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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룡의 '담담(談談)클리닉'(38) 도벽광(盜癖狂) ... 정식 병명 '병적도벽'

 

40대 여성 P씨. 어떻게 오시게 됐냐는 질문에 치료자 눈치를 살피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머뭇거려요. “어떡해요. 제가... 자꾸... 남의 물건을 훔치게 돼요.” 그리곤 울음을 터트려요. 순진(?)한 의사 시절이라면 몰라도 내가 때가 많이 묻어서 그런지 법적 문제가 걸려있는지를 우선 고려하게 됩니다.

 

제 발로 병원에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알려졌거든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훔친 물건의 종류는 무엇이었는지, 훔친 물건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부터 묻게 되죠. “병의 증거”를 찾으려고요.

 

물론 고소를 당했거나 이미 형사처벌 받게 될 상황이었다고 해서 당장 병이 아니라고 배제할 수는 없지만요. 여기서 병은 ‘병적도벽’을 말하는 겁니다. Kleptomania. 19세기 초반 프랑스 의사들이 붙인 용어라고 해요. 한국어로 그냥 직역하면 도벽광(盜癖狂)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정식 병명은 ‘병적도벽’이에요.

 

프랑스 궁중 야사를 보면 남의 물건을 몰래 훔치는 왕들이 꽤 있었나 봐요. 왕의 한 끼 식사비만으로도 수십 개를 살 수 있을 테고, 아니 명령만 내리면 충성스런 신하들이 당장 산더미처럼 갖다 바칠 수도 있는, 왕에겐 별가치 없는 물건을 말이죠. 후세 의사들이 야사를 검토하며 정신병의 일종으로 본 거지요.

 

훔치기 전에 긴장감이 고조 되고 훔치기 직전 최고조, 훔치는 동안 그리고 훔친 직후에 일시에 사라지며 찾아오는 안락감과 만족감. 환자는 도둑질을 하는 것에 대해 아주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어디 가서 그 이야기를 할 수 있겠어요? 상상을 해 봅시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왕을 기독교 신앙의 화신으로 알고 있는데, 왕이 자꾸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게 분명해졌어요. 궁중에서도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명 없던 거죠. 왕이 가장 신뢰하는 최측근 신하가 엄중하게 입단속 시키고 둘이 있을 때 왕에게 넌지시 물어봤어요.

 

“나도 미치겠네. 악마가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고서야 내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 순간 저걸 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상상도 못할 불쾌감이 드는데 기어이 훔치고 나서야 그 불쾌감이 사라진다는 말일세. 솔직히 말하겠네. 물론 훔치는 동안에는 스릴과 쾌감을 느껴. 하나님(오, 할렐루야)께 맹세하건데 물건이 탐이 나서가 아니네. 한번 훔치고 싶다는 생각이 침투, 그래 그 말이 옳겠지. 침투야, 침투. 악령의 침투 말일세. 그 놈이 내 안에 들어온 이상 그 명령을 따르기 전까지는 점점 불안해져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단 말일세. 나도 이러는 내가 싫네. 매번 후회하고 신에게 간절히 기도도 해 보지만 아무 소용없었어. 그 악령이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른단 말일세.” 그 물건들은 어디에 두었습니까. 모두 버렸네. 그깟 시시한 것들을 내가 어디에다 쓰겠나.

 

전형적인 스토리 꾸며봤습니다. 병적도벽 환자를 추적해 보면 몹시 어렵고 불우한 유아기를 보냈다는 보고가 대부분이에요. 어린 시절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많은 상실의 언덕을 건너왔다 말이죠. 그래서 어떤 분석가는 그들이 충동적으로 훔치는 건 아주 어린 시절의 상실들을 되찾으려는 시도라고 말합니다.

 

뭐라고요? 병적도벽 프랑스 왕들도 어린 시절에 그런 상실이 있었단 말이에요? 온연히 믿기 힘들지만, 그 분석가들은 아마도 ‘심리적 상실’의 수많은 증거를 기어이 찾아 낼 겁니다. 자기심리학에선 훔치는 행위는 자기애가 취약한 사람들이 충동을 실행함으로써 그나마 자기(self)의 분열을 막는 정신기제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자기심리학적 치료가 필요한 거라고요.

 

 

미국정신의학회 분류로는 병적도벽(Kleptomania)을 충동조절장애 범주에 넣습니다. 충동조절 장애에는 병적도박(Pathologic gambling), 발모광(털뽑기증, Trichotillomania), 발화광(Pyromania), 간헐적 폭발장애( 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 등이 들어있어요.

 

그 외 기타 항목에 강박적 충동쇼핑(Compulsive Buying), 비디오게임 중독, 섹스중독, 반복적 자해 등이 들어있고요. 열거된 병명들만 봐도 충동, 강박, 중독이 포개지는 부분이 많지요? 맞아요. 침투나 저항의 심리적 특성 뿐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상당한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세로토닌(serotonin) 관련해서 공통의 병리학적 연관을 지니고 있어요.

 

면담에서 P씨는 당장에 닥친 법적 문제도 없었고, 그와 관련해서 병을 가장한다는 심증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불안하고 우울했지만, 우울병과 같은 감정 장애를 앓고 있다고 볼 수도 없었고요. 술을 자주 마시는 것도 아니고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닌데, 술을 마신 날 도둑질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체적으로 훔치는 행위 전후 심리상태 진술과 훔친 물건(돈을 훔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소액이었습니다.)이나 사후 처리에서 ‘병적도벽’ 진단을 붙이는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선 질병 설명부터, 당분간 단주할 것과 약물처방(당연히 세로토닌 조절 약물이죠), 그리고 1주일 후 재방문을 요청했습니다. 악령과 같은 충동에 맞서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것도 사실이지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같이 가보는 거지요.

 

이범룡은?
=제주 출생. 국립서울정신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2002년 고향으로 돌아와 신경정신과 병원의 문을 열었다. 면담이 어떤 사람과의 소통이라면,  글쓰기는 세상과의 소통이다. 그 또한 치유의 힌트가 된다고 믿고 있다. 현재 서귀포시 <밝은정신과>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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