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범룡의 '담담(談談)클리닉'(36) 몽유병, 야경증 그리고 악몽

나뭇가지 혹은 가시에 긁힌 상처, 어디에 부딪힌 듯 멍든 자국. 이게 뭐야? 너 밤에 어디 갔다 왔어? 글쎄, 전혀 모르겠어. 그런데 자다 말고 내가 어딜 가? 하숙집 룸메이트는 이상했다. 한두 번이어야지. 그래, 오늘은 잠을 자는 척하고 지켜보자. 밤중에 이 녀석이 도대체 어딜 가는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알아야겠어.

 

크게 배어먹힌 달이 은은한 밤이었죠. 어디선가 야옹 고양이 소리만 스산하게 들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녀석이 갑자기 부스럭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옷을 입고 집을 나서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 거지? 가만히 방문을 열고 숨죽여 지켜봤지요. 아, 글쎄 창고에서 웬 삽을 들고 나오는 거예요. 뭐, 뭐야. 조용조용 뒤를 밟아 따라 갔지요. 둔한 녀석이 걸음은 왜 저리 빠른지요. 동네 어귀를 지나 산으로. 겁이 바짝. 으악. 공동묘지 쪽 아냐? 엊그제 묻은 묘지 앞에 우두커니.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거예요. 앗, 들켰을까. 잽싸게 돌담에 바짝 붙었죠. 두근두근. 아 글쎄 그 녀석이 삽질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왜 저러는 거야.

 

무서워. 발소리를 죽이고 가만가만 내려오다 걸음아 나 살려라 달음박질을 쳤습니다. 냉큼 하숙집에 돌아와 자는 척 이불 쓰고 누웠죠. 가슴이 콩닥콩닥. 잠시 후에 삐거덕 그 녀석이 돌아왔어요. 실눈으로 봤지요. 우두커니 선 그 녀석은 내가 자는지 살피는 것 같았어요. 내 얼굴 눈앞에서 손짓도 몇 번. “이상하다. 누군가 따라온 것 같았는데...” 으으. 갑자기 “너지!”

 

어릴 때 친구가 실화라고 무서운 이야기를 해 준다며 침을 튀기기 시작했어요. 슬슬 콩닥콩닥. 완전 몰입, 동일시되어 듣는 거지요. 클라이맥스로 다다를 무렵 친구가 갑자기 눈을 똥그랗게 뜨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너지!” 새파랗게 아, 아냐. 나, 나 아냐.

 

독자 분들도 어릴 적에 이렇게 놀래는 장난, 당해보셨어요?

 

 

정식 정신과 병명은 ‘수면보행증’(sleepwalking, somnambulism)이라고 합니다만, 보통은 ‘몽유병’이라고 하지요? 수면장애의 일종입니다. 가령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부지런히 빨래를 하더니 옥상에 올라가 빨래를 너는 거예요, 혹은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로 부지런히 방도 닦고는 다시 자는 거죠. 아침에는 그런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옷이 좀 젖어 있어요. 이게 왜 젖었지? 내가 이 옷을 입은 채로 잤었나? 아닌데.

 

“저도 제가 무서워요. 제가 글쎄...”

 

수면보행증은 숙면(Non-REM 수면) 동안에 일어납니다. 주로 전체 수면의 첫 1/3 기간에 나타난다고 해요. 수면보행은 말 그대로 밤중에 자는 채로 일어나서 어디론가 걸어가는 겁니다. 일어나 옷을 입고 이야기를 하고 소리를 지르고 혹은 운전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돌아와 다시 누워 잠을 자는 거지요.

 

어릴 때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요. 초등학교 4-6학년 때가 가장 많다고 하죠. 심한 피로, 스트레스, 열병 혹은 수면박탈과 관계가 있다고 하지만, 원인은 잘 몰라요. 가족력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유전적 소인이 있는 거지요. 최근에는 미세한 신경학적 이상이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신경학적으로 이미 취약하다는 말이지요. 극심하게 피곤하거나 며칠간 잠을 못 잔 경우에 더 심해집니다. 어찌됐든 스트레스가 심하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순수하게 심리적 요인이 발병요인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몽유병은 아무리 멀쩡하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매우 위험할 수 있어요. 자고 있기 때문이죠. ‘자는 상태’로 옥상에 올라간다거나 운전을 한다?

 

 

며칠 전 초등학교 4학년 아이를 데리고 아빠가 진료실을 방문했어요. 아이가 자다가 일어나 겁에 질린 모습으로 소리를 지르고 식은땀도 흘린다는 거예요. 놀래서 아이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봤지만 반응이 없을뿐더러 더 무서워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아이는 다시 잠을 자는데 아침에는 전혀 기억을 못해요. 이런 경우는 야경증(night-terror)이라고 합니다. ‘악몽’과는 달라요. 악몽(night-mare)은 대게 수면 후반부 REM 수면에서 나타나고 간밤의 꿈을 생생하게 기억하거든요. “무서운 꿈을 꿨구나.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달래주면 잘 자고요. 아이들 경우엔 무서운 영화나 TV프로그램, 혹은 이야기를 듣고 나면 쉽게 악몽을 꾸는 경우가 있잖아요.

 

악몽과는 달리 야경증과 몽유병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상태가 수면 시기(수면 전반부 Non-REM 수면시기), 특성 등에서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소아정신질환의 개념』(조수철)에 따르면, 소아인 경우는 특별한 정신병리와는 관계가 없으나 성인인 경우에는 범불안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분열형 인격장애 또는 경계선 인격장애와 관계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예후는 다양합니다. 소아기 발병인 경우에는 나이가 들면서 점차 사라져서 조기 청소년기가 되면 거의 없어지지만, 성인기에 발병되는 경우에는 만성적인 경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야경증은 노년기에 처음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치매 초기단계에 나타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야경증과는 달리 몽유병은 아무 이유없이 성인기에 처음 발병되는 것은 아주 드물다고 알려져 있어요. 주로 특정한 약물사용과 관계있는 것으로 알려졌고요. 제 경험상 널리 쓰이는 수면제 ‘스틸록스’(성분명 졸피뎀Zolpidem)도 몽유병이 생겼습니다. 아무리 안전하고 좋은 약도 어떤 환자에게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는 거지요. 이런 경우 의사와 상의하는 게 중요합니다.

 

야경증이나 몽유병 에피소드 중에 무리하게 ‘깨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무리하게 깨우는 경우에는 혼란상태가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사고를 예방하는 정도로 조심히 보호하는 정도가 좋겠죠. 소아는 조기 청소년으로 가면서 저절로 좋아진다는 걸 염두에 두고 약물을 쓴다면 보통 바륨(성분명 Diazepam)으로 치료합니다. 성인도 마찬가지인데. 성인은 기존 질병이나 약물사용과 연관 있는 경우가 있으니 의사와 상의해서 치료약물을 선택하고 용량조절 하면 되겠습니다.

 

처음엔 소설처럼 폼 나게 쓰고 싶었는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저 몇 가지 수면장애에 흔하디흔한 정보 글이 돼버렸네요. 총총.

 

이범룡은?
=제주 출생. 국립서울정신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2002년 고향으로 돌아와 신경정신과 병원의 문을 열었다. 면담이 어떤 사람과의 소통이라면,  글쓰기는 세상과의 소통이다. 그 또한 치유의 힌트가 된다고 믿고 있다. 현재 서귀포시 <밝은정신과> 원장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