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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회]환자를 보면 병을 꿰뚫어 알아낸 '관형찰색'의 대가 진국태

 

한림지역에서는 월계라는 말이 흔하게 쓰인다. 월계정사와 월계천 그리고 도로명 월계로, 특히 월계 진 좌수의 전설도 그중 하나다.

 

한림읍 명월리에 의술이 뛰어난 진 좌수(座首)란 사람이 살았다. 그의 이름은 국태(國泰)고, 호는 월계(月溪)다. 국태가 서당에서 글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 길가에 있던 숲이 사라진 자리에 큰 기와집들이 생겨나는 게 아닌가. 방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사랑방 문이 열려있는 집을 소년은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향긋한 냄새가 풍겨오더니 예쁜 처녀가 소년에게 손짓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처녀는 다정히 소년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가며 ‘나하고 구슬놀이를 하자.’ 하고는, 예쁜 오색구슬을 입에 물어 굴리고 있었다. 소년은 구슬을 굴리는 처녀의 입술이 너무 예뻐서 정신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입안에서 굴리던 구술을 소년의 입에 넣어주었다. 소년은 예쁜 처녀와 노는 것이 즐거웠다. 혼자 어두운 길을 가는 데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옆에서 같이 가는 것 같았다.

 

그 후에도 소년은 서당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기와집 사랑방에서 처녀와 구술놀이를 하곤 했다. 소년은 글공부도 싫어지고 모든 일에 싫증이 났다. 훈장은 이를 눈치채고는 소년에게 물었다. 훈장은 소년의 이야기를 듣더니 무릎을 쳤다.

 

‘너는 여우에게 홀린 거야. 다시 그 기와집에서 처녀가 구슬을 입으로 넘겨주거든 몇 번 굴리는 척하다가 꿀꺽 삼켜버리고, 그 즉시 하늘을 쳐다본 다음 땅을 보고 사람을 보거라. 명심해야 한다.’ 그날도 처녀와 구술놀이를 하던 중 그에게 구슬이 왔을 때 꿀꺽 삼켜버렸다.

 

그 순간 기와집이 사라지더니, 처녀는 꼬리가 아흔아홉 개 달린 여우로 변해서 그에게 달려드는게 아닌가. 소년은 겁이 나 ‘사람 살려’ 하고 외치고는, 하늘과 땅을 볼 겨를도 없이 내달렸다. 숨어있던 훈장이 나타나서 몽둥이로 내려치자 여우가 도망쳤다. 훈장이 하라는 대로 했는지 묻자, 소년은 ‘너무 겁이 나 하늘과 땅을 보는 것은 잊어버리고 살려줄 사람만 찾다보니 선생님만 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쉽구나. 하늘과 땅을 보았더라면 세상 이치를 다 통달했을 텐데, 사람만 보았다니 자네는 의술만은 통달하겠네. 내일부터 서당에 오지 않아도 좋네. 내 가르칠 것은 전부 가르쳐주었으니….”

 

 

어느 날 진좌수가 제주목안에 볼일이 있어 말을 타고 가다, 길가 집안에서 대성통곡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집 며느리가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타고 온 말을 대문가에 매어두고 마당으로 들어선 진좌수가 진맥을 하려 하자, ‘이미 숨이 멎은 지 오래인데 진맥을 한다고 살아날까요?’ 하고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싸늘해진 산모의 팔뚝을 걷어 맥을 짚은 진좌수가 여자의 복부에 침을 놓곤, 방을 나서며 ‘조금 기다리면 숨이 돌아와 깨어날 것이고, 아기도 순산할 것이요.’ 하고는 자리를 떴다.

 

한참 길을 가는 데 말을 탄 산모남편이 오더니 큰절을 하며, 아내가 살아나서 순산했다고 알렸다. 그리고 죽은 산모가 어떻게 살아 났는지를 묻자, ‘아기가 왼손으로 산모의 숨통을 막아버린 것이요. 가서 갓난아기 왼쪽 손가락이나 보시오.’라고 말하고는 말을 달렸다. 남편이 집으로 돌아와 아기의 왼손가락을 보니, 침에 찔려 피가 나고 있었다. 숨통을 막은 아기 손에 침을 주어 떼어 놓으니 아기를 순산하고 죽은 산모가 살아난 것이다.

 

당시 한양에서는 임금이 등창병이 나서 팔도의 명의들을 불러들였다. 진좌수의 명성을 익히 아는 전라감사가 그를 추천하였다. 가난한 진좌수는 허름한 옷차림으로 궁중에 들어갔다. 잠시 후 어떤 사람이 황급히 오더니 ‘이 정승 댁 마님이 길쌈을 짜다 죽어가니 약방문을 내어달라.’라고 간청했다. 팔도의 명의들은 방문을 내놓지 못했지만, 진좌수만이 ‘쌀 일곱 알을 물에 담가 먹이시오.’ 하고 간단히 처방을 내놓자, 다른 의원들은 미친 녀석이라고 웃어댔다. 지푸라기라도 건지려는 듯 집사는 그 처방을 갖고 돌아갔다.

 

몇 시간이 지나고 그 집사가 와서는 ‘의원님 덕분에 마나님이 소생했습니다.’ 하고 진좌수를 청해 갔다. 대감이 진좌수를 극진히 대접하고는 임금님께 데려갔다. 진좌수는 곧 약방문을 내어, 집 처마에 있는 거미집과 거미 일곱 마리를 잡아 찧어서 임금님 등에 붙여 드렸다. 3일이 지나 임금님의 등창병이 완쾌되었다.

 

영조임금은 그의 의술을 높이 칭찬하고 궁중에서 벼슬을 하라고 하였으나, 진좌수는 사양하고 귀향하려 하자, 임금께서는 ‘본인이 그렇게 사양하니 할 수 없구나. 좌수 직함이라도 내려라.’ 하고 하명하였다. 그래서 이후부터 진좌수가 된 것이다(좌수는 조선시대 지방 자치기구 인 향청의 우두머리이다.).

 

의술이 신의 경지에 이른 진좌수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어렵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었다. 제주선인들은 허준에 버금가는 의원을 제주에서도 만나길 소원했을 것이다.

 

한림읍 금능리에는 비지정문화재인 조롱굴이 있다. 이 굴은 진좌수와 관련한 전설이 얽힌 굴로, 위에서 소개한 여인이 진좌수를 조롱하면서 들락날락하던 굴이라 하여 조롱굴이라 불렸다 한다. 명월과 금능리 사이에 살았던 실존인물인 진좌수는 두모리에 있는 한문서당에 다녔다. 명의와 신의라고도 불렸던 진국태의 묘는 한림읍 명월리 지경에 안치되어 있다. 진국태에 대한 기록은 여러 서책에서 찾을 수 있는데, 1653년 당시 제주 전적 고홍진의 감교로 완성된 이원진의 증보탐라지에도 실려 있다.

 

938년부터 1000년 동안 탐라의 역사를 기록한 심계 김석익의 탐라기년에는 당대 제주에서 손꼽히는 인물로 탐라4절이 있었는데, 풍모에 양유성, 풍수지리에 고홍진, 복서점술에 문영후, 의술에 진국태였다.

 

명의 진국태는 자세한 진찰 없이도 환자를 보는 순간, 병을 꿰뚫어 알았다 한다. 이런 능력을 한의학에서는 관형찰색(觀形察色)이라 부른다. 동양 전통의학을 숭상하던 시대에서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관형찰색의 대가가 바로 진국태였던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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