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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66)...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옹정(雍正, 1678~1735), 이름은 윤진(胤禛), 강희(康熙)제의 넷째 아들이다. 자태가 위용 있고 행동거지가 단아해 부황의 사랑을 받았다. 강희 37년에 버일러(Beile, 패륵(貝勒))에 봉해졌고 48년에 옹왕(雍王)에 봉해졌다. 형제들과 황제 자리를 다투는 과정에서 신중하게 행동했고 기묘한 수단으로 마침내 우위를 점해 대통을 이었다.

 

그가 등극한 후 관리의 품행과 치적을 깨끗하고 투명하게 했고 탐관오리를 주살해 조정을 준엄하게 만들었다. 그는 정무를 열심히 했고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반란을 평정하고 러시아와의 국경선을 획정했다.

 

옹정 13년(1735) 원명원(圓明園)에서 급사했다. 넷째 홍력(弘歷)에게 황위를 물려줬다. 익호는 헌(憲)이요 태릉(泰陵)에 묻혔다.

 

1735년 옹정 황제는 북경의 교외지역 원명원에서 갑자기 죽었다. 옹정 황제의 사인에 대해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의견은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상유내각上諭內閣』과 『주비유지朱批諭旨』 등 공문 기록에 근거하면 옹정 7년(1729) 겨울부터 옹정제가 큰 병을 얻었고 옹정 9년(1731) 가을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못했다. 오한과 신열이 계속됐고 음식을 잘 먹지 못했으며 불면에 빠졌다.

 

도대체 무슨 병이었을까? 태의(太醫)도 확신하지 못했다. 옹정제는 전문경(田文鏡), 이위(李衛), 얼타이(Orta, 악이태(鄂爾泰)) 등 심복들에게 비밀리에 유지(諭旨)를 내려 좋은 의사를 추천하도록 했다. 이후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으나 몸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옹정 13년(1735) 음력 8월 20일 홍정제는 병세가 악화됐지만 업무를 멈추지 않았다. 23일 밤 병세는 격화돼 보(寶)친왕 홍력(弘歷), 화(和)친왕 홍주(弘晝), 장(莊)친왕 윤록(允祿), 예(禮)친왕 윤례(允禮), 그리고 대학사, 내대신 등 여럿을 불러 모아 ‘유조(遺詔)’를 내린 후 새벽에 붕어했다고 한다. 옹정제가 병으로 죽었다는 관점은 조리정연하다. 심지어 옹정제는 ‘중풍’으로 쓰러져 죽었다고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옹정제가 사망한 그날 밤에 대해 보화전(保和殿) 대학사, 한림원 장원(掌院)학사, 군기대신, 이부상서 장정옥(張廷玉)의 『자정연보自訂年譜』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옹정 13년 8월 22일 밤. 물시계가 이경(二更, 밤 아홉 시부터 열한 시 사이)을 알렸다. 음랭한 가을바람이 갑자기 일더니 처마와 나뭇가지를 스쳐지나갔다. 흩어져 있던 자질구레한 마른 나뭇잎들이 빙빙 도는 소리와 적막하며 공허한 격자창이 여닫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장정옥은 막 눈을 감았다. 갑자기 대택 정문 방향에서 ‘탕탕’ 문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란스러움 속에서 귀를 찌르는 높고 가는 목소리였다. “황상의 명이요! 장대인은 즉시 궁으로 들라하십니다!” 장정옥은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허둥대며 이불을 밀어재치고 옷을 걸친 후 몸을 돌려 바닥으로 내려섰다. 장화를 신고 손으로 고리를 채우고서는 급히 밖으로 뛰쳐나가면서 생길 수 있는 모든 변고들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궁금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흔들거리는 등롱이 비추는 하늘하늘 부서지는 어두운 불빛 아래서 장정옥 일행은 원명원을 향해 황급히 달려갔다. 원명원 서남문에는 서너 명의 태감이 목을 빼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정옥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 태감 두 명이 안으로 달려 들어가 보고했다. 남아 있던 태감들은 장정옥 등을 곧장 침궁(寢宮)으로 안내했다.

 

침궁의 불빛은 밝았다. 태의와 내시만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계단 아래에는 사람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중얼중얼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새까맣게 늘어서있었다. 장친왕, 과(果)친왕, 대학사 얼타이, 펀선거(Fenšengge, 풍성액(豊盛額)), 나친(Nacin, 납친(訥親), 혹은 (納親)), 내대신 하이왕(Haiwang, 해왕(海望))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했다.

 

장정옥은 생벼락 맞은 듯 몹시 놀랐다. 결코 생각지도 못했다, 깊은 밤에 불러 모은 까닭이 “황상의 질병이 극에 달했다”는 것임을. 낮에 일상적으로 정무를 봤던 옹정제가 놀랍게도 임종의 마지막 고비였다!

 

장정옥과 여러 대신들은 순번에 따라 두 줄로 서서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침궁의 침대 앞으로 나아가 삼고구배하며 황상의 평안을 축원했다. 촉광이 어두웠다. 위장이 겹겹이 쳐있었다. 침상 위의 옹정제는 안쪽을 향해 누워 있었다. 머리를 볼 수 없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러 대신들을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긴장되고 우려하는 마음으로 몸을 굽힌 채 나와 계단 아래에서 소식을 기다렸다.

 

갑자기 궁문이 활짝 열렸다. 우는 듯 참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행황제 용가가 승천하셨습니다.” 여러 대신들은 마음속으로는 이미 준비됐지만 부음이 흘러나오자 땅에 꼬꾸라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방성대곡했다.

 

혼란 중에도 장정옥과 얼타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소리를 쳤다. “지금 울 때가 아니오! 나라에 하루라도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되는 법이오. 대행황제가 황위를 물려주는 것이 크나큰 일이라 일찍이 밀지를 써 놨소. 우리 둘 이외에 아는 사람이 없소. 그 밀지는 궁중에 숨겨져 있을 것이니 마땅히 꺼내와 대통을 바로 세워야 하오.”

 

“옳소! 그래야 하오!” 마음이 혼란했던 두 왕야(王爺)가 꿈에서 막 깬 듯 총관 태감에게 어찌하여 빨리 옹정제의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라 쓴 밀지를 꺼내오지 않느냐고 책망했다. 총관 태감은 놀라 땅에 무릎을 꿇고 방아 찧듯 고두하며 “노재(奴才)가 죽어야 합니다! 죽을죄를 졌습니다. 대행황제께서 밀지에 대한 일을 알려주지 않아서 노재는 밀지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장정옥은 “대행황제께서 당일 밀지를 밀봉할 때 많이 남지 않았다 생각하시고 외용 황지로 단단히 봉한 후 뒷면에 ‘봉(封)’자를 쓰셨소. 바로 그게 밀지요.” 얼마 없어 총관 태감이 허둥지둥 황색 봉투 하나를 받쳐 들고 나왔다. 여러 대신들이 열고 보니 바로 옹정제가 주필(朱筆)로 친히 건륭(乾隆)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준다는 그 밀지였다.

 

두 번째 설은 옹정제가 단약(丹藥)을 복용해 중독돼 죽었다는 의견이다. 궁중 문서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옹정제는 「소단燒丹」이란 시를 쓰면서까지 단약의 효능에 대해 찬양했고 자신도 평상시에 단약을 즐겨 먹었다. 어떤 때는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얼타이도 하사 받아 복용한 적이 있었다. 하사 받은 자는 1개월 후 “대단히 효능이 있습니다”라고 아뢰어야 했다. 이와 동시에 옹정제는 자양진인(紫陽眞人)을 추숭해 그를 위해 도관을 중건하고 진인이 “금단을 발명했다”고 찬양하기도 했다.

 

궁중에 적지 않은 도사들을 부양했다. 연단(煉丹)하는 이도 있었고 주문을 외는 이도 있었고 안마술(按摩術)을 행하는 이도 있었다. 그는 도사들이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도사 장태허(張太虛), 왕정건(王定乾) 등은 원명원에서 옹정제를 위해 단약을 제조했다. 백 톤이나 되는 연료를 태우면 한 알 한 알 씩 금단(金丹)이 완성돼 나왔다. 옹정제는 다량의 단약을 복용했다. 끝내는 금단 중 유독성분이 체내에 쌓이면서 발작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본다.

 

8월 25일은 옹정제가 죽은 이튿날이었다. 당일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건륭제는 장태허 등 도사들을 쫓아내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옹정제의 사인(死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방증이라 보는 것이다.

 

세 번째 설은 피살됐다고 하는 의견이다. 그렇다면 흉수는 누구인가? 이 또한 일치된 의견이 없다. 그중 많은 야사에서는 옹정제가 여류량(呂留良)의 손녀 여사낭(呂四娘)에 의해 척살 당했다고 돼 있다.

 

여류량은 청나라 초기의 사상가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시도했던 인물이다. 그의 학생이 반청 책동을 하다 실패하자 여류량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지만 그의 친족들은 연루돼 죽임을 당했다. 손녀 여사낭만이 다른 곳에서 모친을 모시고 있었던 관계로 다행히 화를 면했다.

 

그녀는 그 후 명산대찰에 은거하면서 스승을 모시고 기예를 배웠다. 뛰어난 절기를 배워 부친과 조부를 위해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그녀는 궁에 잠입해 마침내 옹정제를 척살했다고 한다.

 

또 옹정제를 모살한 것은 여사낭이 아니고 궁녀와 태감 오수의(吳守義), 곽성인(霍成因)이 옹정제의 학대에 원한을 품고 그가 잠든 틈을 이용해 밧줄로 목 졸라 죽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옹정제는 중풍으로 급사한 것인가, 아니면 맹목적으로 단약을 복용해 중독돼 죽음에 이른 것인가? 그렇지도 않다면 암살을 당한 것인가? 아직까지도 확답할 수 없는 수수께끼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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