합한 것이 아니라 넷째 왕야의 핏줄이라 했다. 줄곧 정인군자라 자임했던 옹친왕은 그제야 아무 말도 못하고 사실이라 시인했다. 오래지 않아 이금계는 조그마한 초가에서 하얗고 통통한 아이를 낳았다.

생모는 추하고 비천했으나 그의 부친은 황족의 고귀한 후손이니 용종의 일맥임에랴. 윤진의 생모 덕비(德妃)와 국구 롱코도(Longkodo, 융과다(隆科多))가 너그러이 용서해 줄 것을 청하고 윤진 자신도 부황에게 잘못을 인정해 용서를 빌었다.

강희제는 줄곧 자비를 마음속에 담고 있었고 또 하얗고 통통한 황손을 보니 일시에 용안가득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더는 넷째에게 죄를 묻지 않고 그저 왕야의 신분을 망각한 “가장 저질”이라 책망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씨 모자를 황부로 데리고 가 부양하도록 했다.

그러나 옹친왕은 이 씨의 추한 모습을 싫어해 왕부로 데리고 가지도 않았고 아무런 신분도 내려주지 않았다. 그저 사자원(獅子園) 서쪽의 소나무 숲 깊은 곳에 안식처로 삼도록 집을 지어 주었을 뿐이었다.

   
 
야사에서는 매우 생동감 있게 그려내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지만 정사에서는 그러한 것들 모두 허구일 뿐이다. 건륭제의 생모 니오후루(Niohuru, 뉴호록(鈕祜祿)) 씨는 만주 양황기(鑲黃旗) 출신으로 4품 전의내(典儀內)대신 링주(LingZhu, 능주(凌柱))의 딸이다.

고귀한 성씨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난한 집 출신이라 옹정제가 등극하기 전에는 거거(格格, 만주어로 아가씨 뜻이나 나중에는 군주와 버일러의 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됐다)라고만 불렀다. 홍력(弘歷)을 낳은 후에도 측복진(側福晉, 복진은 높은 지위의 부인에 대한 호칭, 만주어)에도 봉해지지 않았다. 옹정제가 황위에 등극한 그 해 연말에서야 희비(熹妃)에 봉해졌고 오래지 않아 희귀비(熹貴妃)로 승급하게 된다.

그녀의 보배 같은 아들 건륭제가 등극하자 숭경(崇慶)황태후에 봉해지고 자녕궁(慈寧宮)으로 거처를 옮긴다. 황태후의 출신이 그리 대단하지 않은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건륭제가 비천한 궁녀 소생으로 믿었던 것은 아닐까? 황태후의 명성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리에 밝았고 일반적이 만주족 부녀자들이 갖고 있는 소박하고 건전한 삶을 살았다. 그녀와 건륭제는 사이가 좋았고 건륭제도 무척이나 자신의 친모를 존경했고 효도를 다했다.

니오후루 씨가 숭경황태후에 봉해졌을 때의 나이가 44살이었다. 슬하에 건륭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떠들썩한 것을 무척 좋아했다. 건륭제는 그녀가 심심할까봐 태후를 자녕궁에 머물게 하고 자주 어원(御園)으로 건너갔다.

매년 새해가 되면 태후를 궁으로 모시고 와 설을 쇘고 정월 대보름 전에 원명원(圓明園)으로 돌아갔다. 건륭제가 황태자로 있을 때 머물렀던 장춘선관(長春仙館)에 거주했다. 태후는 나이가 많아 정월 말쯤이면 창춘원(暢春園)으로 돌아갔다.

봄이 되면 어원(御園)에는 작약과 산도가 만개했고 여름이면 복해(福海)에는 붉고 하얀 연꽃이 하늘거렸으며 용주(龍舟) 경기가 벌어졌다. 가을이면 향산(香山)에 단풍이 붉게 물들었고 겨울에 북해(北海)가 은백색으로 뒤덮이면 예로부터 거행됐던 ‘빙희(氷嬉, 겨울 궁정 체육활동, 중국 북방민족의 전통적 체육활동이 전해져 내려옴)’가 열리면 건륭제는 태후와 함께 관람했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이러한 광경은 건륭제의 시가 속에 여러 차례 묘사됐다. 모자가 함께 있지 못할 때에는 건륭제는 나이 많은 노모에게 어떻게 효도를 해야 할까를 마음에 두고 한 시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민간에서 건륭제를 둘러싼 소문들이 그렇게도 많은 것을 보면 사람들은 건륭제를 위엄 있는 황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멋을 알고 호방한 부잣집 도련님처럼 느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진짜든 거짓이든 건륭제가 개성이 넘치고 매력적인 황제였음을 설명하는 것은 아닐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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