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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5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효장문황태후가 탐문한 결과 도르곤이 와병 중에 그의 심복에게 “만약 내가 황제가 됐고 지금 어린 황상이 황태자가 됐다면 내가 어찌 병을 얻었겠는가?”라고 했다는 말을 듣게 됐다. 이 말의 중점은 “내가 황제가 됐다”면이다. 그가 만약 진짜로 황제가 되는 목적을 이루었다면 황태자는 푸린에게 돌아간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모자의 앞길이 길할지 흉할지 알 수도 없었고. 어쩌면 길보다는 흉이 많게 될 수도 있었다. 효장문태후와 도르곤이 만날 때 암암리에 그의 말투를 살폈었다.

 

그러나 그런 황위 찬탈의 대사를 가장 친밀한 연인이라 할지라도 어떤 것도 함부로 누설할 수 없는 일인데 이해관계가 뚜렷한 효장문태후에게 발설할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영리하고 주도면밀한 도르곤이 아니던가. 효장문태후는 자신들이 재앙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결국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었다. 국모이며 태후의 존체를 섭정왕 도르곤의 품에 안겨 그를 기둥으로 삼기로!

 

태후라는 존엄을 버리고 재가하는 것은 효장문태후가 주동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야사(野史) 기록에 보면 도르곤의 야심을 잠재우기 위해 태후가 혼례를 특별히 성대하고 화려하게 치러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서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알 수 있도록 했다.

 

먼저 순치(順治) 황제가 도르곤 치국평천하의 큰 공로를 표창하고 도르곤을 황부(皇父) 섭정왕으로 존중했다. 황숙(皇叔)을 황부라 했으니 도르곤과 황제, 태후 관계에 질적인 변화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순치 황제의 명의로 태후가 황부 섭정왕에게 재가한다는 조서를 내리고 천하에 공포했다. 그러고서는 예부에 명해 태후가 재가하는 새로운 의례를 제정해 혼례를 국가예식으로 치르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순치 6년(1649) 2월 8일에 혼례를 치르도록 정했다. 그날은 효정문태후의 생일이었다. 태후의 탄신을 성수절(聖壽節)이라 불렀는데 만민이 공동으로 축하하는 날이었다. 거기에다 혼례가 더해졌으니 겹경사로 경축일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해 순치 황제는 열두 살로 한문(漢文)도 알지 못했고 중국어도 할 줄 몰랐다. 만주족과 몽골족의 어니예(eniye 모친)와 유모들의 교육 아래 여진 민족의 습속을 잘 알고 있었다. 모친이 재가하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 아니었다. 그의 총명함과 어니예들이 가르침으로 그는 모친의 행동이 그의 황위를 보호하는데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태후 재가’의 관건은 “신분 낮은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는데 있다. 이는 도르곤의 명분과 지위를 규정하고 있다. 공주가 신분 낮은 사람에게 시집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마(駙馬)의 지위는 높아 진다해도 공주의 존귀함을 뛰어넘을 수 없다. 도르곤이 설령 황부 섭정왕이라 불린다 해도 태후의 ‘부마’에 불과할 뿐으로 결국 태후의 밑에 위치하는 것이다.

 

그는 황제의 계부이며 태후의 후서방 역할을 할 수 있을 뿐 명분이나 등급에 있어 칭제(稱帝)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혼인으로 맺어진 속박과 종신토록 ‘주공(周公)’이 됐으면 하는 격려 아래 도르곤의 야심은 흐르는 물처럼 와해됐다. 그는 역사에서 보이는 조카를 보좌해 제업을 이루었던 덕망 높은 주공과 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혼인의 특수한 점은 ‘부마’가 된 도르곤 자신이 많은 처첩을 거느린 대가정이었다는 데에 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금성에서 태후와 함께 거처하면서 간혹 왕부로 건너가 만나고 올 뿐이었다. 그의 처첩들은 불만이 있었으나 내색할 수 없었다. 존귀함이나 재주를 놓고 봤을 때 그들은 결코 태후와 필적할 수 없었다. 이는 도르곤의 또 다른 속박이 됐다.

 

그러나 효장태후는 도르곤에게 막대한 보상을 해줬다. 그는 황부 섭정왕이란 신분으로 모든 정사를 처리하고 주장을 결재했다. 황상의 명을 받지 않고도 조서를 꾸며 성지(聖旨)라는 이름으로 하달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황제의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대리 황제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진짜 황제는 아니었음에. 그는 절대 황제의 궁에 거처할 수 없었고 황제의 보좌에 오를 수 없었다. 만세라 부를 수 없었고 조회 때 여러 왕들과 백관들에게 조하(朝賀)를 받을 수 없었다. 천하는 여전히 순치의 천하였다. 대청 황제는 여전히 푸린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순치 7년(1650) 11월 도르곤은 한(汗)이었던 형 홍타이지처럼 변경 지역에서 사냥을 하면서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되찾으려 했으나 효험 없이 12월 9일 카라성(喀喇城)에서 병사했다. 39세였다. 최대의 위협이 제거됐으니 효장문태후는 한시름 놨다. 그러나 도르곤과 20여 년 동안의 애정과 곡절을 회상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12월 26일 순치 황제는 중외에 애도하는 조서를 내리고 도르곤의 덕이 높고 공로가 많음을 칭송했다. 그리고 도르곤을 의황제(義皇帝)로 추존하고 묘호를 성종(成宗)이라 했다.

 

그러나 의황제에 추증한 후 40여 일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생전에 모반을 획책했다는 대죄를 씌워 관직을 삭탈하고 종실에서 축출했으며 무덤을 파헤치고 재산을 몰수했다. 120여 년 후 건륭(乾隆) 연간이 돼서야 건륭 황제가 다르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왕작(王爵)을 회복시키고 태묘에 배향했다. 그 왕작은 세습할 수 있도록 하여 청초(淸初) 8개 ‘철모자왕(鐵帽子王)’의 하나가 됐다.

 

그러나 현재 볼 수 있는 문헌이나 기록 중에 효장(孝莊)이 도르곤에게 시집을 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고 효장이 도르곤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다는 것도 증명할 수 없다. 당시 만주족 사회의 역사적 배경, 만주족 초기의 혼례 풍속, 그리고 당시 조정 투쟁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효장이 도르곤에게 시집을 갔을 가능성은 있다.

 

먼저 청초의 황실 혼인을 보면 그들의 혼인과 한족 전통의 윤리도덕 관념과 큰 차이가 있다. 만주족의 ‘구습’은 배분을 나누지 않고 군혼제도의 유풍이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홍타이지의 후궁에는 고모, 조카가 한 아비를 모시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홍타이지는 나중에 자신의 딸을 처형 오극선(吳克善)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기도 했고 조부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다.

 

태조 누르하치 때에는 더 혼란스러웠다. 누르하치는 우라(烏拉) 버일러(패륵貝勒) 부잔타이(Bujantai 포점태布占泰)의 조카 아바하이(Abahai 아파해阿巴亥)를 처로 두었고 자신의 딸 무쿠시(Mukusi 목고습穆庫什)를 부잔타이에게 시집보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 일상사였다. 누르하치의 계비 푸차(Fucha 부찰富察) 씨도 동족인 죽은 형의 처였다.

 

황족 중에서 그런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는” 혼인 습관은 청나라 초기에도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효장 태후가 홍타이지가 죽은 후 섭정왕이 된 숙부에게 시집을 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게다가 만주족들은 조혼(早婚)을 실행했다. 황실 중 “늙은 남편에 어린 처”가 많았다. 과부가 된 형수가 젊으면 동생이 그 형수를 처로 삼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도르곤은 효장 태후보다 두 살이 많았다. 그리고 빼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도르곤과 결혼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홍타이지가 죽은 후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섭정왕 도르곤은 군사를 거느리고 관내(關內)로 들어와 중원의 주인이 됐다. 한족 봉건 예의 도덕관념의 영향 아래 황실을 포함한 만주족들은 ‘구습’을 점차 없애 나갔다. 그래서 자신들의 자연적인 혼인 습관이 영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해, 그 후의 역사서에 태후가 신분 낮은 사람에게 시집을 간 사실을 삭제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당시의 여러 흔적들을 보면 효장 태후와 도르곤 사이에 사실상의 혼인관계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관계의 존재는 어쩌면 남녀 간의 애정적인 필요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이익과 권력의 협조와 균형이 주가 됐을 것이다. 그래서 도르곤이 죽고 시체가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소년 천자 푸린은 그가 생전에 ‘모반’을 꾀했다는 죄를 물어 가차 없이 왕작을 삭탈하고 묘를 파헤쳤으며 가산을 몰수하는 벌을 내렸던 것이다.

 

그렇다. 태후가 낮은 신분의 인물에게 시집은 간 것은 사실이고 이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 도르곤을 옭아매 황위를 찬탈하지 못하게 만들고 어린 아들을 옹립토록 하였다. 이는 정국을 안정시키게 만들기 위한 책략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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