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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63)...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강희는 확실히 황태자의 능력 배양에 주의를 기울였다. 세 차례 갈단(Galdan) 친정[강희 29년(1690), 강희 35년(1696), 강희 36년(1679)] 기간에 태자에게 도성을 지키며 일상 사무를 처리하도록 명했다.

 

각부 아문의 모든 주장(奏章)을 “직접 상주(上奏)하지 말고 모든 일을 황태자가 듣고 처리토록 하라. 만약 중대하고 긴박한 일이 생겼을 때는 여러 대신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한 후 황태자에게 상주하라”고 했다.

 

강희가 보기에 선조가 남긴 강산과 사직은 결국 황태자에게 넘겨 다스리도록 해야 하니 윤잉을 강하게 가르쳐야 했다. ‘옛날의 승패’, ‘인심향배’, “수성은 마땅히 어때야 하고 군사를 운용함에 필히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 모두 “매우 상세하게 가르쳐야”하기에 하나하나 시의적절한 대책을 직접 일러 주었다.

 

이를 위해 그는 황태자에게 한문과 만주어를 배우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익히게 했으며 경사(經史)를 읽고 서법을 배우게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무일재(無逸齋)에서 독서”를 했는데 “원단 가절의 봉인한 시기에도 멈추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든 훈련은 윤잉의 심신을 파괴했다. 강희와 함께 네 번째 남순(강희 41년, 1702) 도중에 윤잉은 과도한 피로로 인해 병을 얻어 쓰러졌다. 덕주부(德州府)에서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강희 황제는 이후(李煦)에게 준 상주문의 주필 평어에 “뜻하지 않게 태자가 감기가 걸려 병세가 심히 위태롭다” 등의 말을 썼다.

 

윤잉의 병은 일반적인 감기가 아니라 겉에서 낙(絡, 경맥(經脈)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기혈(氣血)의 통로)까지, 그리고 낙에서 속까지 파고들었다. 발병 초기 오한에 열이 나 머리부터 온몸 관절이 시큰시큰 쑤시고 아프다가 마침내 극통으로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윤잉은 출발(9월 27일)하기 전 영청(永淸)에서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제때에 치료하지 못해 경주(景州)에서 덕주(德州)까지 가는 중에 상한(傷寒)의 증상이 나타났다. 토도 하고 설사도 했다. 냉기를 느꼈고 땀도 나지 않았다. 사지가 얼음처럼 차가왔다. 심지어 어떤 때는 온몸을 떨기도 했다.

 

10월 3일, 덕주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젊은 황태자는 이미 의식불명인 상태에 처했다. 윤잉의 병이 위급할 시기에 강희는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치료”하도록 했다. 10월 3일부터 10월 22일까지 20일 동안 그는 밤낮으로 윤잉 곁을 지켰고 태의(太醫)에게 심사숙고해 처방토록 했다. 마침내 황태자의 병세가 수그러지고 위험이 사라졌다.

 

 

황태자의 건강은 회복됐으나 마음속에 남은 고통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다른 황자들과 비교했다. 자신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일재에서 힘들게 공부할 때 다른 형제들은 어화원(御花園)에서 신나게 놀았고, 그가 순행하며 말 위에서 요동치는 괴로움을 감내할 때 다른 형제들은 황궁에서 마음껏 향락하지 않았는가.

 

이런 엄청난 차이로 인해 윤잉의 심중에 불만이 쌓여 갔다. 그래서 황태자는 황제가 친정을 나갔을 때 향락만을 추구하면서 억압된 욕망을 분출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태자의 ‘닐비비인(昵比匪人, 싫든 좋든 나쁜 사람들과 아주 친밀하게 지냄)’의 소문이 났고 결국 강희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장장 20년 동안 윤잉은 태자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면 갈수록 황태자 지위가 위태해졌다. 한 발짝 한 발짝 바짝 압박받는 상황 아래에서 살아야만 했다.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가 된다는 것은 모든 걸 잃는다는 뜻이 된다. 심지어 생명까지 위태로웠다.

 

권력의 최고봉에 이르는 평탄한 길에 한 발을 내딛고 있었지만 다른 한 발은 여전히 벼랑에 남겨져 있었다. 극도의 긴장된 상황에서 윤잉은 이미 20여 년을 견뎠다. 천진난만한 유년도 아니요 즐거움이 충만한 소년도 아니요 생기발랄한 청년도 아니었다.

 

그의 정신과 육체 모두 황태자라는 신분 때문에 질식 상태에 빠져 있었다. 기형적인 자존(自尊)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시각각 모든 일에 규범을 지키며 살아야만 했다. 쉬이 억제하지 못하는 욕망은 그를 점차 궤도를 벗어나게 만들었다.

 

황태자 지위에 있으면서 배양된 독존(獨尊)의식은 무의식중에 황제의 권위를 침범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최고 권력으로 통하는 길을 오랫동안 걸어왔으니, 그 세월은 그를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두렵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날이 명확해지는 황태자 지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시기적절하게 부황(父皇)의 희로애락을 알아차려야 했다. 마음속에 품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부황의 심사를 정확하게 포착해야만 했다. 부황의 생각하는 바대로 생각해야 했고 부황이 바라는 바를 행해야 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모두 부황과 일치해야 했다. 그의 생명은 강희의 생명의 연속이요 그의 황태자 권력은 강희의 황권의 연신이었으니, 그의 영혼도 당연히 강희의 영혼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윤잉은 자기의 사상을 가질 수 없었다. 자신의 호오나 희로애락도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강희의 실체가 투영된 그림자일 따름이었다. 33여 년의 생활 속에서 윤잉은 자아를 파괴할 수도 덮어 숨길 수도 없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정신적 질곡을 감내해야 했던 황태자는 결국 쇠사슬에 묶여 감금된 죄수 신세가 됐다.

 

장기간 극대화된 긴장은 윤잉의 심신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것저것 의심하게 만들었다. 끊임없이 자제해야만 했던 윤잉은 마침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분노였다. 자신의 불만을 타인에게 전가했다. 일단 분노가 폭발하면 부하들을 채찍질했다. 발산한 후 잇달아 오는 것은 새롭고도 더 심각해지는 위기였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러면서 윤잉의 정신은 붕괴됐고 아슬아슬 줄타기 하던 황태자 권력도 마침내 잃게 됐다.

 

냉정하게 논해 보자. 사실 둘째 윤잉은 강희의 여러 아들 중 평범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다. 학식은 셋째 윤지(胤祉)보다 못했고 책략은 넷째 윤진(胤禛)을 앞서지 못했다. 명성은 여덟째 윤사(胤禩)와 비교할 수 없었으며 재간은 남들이 모두 공인했던 열넷째 윤정(胤禎)보다도 못했다.

 

적출(嫡出)이라는 특수신분과 황태자라는 특수지위는 성격이 급했던 윤잉을 거만하고 난폭하게 만들었다. 폐위됐던 경력은 그를 맹성(猛省)하게 만들었지만 다년간 형성된 개성과 나쁜 습관은 이미 뿌리깊이 박혀있었다. 그리고 둘째, 윤잉은 천성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행동이 재차 강희의 희망과 대척되자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하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돼 버렸다.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 보자. 강희와 윤잉 부자 사이에 감정상 위기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극도로 집중된 황제의 권한에 있었다.

 

강희는 태자를 폐위하기 전에 조서에서 “국가는 오직 주인이 하나여야 한다”와 “대권을 어찌 조금이라도 타인에게 빌려줄 수 있겠는가”를 강조한 데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대권’을 추호도 “타인에게 빌려 줄 수 없다”는 말은 윤잉을 두고 한 것이리라. 강희가 자신의 황권이 태자에게 도전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면 용인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두 번 황태자에 옹립하고 두 번 폐위한 후 강희는 다시는 태자를 세울 뜻이 없어져 버렸다.

 

신하들의 요청에도 질질 끌었다. 제도를 핑계로 얼버무리기도 했고 황태후의 거상을 빌미로 시간은 연기하기도 했다. 더 이상 핑계거리를 찾지 못했을 때에는 “청 왕조를 동요시킨다”는 쇼킹한 죄명을 씌워 진언한 사람을 징치하면서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짐이 설령 꺼리지 않는 것이 없다손 어찌 감히 조종(祖宗)의 홍업을 신중히 하면서 반석에 올려 놔 편안케 만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때가 되면 그대들은 자연스레 의지하는 바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오. 짐의 만년 후 그대들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굳게 믿을 수 있고 그대들이 진심으로 탄복할만한 이를 반드시 선택할 것이오. 결단코 제신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했다.

 

강희가 누구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을까? 아무에게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어떤 사람도 그런 마음의 병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황자들을 포함한 사람들은 속으로 멀찍이서 추측할 따름이었다.

 

사실 강희는 대단한 황제였다. 61년간 재위하면서 삼번(三藩)을 평정했고 대만(臺灣)을 복속시켰으며 막북(漠北)을 귀속시켰고 티베트를 정벌했다. 황하를 치수했고 성년이 되면 영원히 세를 부가하지 않는 사회정책을 실행하면서 청 왕조의 통치를 공고히 했다. 사회 경제를 회복시키고 발전시켜 다민족 국가인 현재와 같은 중국을 통일해 흥성의 기초를 닦았다. 다민족국가 형성에 이바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완전무결할 수는 없었다. 황태자를 세우는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정치적 혼란을 불러왔다. 그리고 자신의 건강을 해치고 위신을 추락시켜 만년에 강희는 제대로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정신 상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어쩌면 황태자 문제가 그를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다.

 

다시는 자신의 웅지를 펼칠 힘을 갖지 못했다. 황태자의 문제는 바로 ‘황권’에 있었으니 60년이 넘는 지존의 자리를 마지막까지 내려놓지 못한 강희는 그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범부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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