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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67)...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건륭(乾隆, 1711~1799), 이름은 현엽(玄燁), 옹정(雍正)의 셋째 아들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기억력이 대단히 뛰어나 강희(康熙)제의 사랑을 받았다. 즉위 후 여러 차례 중가얼(Junggar, 준갈이(准噶爾)), 대소(大小) 금천(金川, 사천(四川) 대도하(大渡河) 유역)을 공략해 귀속시켰고 안남(安南)을 정벌하면서 청 왕조의 안녕을 가져왔다.

 

조정 대사를 처리함에 있어 현재(賢才)를 중용하고 강온병행정책을 썼다. 노역을 줄이고 세금을 낮추었으며 수로를 준설해 백성을 편안케 하도록 애썼다.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불렀다. 건륭 65년 황위를 가경(嘉慶)에게 양위해 태상황에 올랐다.

 

건륭제는 중국 역대 제왕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이다. 60년간 재위했다. 거기에다 태상황 3년을 더하면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권력을 누렸다. 건륭제는 일생동안 부귀영화를 누렸고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으나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그리 영광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옹정제가 조포계(調包計)를 써서 해녕(海寧) 진(陳) 씨의 아이와 바꿔치기 했다고 하기도 하고, 그의 모친은 존귀한 집안 출신의 여인이 아니고 열하(熱河) 행궁의 궁녀라 하기도 한다. 건륭 출생을 둘러싼 안개는 전해지면 전해질수록 더 기이해져 역사적 진실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절강(浙江) 해녕 진 씨 집안은 강남의 권문세가로 호족 중 대호족이었다. 청 왕조 황실과 신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청 왕조 말기 사회에 “청 왕조의 황제는 절강 해녕 전 씨의 아들”이라는 전설이 유행했다.

 

소설가 김용(金庸)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은 바로 이런 이야기가 중요한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김용의 소설에는 당시 강호 최대 방회(幇會, 결사(結社)) 홍화회(紅花會)의 수령(총타주(總舵主)) 우만정(于萬亭)이 비밀리에 궁에 들어가 건륭제의 생모 진세관(陳世倌) 부인의 편지를 건륭에게 건넨다.

 

편지 속에는 건륭의 출생 과정이 상세히 기술돼 있었다. 그리고 건륭의 왼쪽 허벅다리에 있는 붉은 반점이 그 증거라고 했고. 우만정이 떠난 후 건륭은 젖을 먹이며 자신을 기른 유모 요(廖) 씨를 비밀리에 불러 알아보았다. 결국 자신의 출생의 진상을 알게 됐고. 그 비밀은 다음과 같다 :

 

강희 50년 8월 13일, 넷째 황자 윤진(胤禛, 옹정제)의 측비(側妃, 청 왕조 황비 중 지위가 원비(元妃), 대비(大妃)아래 서비(庶妃) 위) 니오후루(Niohuru, 뉴호록(鈕祜祿)) 씨가 순산했는데 원래는 ‘딸’이었다. 오래지 않아 대신 진세관의 부인이 같은 날 출산했다는 말을 듣고는 갓난아이를 데리고 같이 입궁하라고 명했다. 어찌 생각이나 했을까, 궁으로 안고 간 아이는 ‘아들’이었는데 나오고 보니 ‘딸’로 바뀌어 있었다. 진세관은 넷째 황자가 애기 포대기를 바꿔치기 했음을 알았지만 감히 누설할 수 없었다. 이른바 ‘투용환봉(偸龍換鳳)’(용을 훔쳐 봉황으로 삼다)의 계책이라는 말이다.

 

어찌 자식이 바뀌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당시 강희의 여러 아들들은 황위를 놓고 목숨을 건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아귀다툼은 아닐지라도 암투를 벌이고 있었으니 온갖 극악무도한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은 당연했다. 각기 대신들을 끌어들여 암암리에 패거리를 형성하고 있었다.윤진은 부황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형제 중 윤당(胤禟), 윤사(胤禩) 등의 재능이 자신보다 못하지 않았고 세력이 엇비슷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황제가 황태자를 선택할 때 여러 황자들보다도 재능이 있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황태자의 아들도 고려해야 했다. 황태자를 세우는 일은 만년지계일지니, 황태자가 죽으면 황손이 황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영명하지만 황손이 우둔하다면 결코 장기적인 계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당시 윤진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나약하고 무능해 조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윤진은 그것이 약점임을 잘 알고 아들 하나가 더 태어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태어난 것이 ‘딸’이었으니. 윤진은 아무 것도 필요 없었다. 무조건 황제가 돼야만 했다. 공교롭게도 진세관이 아들을 낳았다. 억지로라도 바꿔치기 해야 했다. 윤진이 여러 황자 중 가장 악랄했으니, 진세관이 어찌 감히 떠벌릴 수 있었겠는가? 그 홍력(弘歷)이라 이름을 지은, 바꿔치기한 아이가 바로 건륭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김용은 자신의 쓴 소설 내용을 회상하면서 어릴 적부터 건륭제가 한족(漢族) 집안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내용을 자신이 별 뜻 없이 소설로 창작했다고 했다. 이로 보면 위와 같은 전설이 민간에서는 대단히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위로는 관료 진신에서부터 아래로는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의심치 않고 굳게 믿고 있었다. 

 

 

진 씨 집안은 명(明), 청(淸) 왕조 몇 백 년 동안 부귀를 누렸다. 끊임없이 조정 중신을 배출했다. 명대 중엽 진 씨 집안은 이미 현지의 부유한 학자 가문이었다. 진 씨 집안은 강희 연간에 두 번이나 부자 형제 3인이 함께 과거에 급제했다.

 

강희 42년(1703)에 진원룡(陳元龍)의 동생 진숭(陳崇), 조카 방언(邦彦), 진선(陳詵)의 아들 진세관(陳世倌) 세 사람이 함께 과거 급제했다. 강희56년(1717)에 진원룡이 두 아들과 종손 진무영(陳武嬰) 세 사람이 또 함께 급제했다. 중국 과거제도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한 인재를 배출했으니 진 씨 집안이 유명해진 것은 당연했다. 진 씨 집안은 강희, 옹정, 건륭 3대에 걸쳐 벼슬을 했고 부자, 숙질 3명도 대신들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앉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중 두 명은 시독학사(侍讀學士)를 지냈으니 황제 일가와의 관계가 범상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야사(野史)의 기록에 보면 옹정제 윤진(胤禛)이 황태자가 됐을 때 해녕 진 씨와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았다고 돼 있다. 두 집안의 왕래가 대단히 빈번했다고 한다. 어느 해, 두 집안은 아이를 낳았는데 공교롭게도 난생난일이 똑 같았다. 윤진은 기뻐하며 아이를 데리고 왕부로 놀러오라 명했다. 그런데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집안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기 집안 아이는 ‘남자’였는데 ‘여자’로 뒤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 씨 집안은 오랜 기간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상황을 명확히 추론해 보고는 추궁하거나 떠들 수 없는 상황임을 직시하고 함구했다. 얼마 없어 강희제가 죽고 윤진이 즉위하자 진 씨 가문 출신이 요직을 많이 맡았다. 옹정제가 죽은 후 건륭제가 즉위했으니 커다란 은혜를 받아 전례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는 말이다. 건륭은 일생동안 여섯 차례 남순(南巡)해 강소(江蘇)와 절강(浙江)을 돌아보면서 네 차례나 해녕 진 씨 집안을 방문했는데 이는 가세(家世)를 묻기 위함이었다고 했고…….

 

다른 이야기도 있다. 진 씨 집안에서 아들을 안고 옹(雍)친왕 황부로 갔을 때 왕의 비(妃)가 옹정제도 모르게 바꿔치기 했다고 하기도 한다. 건륭제가 성년이 돼 즉위한 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자신의 출생 비밀을 얻어들었다. 아무로 몰래 진세관과 용모와 자신을 대조해 보니 무척이나 닮았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도 자신이 진 씨의 아들이 아닐까 의심했다고 한다. 자신의 출생 비밀을 확실히 알고 싶어 특별히 강남으로 내려가 암암리에 조사를 벌였고, 마침내 숨겨진 비밀을 확실히 알게 됐다고 하고.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건륭제는 이미 자신이 만주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기도 한다. 건륭제는 자신이 한족이라는 것을 알고 궁에서 늘 한족 복장을 입었다. 어느 날 그는 한족 옷을 입고 주변의 신하들에게 “어떤가? 짐이 한족을 닮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한 노신이 무릎은 꿇고 “황상께서는 한족을 닮았습니다. 만주족하고는 닮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건륭은 자신이 한족 출신이라는 전설을 굳게 믿고 만주족들 모두 한족 옷으로 갈아입게 할 마음을 갖게 됐다고 하기도 한다.

 

 

진 씨 저택에는 편액 두 개가 걸려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건륭제가 친히 어필을 하사한 것이라 했다.

하나는 ‘원일당(爰日堂)’이라 쓰여 있고 하나는 ‘춘휘당(春暉堂, 춘휘는 모친의 자애를 상징)’이라 쓰여 있다. 한(漢)대 양웅(揚雄)의 『효지孝至』 중 “효자원일(孝子爰日, 원일은 시기를 늦추지 말라 뜻)”이 출처이고 다른 하나는 당(唐)대 맹교(孟郊)의 『유자음游子吟』에서 따온 것이다. 편액의 내용을 보면 모두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하는 뜻을 담고 있다. 만약 건륭제가 진 씨 집안 출신이 아니면 어째서 이런 알 듯 모를 듯한 문장을 써줬겠는가? 그래서 당연히 건륭제는 한족이라는 말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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