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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5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청(淸) 태종(太宗, 1592~1643) 홍타이지(HongTaiji, 황태극皇太極)는 누르하치의 여덟째아들이다. 어릴 적부터 남달리 총명했다고 한다. 과묵하고 쾌락을 쫓지 않았다. 책략에 뛰어났고 내성적이며 강인한 성정을 지녔다고 한다. 성년이 되고 나서 부친을 따라 전쟁터로 나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 누르하치가 죽자 황위를 계승했는바 천총(天聰) 원년이다. 문관(文館)을 설치하고 번원(藩院)을 정리했으며 과거를 실시했고 한족(漢族) 팔기군(八旗軍)을 창설했다. 10년,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했다. 명(明)나라 군대를 깨뜨리며 명의 관외(關外, 산해관山海關 밖)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숭덕(崇德) 8년(1643) 중풍으로 급사했다.

 

역대 중국 왕조에서 태자를 세우고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마치 좁은 요새를 건너는 것과 다름없이 위태위태했다. 많은 사람들이 목이 잘리거나 쫓겨나기도 했고 부귀영화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리가 바뀔 때마다 피비린내가 자욱했다. 어떨 때는 정치적 대변동이 일어나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당대(唐代)의 현무문지변(玄武門之變)이나 동진(東晉)의 팔왕지란(八王之亂) 등이 그것이다. 누르하치가 건국한 대금(大金)은 어떻게 그 관문을 통과했을까?

 

누르하치의 많은 아들들은 모두 찾아보기 힘든 인재들이었다. 그중 최고의 인물을 골라 한(汗)에 앉혀야 했으니 누르하치는 주저하며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장자 추연(Cuyen 저영褚英)의 죽음은 누르하치로 하여금 적장자 계승 제도에 대해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여러 아들과 조카들에게 눈을 돌렸다. 셋째 버일러(Beile 패륵貝勒) 망골타이(Manggultai)는 자신과 깊은 정을 나누지 못하는 사이였다. 넷째 버일러 홍타이지는 심계가 너무 깊었다. 둘째 버일러 아민(Amin)은 결국 자신의 아들이 아닌 조카였다. 누르하치는 만족할만한 인물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주족(滿洲族) 전통의 추천제를 떠올렸다. 팔기(八旗) 버일러, 즉 4대 버일러와 4명의 소 버일러가 공동으로 새로운 칸을 추천하도록 전통은 규정하고 있었다.

 

어린 아들에 대한 편애였을까? 아니면 몽골의 어린 아들이 가업을 잇는 습속의 영향 탓이었을까? 누르하치는 임종하기 몇 년 전에 열네 번째 아들 도르곤(Dorgon), 열다섯 번째 아들 도도(Dodo)에게 황위를 계승하려 했었다. 하지만 두 명의 어린 아들은 10살 전후에 불과했으니 여러 사람의 기대에 어긋났다. 누르하치가 계승자 문제에 이랬다저랬다 결정을 못하면서 많은 아들들과 조카들이 한의 자리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됐다. 그러나 결국은 칸이라는 보좌는 그리 우세하다고 보이지 않던 홍타이지에게 돌아갔다.

 

그럼으로써 의문을 남긴다. 홍타이지는 어떻게 갑자기 나타나게 됐을까? 그는 도대체 어떤 고명한 수단으로 형제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그의 한의 보좌는 누르하치가 제정한 것인데, 찬탈한 것인가 아니면 만주족 귀족들이 공동으로 추천한 것인가? 이제 하나하나 풀어보자.

 

 

 

 

홍타이지는 어릴 적에 모친을 잃었다. 고독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강한 승부욕을 보였다. 분발해 강함을 도모하는 특성의 성격을 가지게 됐다. 자신이 보는 부친은 존경하고 본받을 만한 모범이었다. 여진(女眞)을 통일시키면서 치렀던 잦은 전투는 자신을 단련시킬 좋은 기회였다. 가장 뛰어난 점은 그가 근면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대금(大金)의 여러 버일러 중 한문(漢文)을 공부해 한자 문서를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용감성에 지혜가 더해졌으니 천명(天命) 원년 후 금(金)나라를 건국할 때 권력을 행사하던 4대 버일러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의 행동은 어느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병사들보다 앞장서 용감하게 전투에 임했다. 사얼후(Saerhu 살이호薩爾滸) 대전에서나 심양(瀋陽)을 포위 공격해 획득한 전쟁 중에서나, 홍타이지는 한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험한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태자 다이샨(대선代善)과 함께 출전했을 때도 목숨을 걸고 돌격했고 혁혁한 전과도 올려 다이샨을 뛰어넘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역사를 공부했고 계책에 뛰어났으며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남달랐다는 점이다. 현명함을 강점으로 젊은 여진 귀족들을 단결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생각이 같았다. 부모 세대들보다 포부가 원대했다. 금 왕조의 귀족 중 정신적인 면에서나 사상적인 면에서 소장파에 속한 인물들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홍타이지가 뛰어난 영웅이었지만 명청(明淸) 역사가들은 홍타이지가 어린 동생 도르곤(Dorgon) 수중에서 한의 자리를 찬탈한 것이라 본다. 청나라 장량기(蔣良騏)의 『동화록(東華錄)』 순치(順治) 8년(1651) 2월 기해(己亥)의 기록을 보면 도르곤이 “태종문황제(홍타이지)의 자리는 원래 찬위한 것이다”라 했다고 돼 있다. 이는 홍타이지가 한의 자리를 찬탈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누르하치는 생전에 도르곤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간교한 수단을 동원해 어린 동생의 손에서 한의 자리를 빼앗았고 찬위에 장애가 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 도르곤의 생모인 대복진(大福晉 대비大妃)을 핍박해 순장시켰다고 했다. 물론 이런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누르하치는 도르곤의 생모가 불충하다고 싫어해 죽기 전에 특별히 그녀를 순장하도록 명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도르곤의 생모, 즉 누르하치의 대복진은 한이 임종할 때 유언을 남겼다고 언명한다. 열네 번째 아들 도르곤에게 한 자리를 계승하게 하고 첫째 버일러 다이샨이 보정(輔政)토록 하며 도르곤이 성인이 되면 다이샨은 권력을 이양하라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정말 한의 유언이란 말인가? 한이 생전에 반복적으로 훈시를 내렸던 팔왕(八王)이 공동으로 국정을 논하는 체제와 완전히 위배되지 않는가. 열네 번째 아들 도르곤은 13세에 불과했다.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니던가. 공도 세운 바가 없고 명망도 없는데 어찌 한의 자리에 앉는다 말인가. 그래서 도르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누르하치가 죽을 때 여러 버일러들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복진의 구술에 의거한 유언을 누가 증명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홍타이지가 등극한 후 도르곤을 “특히 애지중지”하며 특별하게 가르치고 발탁하니 도르곤은 홍타이지의 은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전심전력으로 홍타이지를 보좌하며 탁월한 공을 세움으로써 홍타이지의 가장 유능한 조력자가 됐다. 홍타이지와 도르곤 형제 사이의 감정은 좋았다. 홍타이지가 도르곤에게서 황위를 찬탈하고 모친을 죽이는 짓을 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고 보기도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홍타이지가 황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고 여러 버일러들이 추천했다고 보기도 한다. 태조 누르하치는 생전에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여덟 버일러들이 공동으로 국정을 논하는 제도를 확립시키고 한은 버일러들이 추천해 세우도록 했다. 정사의 기록에 근거하면 첫째 버일러 다이샨의 장자 소 버일러 워투어(Yuetuo)와 셋째 소 버일러인 샤하린(Shahalin)이 협의한 후 함께 부친에게 “국가는 하루라도 군주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승계자를 정하여 대사를 맡겨야 합니다. 넷째 버일러 홍타이지의 재덕이 세상에서 으뜸이요 선왕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중인들도 심복하고 있으니 넷째 버일러로 하여금 즉시 한의 자리에 앉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권했다고 돼 있다. 다이샨은 “그것이 바로 나의 숙원이다. 너희들의 제의는 위로는 천심에 맞고 아래로는 민의와 어울리는데 어느 누가 찬성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부자가 의논해 정한 후 이튿날 여러 버일러와 대신들을 조회에 불러 모았다. 다이샨은 홍타이지에게 즉위하도록 추천한다는 뜻을 적은 문서를 둘째 버일러 아민, 셋째 망골타이, 그리고 소 버일러 아바타이(Abatai), 더거러이(Degelei), 지르가랑(Jirgalang), 아지거, 도르곤, 도도, 두두(Dudu), 소토(Soto), 후거(Hoogo) 등에게 보여주자 모든 사람이 좋다며 환호했다. 곧바로 연명하고 홍타이지에게 즉위하도록 청했다.

 

홍타이지는 사양하면서 “부친 한은 나를 군주로 앉히겠다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여러 형제들에게 왕위를 넘겼는데 참칭하는 혐의가 남게 됩니다”라고 했다. 부친 한의 뜻을 계승할 수 없게 되지 않나 걱정되고 위로는 천심에 부합될까 두렵다고 했다. 군신을 통솔하고 만백성을 안무하는 것은 지난한 임무로 자신은 감당하기 어렵다는 등등의 이유를 내세웠다. 결국 한 마디로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왕위에 오르라고 끊임없이 청했다. 아침 유시(卯時 새벽 7시쯤)부터 오후 신시(申時 오후 5시쯤)까지 꼬박 10시간을 권해서야 홍타이지는 여러 사람들의 성의에 감동받아 마침내 응답했다.

 

조선(朝鮮)의 기록은 희극적인 색채가 더 강하다. 누르하치가 죽자 다이샨이 홍타이지에게 양위하면서 “네 지혜와 용기가 나보다 뛰어나니 나를 대신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했다. 여러 버일러들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곡을 하자 다이샨은 중인들에게 “부친이 생전에 홍타이지를 옹립하려 했다”고 말했다. 홍타이지는 오히려 “왕위에 오를 사람은 당연히 다이샨 형이다”라고 하면서 서로 사양했다. 이에 워투어 등은 다이샨에게 왕위를 청했으나 다이샨은 나서지 않았다. 다시 홍타이지에게 권했으나 홍타이지도 나서지 않았다. 워투어 등은 매일 여러 차례 둘 사이를 오가면서 권했으나 3일이 지나도 결론 나지 않았다. 다이샨은 워투어 등에게 버일러 칠팔 명을 데리고 가 홍타이지를 둘러매 오라고 명했다. 버일러들이 홍타이지를 납치하듯 끌고 와 누르하치 영전에 세우자 그제야 한의 자리에 올랐다고 돼 있다.

 

 

 

 

이러한 희극적인 장면은 사람들 감동시키기는 하나 일정 부분은 가식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보면 민주적으로 홍타이지를 한의 자리에 앉도록 추천했을 가능성은 많다. 당시 사람들은 무(武)를 숭상했고 홍타이지의 무공은 열 몇 살밖에 안 된 도르곤을 뛰어넘었으며 다이샨도 겨룰 수 없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외에 정치적 식견, 군사 재능, 개인적 명망 등 홍타이지는 여러 버일러들보다 뛰어났다. 더욱이 군주전제 제도가 미완성인 상황에서 큰일을 협상하고 완벽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재능이 탁월한 홍타이지를 추천했을 가능성이 크다. 첫째가 넷째에게 황위를 양보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니다.

 

미처 손쓸 틈도 없을 정도로 너무 빨리 홍타이지가 등극했는데 그때 첫째 버일러 다이샨과 무슨 거래라도 했을까? 당시 4대 버일러들은 한의 신뢰를 받고 있었고 한 자리를 계승할 가장 가능성이 많은 후보들이었다. 그중 둘째 버일러 아민은 한의 친아들이 아닌 조카였다. 셋째 망골타이의 모친은 죄를 받은 대복진(大福晉 대비大妃)였고 망골타이 자신 역시 모친을 시해(산채로 순장殉葬)한 인물이며 한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홍타이지가 즉위하는데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다. 단지 첫째 버일러 다이샨이 강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어째서 스스로 한에 오르지 않고 황제의 자리를 자신의 동생에게 순순히 넘겨줬을까?

 

다이샨은 맏아들 추연과 달랐다. 사람됨이 충직하고 온후해 중인의 지지와 호감을 받았다. 동시에 그의 세력도 강해 정홍(正紅), 양홍(鑲紅) 2기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의 재덕에 대해 얘기하자면 “태조가 선현(選賢)하려고 했는데 능히 그 뜻에 맞는 인물이었다.” 추연의 뒤를 이어 누르하치가 태자로 봉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다이샨을 태자로 앉히고 얼마 없어 한의 자리를 계승하려 할 때에 서비(庶妃)가 대복진과 다이샨 사이에 애매한 관계가 있다는 정황을 누르하치에게 고해바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상황은 부부의 감정을 훼손시키고 다이샨과 부친 누르하치 사이의 부자의 정도 멀어지게 만들었다. 당시 누르하치는 다이샨에게 죄를 묻지는 않았지만 아들 다이샨에 대해 실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일이 지나고 나서 얼마 없어 발생해서는 안 되는 사건이 또 일어났다. 다이샨이 계처(繼妻) 나라(Nale 나랍那拉) 씨의 이간질하는 말을 믿고 전처소생의 아들 슈오사이(Shuosai 석새碩塞)를 학대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배반해 도망쳤다는 이유로 누르하치 한에게 친자를 죽일 것을 요구했다. 그의 어리석음과 악랄한 심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아무리 잔인한 호랑이라 할지라도 자기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다”고 했지 않던가. 아무리 흉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제 새끼는 다 사랑하는데 자식을 죽이려 했으니, 자식을 죽이지 말라는 금기를 범해 버렸다.

 

누르하치가 그를 태자로 앉힌 것은 그의 사람됨이 관대하고 어진 품성을 지녀 능히 “나라사람들을 잘 대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다이샨이 계속해서 잘못을 저지르자 부친 한은 철저히 실망하게 됐다. 다이샨이 깨달은 뒤 친히 계처인 나라 씨를 죽이고 누르하치에게 용서를 빌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누르하치는 과감하게 대중들 앞에서 태자를 폐하는 “그(다이샨)를 부친의 나라를 계승시키고자 해 일찍이 태자에 앉혔다. 지금 태자를 폐하고 그의 개인적인 동료, 부중 모두 다 회수한다”는 명을 내렸다.

 

 

 

 

다이샨은 한 번 잘못으로 평생 후회하게 됐다. 잔혹한 가족 내부의 투쟁을 겪은 후 그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피로감을 느꼈다. 권력은 그에게 더 이상 매력적으로 다가서지 못했다. 다시샨은 또 여러 형제와 사촌들, 그리고 왕공 대신들 중 홍타이지와 비교할 때 자신의 실력이 그보다 못하고 지혜와 용기도 뒤지고 명성도 떨어졌으며 재능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서열로는 자신이 한의 자리에 앉는 것은 당연했으나 부친 사후 내외적으로 험난한 정국을 돌파할 수 있을 지도 염려됐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하지 않던가. 뱀에게 물린 적이 있는 사람은 두레박줄을 보고도 놀하는 법, 자신이 폐세자라는 오명도 가지고 있지 않던가? 경쟁에서 이길 수 없으면 차선을 택하면 될 일이다. 금나라를 생각해서나 자신을 생각해서나 한 발 물러서는 것이 아무런 얽매임이 없고 영원할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첫째 버일러 다이샨은 양위의 덕을 발휘해 현명하다는 명성을 얻게 된다.

 

홍타이지도 푸짐하게 보답했다. 청대에 변함없이 세습된 팔가(八家)의 ‘철모자왕(鐵帽子王)’ 중 다이샨과 그의 아들 워투어(Yuetuo), 손자 로코드후이(Lokodhui 늑극덕혼勒克德渾)가 3가를 차지하며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렸음이니. 다이샨이 당시 동생을 한으로 옹립한 것이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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