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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일제의 허술한 관리감시에 그나마 숨통 화전마을 사람들

 

강할머니 가족이 연적골에 살기 시작한 것은 강할머니의 증조할아버지의 자식 중 막내인 강할머니 친할아버지가 애월 장전에서 연적골로 이주하면서 부터이다. 강할머니가 태여 날 당시 그의 부모는 화전마을인 서귀포시 동홍동 연적골에서 거주하였으나 어머니가 친정인 서귀포시 서홍동 굴천동에서 그를 출산했다. 출생 이후 1942년(14세)까지 연적골에 거주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동홍동으로 내려왔다. 이후 연적골에는 상시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다.

 

연적골에 사람이 가장 많았을 때는 18가구 정도 살았다. 주로 보리, 조(맛시리), 피, 메밀, 감자, 토란 등을 경작했으며 무우, 배추, 참깨 등은 다른 마을보다 수확량이 많았다. 살던 집은 초가 삼칸집으로 큰방(안쪽에 고팡), 마루(마루에 봉석), 작은방(작은방 안쪽에 부엌)으로 이루어 졌다. 방을 만들려면 우선 돌(평판석)로 밑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다음, 감을 으깨어 바르고 그 위에 초석이나 부드러운 풀을 깔았다.

 

벽은 돌로 벽을 쌓고(한단 쌓고 흙으로 덮고 다시 한단 올리는 식으로) 부드러운 흙으로 마무리하였다. 주로 마당에서 수확물들을 작업했기 때문에 마당은 200~300평 정도로 넓은 편이었다. 작은방 옆쪽에 도통이 있었는데 도통에는 돼지 1~2마리가 있었고 여기에서 돗거름도 장만했다. 집 안쪽에 큰 쇠막이 있었고 이 쇠막에는 강할머니 아버지 소유의 소와 아래 마을에서 위탁받아 키우던 소 10여 마리가 있었다. 쇠막 한쪽에 방이 있어 가끔 찾아오는 손님이나 소를 돌보던 테우리들이 이곳에 머물렀다.

 

연적골 주변에 석수밭, 쇠물도, 시오름 옆 삼거리, 각수바위 근처. 종정굴(위미 다음) 생물도(강, 이씨 주거), 굴왓(오씨 주거) 등 크고 작은 화전마을들이 있었다. 그러나 최후까지 남은 화전마을은 연적골 뿐이다.

 

1930년대 연적골에는 몰고래 한 곳이 있었다(일반적으로 마을에 몰고래 한 곳당 12-15세대가 거주했던 것으로 본다. 이에서 보면 1930년대 연적골에는 10여 농가가 있었고 그 정도 수확량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강할머니 집에 도고방아가 한 대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제사 때면 강할머니 집에 와서 빌려가곤 했다.

 

연적골에서는 부업으로 아래 마을에서 소를 올리면 미악산 근처에서 말이나 소를 돌보는 일을 하였다. 또한 농가부업으로 숯을 굽기도 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는 허가 받아 일본인에게 구입한 나무만으로 숯을 구웠다. 숯굽기는 우선 땅을 약간 파서 숯굴(숯가마)을 만들고 방문(房門) 정도의 입구를 만들었다. 숯굽기 할 수 있는 나무는 일본사람 요시모도상에게 구입했는데 그는 파는 나무마다 도장 찍어 확인했다고 한다. 숯굽기는 여러 사람이 한 번에 숯(백탄)을 굽거나 혹은 땅위에 흙을 쌓고 흙 위에 담(숯가마)을 쌓고 흑탄을 굽기도 한다.

연적골 주위에는 표고버섯밭을 운영하는 일본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하지마께 도로를 만들고 한라산을 고지대에 밭을 사서 한라산을 둘러싸며 담을 쌓고 그곳에서 표고버섯밭을 운영하였다. 그들에 대한 강할머니의 기억은 좋다. 감자나 고구마들을 그들에게 주면 그들 역시 반드시 예의를 갖추어 보답했다고 한다.

 

연적골에는 ‘산물’이라는 나는 물이 있었다. 산물의 수량(水量)이 풍부해서 식수나 생활용수에 부족함이 없었다. 산물 근처에 본향당(本鄕堂)이 있어서 일 년에 세 번 정도 다녔다.

밭에서는 보통 일 년에 메밀 서른 섬을 수확했다. 그래서인지 마을 인심은 후한 편이었다. 농사 외에 고구마, 토란, 양애, 산마 등이 많이 생산되어 생활에 큰 불편이 없었다. 제사 때면 아버지가 한 달 전에 솔라니(옥돔) 한 마리를 사다가 새로 만든 도구에 소금 간을 많이 한 다음 싸서 천정에 매달아 두었다가 제사 때 사용했다. 저녁에는 대개 솔칵, 호롱불, 각지불 등을 켰고, 호야는 특별한 날에만 켰다.

 

화전마을의 교육열은 대단해서 강할머니 남동생은 6세 때부터 지금의 서귀포에 있는 서당까지 강할머니 아버지가 말에 태워 남동생을 통학시켰다. 딸이었던 강할머니는 서당에 가는 대신 물로 연필을 적셔가며 동생 어깨 너머로 천자문을 습득하였다. 지금도 그때 익힌 한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상은 1928년생 강할머니의 기억을 통해 제주도 마지막 화전마을로 알려진 서귀포시 동홍동 연적골에서의 생활을 살펴본 것이다(『동홍동마을지』에 강할머니를 소개하고 있으며 이 글은 강할머니가 80세이던 2008년 강할머니를 수차례 면담하여 작성한 것이다)

 

1841년 제주목사 이원조의『탐라록』「삼천서당폐장가획절목서(三泉書堂幣場加劃節目序)」에 당시 화전세(火田稅)를 받아 서당의 경비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1899년 5월 <제주군읍지(濟州郡邑誌)> 중 <제주지도(濟州地圖)>에는 목장의 상잣성 위 여섯 군데에 화전동(火田洞)이 표시되어 있으며 읍지(邑誌) 본문(本文)에 화전세를 수세(收稅)했던 기록들이 남아있다. 이후 1924년 9월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제주도에 약 5,000명의 화전민이 있었다고 한다.

 

1862년 ‘강제검(姜悌儉) 난’ 1898년 ‘방성칠(房星七) 난’, 1901년 이재수(李在守)의 난, 남학당 사건들 모두 화전마을, 화전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강제검의 난’ 주도자 였던 김석구(金錫九) 형제와 이재수는 화전동에서 살았기 때문에 화전세의 징수로 인한 화전민의 고통과 불만을 잘 알고 있었다. 방성칠은 전라도 동복군(同福郡) 출신으로 동학혁명 이후 1894년 제주도 대정군 광청리 일대로 남학교도 수백 명과 함께 집단 이주하여 화전동에 정착해 살았다. 당시 화전동 경작지는 둔전(屯田)인 국영목장 내 토지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마장세(馬場稅)와 화전세(火田稅)를 내야 했다. 이것이 민중봉기의 주요한 원인으로 알려 지고 있다.

 

조선총독부 조사(1928)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원인으로 화전민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1) 평지에서 자산을 잃어도 용이하게 화전에 의하여 경작지를 무상으로 획득할 수 있다.

 

2) 대개 각종의 세금․공과금이 거의 부과되지 않으며 부과된다고 하더라도 극히 낮은 과세부과로 그친다.

 

3) 벽지의 화전민에 대한 행정관청의 지휘 감독 내지 장려지도 등의 기회가 적음으로 안이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생활을 할 수 있으며 복잡한 사회와 격리되어 생활하기가 쉽다.

 

4) 화전민의 생활은 대부분 빈곤하며 이른 봄이면 저장하였던 농산물을 거의 소비하여 없어지고 신 곡물이 나올 때까지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자가 많다. 그들은 삼림법 및 농산물 단속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처벌을 받아도 옥사의 식생활이 오히려 자기 집에서 먹는 것보다 났기 때문에 그 처벌은 화전민에게 그다지 고통이 되지 않는다.

 

5) 화전민들은 동계의 연료문제는 식생활 이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 화전민이 산중에서 마음대로 연료의 획득을 이에 대한 죄책감이나 단속의 문제가 없다.

 

6) 지방행정관이나 사법관리들의 대부분은 화전민이 먹고 살기 위하여 부득불 화전을 경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화전민은 그들이 엄중히 처벌을 안 한다고 믿어 태연하게 화전을 모경(冒耕)한다.

 

제주도 역시 용이하게 화전에 의하여 경작지를 무상으로 획득할 수 있었고 화전민에 대한 행정관청의 지휘 감독 내지 장려지도 등의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농사짓기가 가능했다고 보아진다. 또한 농사짓는 화전의 지력(地力)이 고갈되면 새로운 화전지를 찾아 이동하기가 때문에 지력보전을 위한 추비(堆肥), 금비(金肥) 또는 토사유출 및 토양보존에 필요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삼림령 기타 임산물의 단속에 관한 법률 등 강력한 규정이 있기는 하였지만 일단 입산하여 가옥을 건축하고 토지를 개간하여 경작하게 되면 이에 대해 삼림감독관들의 강제철거 및 단속이 곤란하였을 것이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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