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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5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 ?~1687), 보르지기트(Borjigit 박이제길특博尔济吉特) 씨이며 호르친(Khorchin 과이심科爾沁) 버일러(패륵貝勒)인 자이상(Jaisang 채상寨桑)의 딸로 천명(天命) 10년(1625)에 홍타이지(태종 황태극皇太極)와 결혼했고 숭덕(崇德) 원년(1636)에 장비(莊妃)에 봉해졌다. 푸린(복림福臨, 순치順治 황제)이 즉위하자 황태후로 존중받았다. 강희(康熙) 26년에 죽었다. 1남 3녀를 낳았고 일생동안 푸린과 강희 두 황제를 보좌했다. 식견이 날 달랐고 마음이 너그러워 청(淸)이 번창하는데 큰 힘이 됐다.

 

청 태종(太宗) 효장문황후는 청초(淸初) 통치 계급 중 선견지명이 있고 탁견이 남 달랐던 중요한 인물이다. 기복이 많은 일생을 살면서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효장문황후는 당시에 어떻게 도르곤(Dorgon 다이곤多爾袞)을 협박해 자신의 아들을 옹립했으며 그로 하여금 보정(輔政)토록 해 제업을 완성했는가에 대해서 정사, 패사(稗史), 구비(口碑)사료, 야사(野史), 실전된 작품 등에 ‘태후 재가(再嫁)’설이 많이 보인다. 이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는데, 청초(淸初) ‘3대 현안’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근 백 년 동안 사람들이 차 마실 때나 식후의 얘깃거리로 회자되는 이슈 중 하나다.

 

 

 

 

태후 재가 수수께끼의 주인공은 효장문태후다. 태종 홍타이지와 결혼해 순치, 강희를 보좌하며 청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놨다.

 

숭덕 7년(1642), 홍타이지는 송산(松山)전투에서 명나라 경략(經略) 홍승주(洪承疇)를 생포한다. 이후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만주족이 입관(入關)하는데 안내자가 되도록 투항을 권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이에 효장문황후는 친히 투항을 권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자의 말투와 웃는 소리와 따뜻한 정감이 넘쳐흐르는 태도로 설득해 마침내 홍승주의 가정과 처자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켜 청나라의 신하가 되도록 만들었다. 청의 통일대업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태종 홍타이지가 죽은 후 그녀는 또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도르곤을 구슬려서 자신의 어린 아들 푸린(순치)을 황제에 앉히고 보좌하도록 만들어 청 통치 계급 내부의 분열을 막아냈다.

 

순치 16년(1659) 정성공(鄭成功)이 북벌을 감행하면서 연전연패 당하자 청 통치 계급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심지어 관외(關外)로 철군할 준비까지 했다. 효장문황후가 나서 제지해서야 청 조정은 안정을 되찾았다. 세조世祖 푸린이 죽은 후 8살밖에 안 된 현엽(玄燁 만주어 Hiowan Yei, 몽골어 Enkh Amgahan, 강희제)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효장문황후는 정성을 다해 자기 손자를 황제의 자리에 앉힌 후 보정대신 오보이(Oboi 오배鰲拜)의 전횡을 깨트리고 친정할 수 있도록 보좌했다. 그리고 현엽을 도와 삼번(三藩)의 난을 평정한다. 이렇게 보면 효장문황후는 실로 청 왕조의 개국공신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1643년 청 태종이 급사한 후 그 자제 중 용맹스럽고 싸움을 잘하며 지모가 두드러지고 대업을 능히 이어받을 수 있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는데도 예상 밖에 황위를 계승한 사람은 아홉째 아들 푸린이었다.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6세밖에 안 된 어린 아이가 어떻게 황제의 보좌에 앉아 대청(大淸)의 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청나라에는 사람이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홍타이지에게 맏아들이 없었는가? 푸린이 즉위한 것도 선황의 유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천정신수(天定神授)’라 생전에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는 말인가? 신비의 외투를 한 겹 한 겹 벗겨 내다보면 푸린의 황제 즉위는 아이신기오로(애신각라愛新覺羅) 씨족 내부의 황권 투쟁의 결과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친의 총명함과 재지, 그리고 정치적 영향력과 관계가 있음도 알 수 있다.

 

홍타이지가 죽을 때 8여 년 동안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로 있었다. 봉건 군주 제도에 따르면 ‘자승부업(子承父業)’의 전통에 따라 맏아들 후거(Hooge 호격豪格)가 즉위해야 마땅했다. 홍타이지 생전에 11명의 황자를 뒀다. 그중 후거가 장남으로 34살이었고 홍타이지 계비(繼妃) 우라나라(오랍나랍烏拉那拉) 씨의 소생이다. 청소년 시기 부친과 조부를 따라 각지를 다니며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통일 전쟁 중 탁월한 공을 세웠다. 그래서 부친이 황제를 칭할 때 여러 버일러(패륵貝勒)를 정하면서 군공에 따라 가장 높은 등급의 화석(和碩)친왕에 봉해졌고 숙친황(肅親王)의 봉호를 받았다. 여러 숙부들과 함께 왕에 봉해졌던 것이다. 심지어 군왕으로 봉해진 숙부 아지거(Ajige 아제격阿濟格), 아바타이(Abatai 아파태阿巴泰) 등보다도 높은 자리에 있었다.

 

홍타이지의 여러 아들, 예를 들어 워부수(Yebusu 엽포서葉布舒), 소서(Sose 석새碩塞) 등은 16,7세에 불과해 전공도 없었기에 어떤 지위도 받지 못했다. 고서(Gose 고새高塞), 창수(Cangsu 상서常舒), 푸린(Fulin 복림福臨, 순치제), 투서(Toose 도새韜塞)와 봄보고르(Bombogor 박목박과이博穆博果爾) 등은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었다. 이치로 따진다면 황위에 즉위할 인물은 후거말고는 달리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예상 밖에 대청 황제의 보좌에 앉은 인물은 6세에 불과한 아홉째 어린 황자 푸린이었다.

 

선제에게는 성년이 된 황자가 있었는데 어째서 어른을 버리고 아이를 선택했을까? 물론 청나라 초기에는 ‘적장제(嫡長制)’에 구속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무정한 역사는 이것이 바로 아이신기오로 씨족 내부의 황권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푸린 모자는 어부지리를 얻은 것에 불과했다.

 

 

 

 

그 권력 투쟁 중 황숙(皇叔) 도르곤이 수장이 돼 이부형제인 형 무영군왕(武英郡王) 아지거, 동생 예친왕(豫親王) 도도와 연합했고 백부 예(禮)친왕 다이샨도 당시 그의 모친 대복진 오라나라(烏拉那拉) 씨의 연고로 도르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다른 쪽에는 숙(肅)친왕 후거를 중심으로 홍타이지 생전의 측근 대신 소닌(Sonin 색니索尼), 시위(侍衛) 대신 툴라이(도뢰圖賴), 황제 소속의 정(正), 양(鑲) 두 황기(黃旗) 대신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정(鄭)친왕 지르가랑은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암중으로 후거를 지지하고 있었다. 양대 세력 간의 생사를 건 혈투가 벌어질 형국이었다.

 

당시 옹립을 의결하는데 갈등의 초점은 예(睿)친왕 도르곤과 숙친왕 후거에게 있었다. 둘은 암암리 자립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조건에 대해 말하면 막상막하였다. 둘은 용기도 지모도 갖추고 있었고 전공을 여러 차례 세웠으며 영향력을 두루 갖춘 친왕이었다. 군사 세력에 대해 말하면 다이샨은 정홍기(正紅旗)를 거느리고 있었고 지르가랑은 양람기(鑲藍旗), 거기에다 두 황기와 후거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정람기(正藍旗), 합쳐 5기(旗)의 병력이 후거를 지지하고 있었다. 도르곤의 지배하에 놓은 것은 두 백기(白旗)의 병력으로 정예부대라고는 하지만 후거보다는 약했다.

 

여러 왕들이 모여 황제 옹립에 대해 의논할 때 후거 쪽에서는 결연한 태도를 견지했다. 다이샨이 먼저 후거가 “대통을 계승해야”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후거가 사양하자 두 황기 장병들이 활과 칼을 들고 궁전을 에워쌌다. 무력으로 “만약 황제의 아들을 옹립하지 않으면 죽어 황제를 따라 지하로 내려갈 것이다”라며 시위했다. 다이샨도 또 다시 “황제의 아들을 옹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형세는 홍타이지의 아들이 아니면 황제에 옹립할 수 없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이 문제에 대해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은 다이샨과 두 황기 장수들이 ‘황자皇子’를 옹립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사실 후거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후거는 여러 황자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첫 번째 인물이었다. 다른 황자들은 나이가 어리거나 공훈, 지위, 영향력 등에서 후거보다 나은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황자를 옹립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물론 그들은 도르곤에게 약점이 잡히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도르곤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영특하고 지혜롭고 책략이 뛰어났다.” 결코 경거망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황제에 오르려는 마음은 확고히 갖고 있었으나 성급하게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냉정하게 관찰하면서 기회를 엿봤다. 아기거와 도도는 그에게 황위에 오르라고 권했으나 그는 “주저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도도는 다이샨에게 황위에 오르라고 제의했다. 책략이었다. 다이샨은 아랑곳하지 않고 결연히 “마땅히 황자를 옹립해야” 한다고 표명했다.

 

이때 기민한 도르곤은 마침내 대책을 찾아냈다. 그의 발언은 먼저 상대방들이 “황자를 옹립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자 한꺼번에 대립국면이 누그러졌다. 상대방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다시는 다른 말을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후에 도르곤은 후거가 “계승할 뜻이 없다”는 겸손의 말을 강조하며 빈틈을 파고들었다. 상대방들이 후거를 옹립하려는 가능성을 일시에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자신의 적수를 제거한 것이 됐고.

 

마지막에 도르곤은 “황제의 셋째 아들을 옹립하자”는 자신의 방책을 제시했다. “나와 우진왕(右眞王 기르가랑)이 군병의 반씩 분장해 좌우에서 보정(輔政)하면 된다.” 이 방법은 도르곤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쌍방의 세력과 이익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후거 쪽에서도 어쩔 수 없이 그 방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도르곤이 푸린을 황제로 옹립하자고 제안한 것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일이 됐다.

 

바로 도르곤의 지지를 받으면서 청 황실 내부의 갈등을 적절하게 봉합해 피비린내 나는 내란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오래지 않아 만주족이 중원을 장악하고 전 중국의 통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틀을 이룬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도르곤의 공이 지대하다고 하겠다.

 

 

 

 

푸린이 황제에 오르는 데는 황후(皇后) 이외에 4대 복진(福晉 비妃) 중 한 명인 자신의 모친의 영향력이 있었기에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효장(孝莊)과 도르곤 사이의 감정은 홍타이지가 건재했을 때부터 생겼다. 장비莊妃는 나이가 젊고 미모가 출중했으며 젊은 숙부의 나이와 모습이 적당했다(장비는 도르곤보다 두 살이 적었다). 그래서 이미 두터운 정이 쌓였던 것이다. 홍타이지가 병사하자 시동생과 형수는 인연을 계속 이어갔고 장비는 마침내 도르곤의 품에 안겼다. 아무 거리낌도 없이 태후라는 존체가 황숙에게 재가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도르곤은 장비의 소생을 전심전력으로 지지하게 됐고 어린 나이에 천하에 군림할 수 있도록 보좌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도르곤은 “황궁을 출입하면서 때대로 형수와 조카와 함께 거처하는데 한 집안 부자처럼 대했다”고 한다. 장비는 한창인 나이에 과부로 지내지 않고 애정을 향유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르곤이 그의 아들에게 양위하도록 만들기 위해 기꺼운 마음으로 그와 사통했다. 효장문황태후가 도르곤에게 몸을 맡긴 중요한 이유는 역시 자기 아들의 강산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도르곤이 섭정왕이란 특수한 지위에 있었기에 생사여탈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과 자신의 장래를 위해 도르곤에게 재가한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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