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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5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무당산(武當山)은 호북성 균현(均縣)의 남쪽에 있는 도교(道敎)의 영산이다. 태화산(太和山), 태악(太嶽), 현악(玄嶽)으로도 부른다. 산록의 현악문에서 산정까지 35km의 ‘신도(神道)’를 따라서 우진궁(遇眞宮), 원지관(元知觀), 옥황정(玉皇頂), 회룡관(廻龍觀), 회심암(廻心庵), 노군당(老君堂), 남천문(南天門), 자소궁(粢宵宮), 남암궁(南巖宮), 조천궁(朝天宮, 두천문(頭天門), 천운루(天雲樓), 황경당(皇經堂)의 고적이 늘어서 있고 천주봉의 금정(金頂·금전金殿)에 이른다. 금정은 동주(銅鑄)로 폭 5.8m, 안길이 4.2m, 높이 5.8m로 영락(永樂) 16년에 건립됐다.

 

무당산은 춘추시대부터 종교 활동의 장소로 이용됐다. 위진남북조시대 중국 도교의 중요 문파 중 하나인 무당산 도교가 이곳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명대에 무당산은 도교 제일의 명산으로 추앙 받았으며 건축 축조의 전성기였다. 1412년 영락 황제는 엄청난 노동력과 비용을 들여 7년간 8개의 궁(宮)과 2개 관(觀), 36개의 암당(庵堂)과 72개의 애면(崖面), 39개의 다리와 12개의 정자 등 총 면적 160만㎡에 달하는 33개의 건축물을 축조했다. 모든 건축물은 ‘진무수선(眞武修仙)’이란 도교 고사에 따라 지어졌으며 도교의 천인합일 사상을 반영했다. 200여 개의 도관(道觀)이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때 일부 사원이 파괴됐다.

 

 

 

 

무당산은 도교의 명산이다. 『태악태화산지』기록에 의하면 1300년 전에 당대(唐代) 정관(貞觀) 연간에 처음으로 무당산에 오룡사(五龍祀)를 지어 도교를 선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도교는 동한(東漢) 말기에 형성됐다. 동한 말기 장도릉(張道陵)을 창시자로 추앙하고 노담(老聃)을 교조와 천신으로 시봉한다. 무당산의 도교는 ‘현천진무(玄天眞武) 상제’를 모신다. 무당산이란 이름도 “비진무부족이당지(非眞武不足以當(擋)之, 진무대제가 아니면 막아낼 수 없다)”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명대 주원장(朱元璋)이 천하를 놓고 다툴 때 무당산에서 원나라 군대에 포위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산 정상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산 정상에는 조그마한 석묘(石廟)가 있었는데 진무대제를 모시고 있었다. 주원장은 절을 하면서 “북해(北海) 현천(玄天) 진무(眞武) 대제시여, 제가 하산할 수 있도록 보우하소서. 황제가 된 후 제가 머무를 수 있는 곳에 신께서도 머무를 것이요 천하의 백성이 나를 참배하는 것과 똑같이 참배하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당산에 기이한 바람이 일고 모든 산의 호랑이와 표범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산 아래에서 며칠을 에워싸고 있던 원나라 군대는 주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야수들에게 잡아먹혔다고 여기고 포위를 풀고 철군했다. 주원장은 진무대제가 현령해 자신을 구했다고 여겼다. 임종을 맞아 넷째 아들 주체(朱棣)와 태손 윤문(允炆)을 불러 “무당산 진문대제께서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도록 보우하셨다. 너희들은 무당산 묘우(廟宇)를 경성의 궁정처럼 훌륭하게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선산(仙山) 경각(瓊閣)’이라 찬양받는 무당산은 명 왕조 황실의 가묘로 신성불가침의 성지다. 도관(道觀)의 건축, 규모 모두 장관을 이룬다. 장식과 배치 모두 세심하게 정성을 들였다. 무당산을 가 본 사람이라면 장엄한 무당산 자소대전에서 옥황상제, 진무조사, 금동, 옥녀 등 도교의 여러 신들을 봤을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모두 ‘작위’를 가진 여러 신들 중에서 도교 신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삼나무가 보일 것이다. 더 기이한 것은 대전 좌측 중앙이라는 중요한 위치에 모셔져 있다. 어찌된 일일까?

 

그 삼나무는 기이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명대 초기 원시삼림 속에 수왕(樹王이 있었는데 바로 ‘정령(精靈)’이었다. 남달리 총명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목수들은 매년 재목을 고를 때마다 안목이 없어서인지 자신을 고르지 않아 끝내 비분강개해 숨이 끊어져 버렸다. 그러나 혼은 죽지 않았다. 한줄기 푸른 연기가 돼 구천에 이르렀다. 옥황상제는 그의 비범한 재능이 아쉬워 무당산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며 그곳에 옥허(玉虛)대전을 건축하고 있는데 한 번 시도해 보라고 했다. 불원천리 털털거리며 달려갔지만 옥허대전은 이미 준공돼 있었다. 정령은 정신을 잃고 자소전 앞 월대(月臺)에 쓰러졌다. 이때 대전 낙성식을 거행하고 있던 도장(道長)이 공중에서 날아오는 삼나무를 보고는 신이 강림한다고 여기고 급히 도교 교인 대중을 이끌고 땅으로 내려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날아온 삼나무를 대전으로 모셔 만인들의 추앙을 받게 했다.

 

전설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낸다. 많은 사람들은 특이한 내력을 가진 삼나무에 소망을 담아낸다. 자신의 고충을 이야기하며 풀어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더욱 현묘할 것이라 생각해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여기고 뿌리 부분을 손가락으로 부스러기를 떼어내 물에 타 마시기도 한다. 누가 발견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나무가 소리를 전달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전화기인양 한쪽에서 손으로 가볍게 툭툭 치면 다른 쪽에서 사박사박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전음(傳音) 삼나무’, ‘향령(響靈) 삼나무’라 이름을 붙였다. 그 ‘비래(飛來) 삼나무’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무당산의 진귀한 문물이 됐다.

 

 

 

 

그러나 명 홍희(洪熙) 연간 무당산 도사 임자원任自垣이 편찬한 『대악태화산지』의 기록에 의하면 무당산 각 도관의 목재는 전국에서 무창(武昌)을 경유해 운반해왔다. 무당산은 명 왕조 때에도 산림이 울창했지만 ‘신산’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나무에 손댈 수 없었다. 기록에 보면 영락 11년 11월 10일 공부시랑 곽진(郭晉)과 이부랑중 제갈평(諸葛平) 등의 목재 운반책임 아래 무창 황학루(黃鶴樓)를 지날 때 강물 위에 거목이 박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 위로 1척 높이나 솟아 있었다. 여러 관리들이 큰 파도가 치는데도 옴짝달싹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강물을 재보게 했다.

 

물의 깊이는 5장 5척인데 나무는 길이가 4장밖에 되지 않으면서도 물속에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더욱 기이하게 여겨 급히 밧줄로 배에 고정하자 배도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관리들은 신령이 무당산에 남겨 크게 쓰게 하자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무당산으로 옮기도록 했다. 강기슭에 살고 있던 주민들 중 숙연한 마음이 생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관리들은 백성들에게 양쪽에 늘어서 영접하라 명했고 조정도 현천옥허궁을 지을 때 정전의 대들보로 써서 만대에 모시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상술한 목재로 옥허궁의 정전의 대들보로 삼았지만 옥허궁 대전은 후에 전쟁으로 무너졌다. 무당산 도사는 감히 그것을 버리지 못해 일부분을 구해낸 후 대전 좌측 중앙의 중요한 위치에 모셨다.

 

이외에도 무당산에는 특별한 경물이 많다. 무당산 첫 번째 ‘선문(仙門)’인 현악문(玄岳門)은 3칸 4기둥 5층의 아름다운 조각으로 수놓아진 석조 건축물 패방(牌坊)이다.

 

 


패방의 액방(額枋), 첨연(檐椽), 난간 기둥에는 부조, 원조와 루주의 수법으로 팔선영빈(八仙迎賓, 선학운유(仙鶴雲遊) 등의 도안이 새겨져 있다. 중국 석조예술의 최고봉이다. 높이 20미터, 넓이 12.8미터의 석조 패방은 콘크리트 하나 섞여있지 않다. 어떤 쇠로도 잇지 않은 돌과 돌 끼리 맞춰 마치 블록 쌓기처럼 한 층 한 층 아래에서 위로 쌓아 올린 것이다. 사오백 년 전에 현대화된 기중기도 없이 옛사람들은 어떻게 거대한 패방을 세웠을까? 먼저 땅을 다지고 돌로 기틀을 만든 후 기둥을 세웠다. 일단 기단이 만들어지면 흙을 주변에 쌓아 기둥의 높이까지 다진 후 사람들이 올라가 조각하고 또 다른 기둥을 세웠다. 그렇게 1층을 완성한 후 흙을 다져 올리고…… 한 층 한 층 모두 인력으로 만든 것이다. 신을 위한 것이든 황제를 위한 것이든 이 패방도 역시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었다.

 

1413년(영락 11년) 진무대제의 도움에 보답하고 도교 성지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주체(朱棣)는 30여만 명의 군인과 백성, 장인들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근 10년 이란 세월 동안 무당산 도관을 건축하고 ‘대악태화산(大岳太和山)’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영락 황제는 천주봉(天柱峰)에 동으로 만든 황금도금의 대전을 안치하도록 명했다. 높디높은 천주봉의 금색 궁전이 햇빛을 받으면 백 리를 밝게 비춘다.

 

금빛 찬란한 대전은 1416년에 세워졌다. 높이 5.54미터, 길이 4.4미터, 넓이 3.15미터로 겹처마 지붕, 층층이 쌓은 등마루, 날개를 치켜 올린 듯한 처마, 아래에는 12개 원주를 세웠다. 대전 아래에는 정밀하게 조각된 화강암으로 기초를 놓았다. 사방은 화려하게 장식한 옥석 난간이 둘러져 있고. 금전은 20톤의 동과 30킬로그램의 황금으로 돼 있다. 이 금전은 기이하기 그지없는데 ‘조사출한(祖師出汗)’, ‘해마토로(海馬吐露)’, ‘뇌화연전(雷火煉殿)’의 장관이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경지로 이끈다.

 

‘조사출한’은 큰비가 내리기 전 대전 내에 있는 신상에 사람이 땀을 흘리듯이 물방울이 맺혀 흥건하게 젖는다. ‘해마토로’는 천주봉 금전 용마루에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치는 금수들이 세워져 있는데 그중 금마(金馬)만이 온몸이 거무스름해진다. 여름만 되면 금전 위 장식물 중 해마 입에서 한 줄 한 줄 흰 안개가 “뿜어 나오는”데 ‘웩웩’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꼭 폭풍우가 금전을 때린다. ‘뇌화연전’이란 큰 소나기가 퍼붓기 전에 금전 주변에 양동이만한 크기의 불덩이가 주위를 감싸고 뒹구는데 천둥번개가 치고 진천동지하더라도 금전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다. 비가 그치고 맑게 개이면 금전은 소나기에 씻겨 더더욱 휘황찬란해진다.

 

이런 천고기관(千古奇觀)은 민국 초기 이후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기이한 현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원인은 금정(金頂)에 새로운 시설을 더했기 때문이다. 민국 초년 금전 뒤에 부모전(父母殿)을, 좌우에 첨방(簽房)과 인방(印房)을 세웠다. 조악한 건축물이 삼면을 둘러싸니 금전은 본래 색을 잃어 버렸다. 그 후 금정은 누차 벼락을 맞는다. 더 희한한 것은 벼락이 나중에 세운 3개의 건물만 내리칠 뿐 금정은 아무 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무대제가 문 앞을 청소해 버리기 위해 벼락을 내린다고 여겼다. 그것들의 존재가 방해만 된다는 것처럼. 어쩌면 여행객들의 흥미를 갖게 만들기 위해 지어낸 것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객관적인 자연현상인 것, 그래서 더욱 놀라운 것이다.

 

신중국이 들어선 후 정부는 금정이 벼락 맞는 것을 방지하고 문물을 보호하기 위해 1958년 금정 위에 피뢰침을 설치했다. 그렇게 하자 더욱 엉망이 돼 버렸다. 벼락 치는 횟수가 늘어나 부모전을 파손시켰을 뿐만 아니라 금전의 ‘수미좌(須彌座)’도 여러 차례 파괴됐다. 그리고 ‘뇌화연전’의 기이한 현상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과학적인 피뢰침이 벼락을 부른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일임엔…….

 

 

 

 

또 하나의 의문은 그렇게 무거운 금전을 도대체 어디서 주조됐을까하는 점이다. 어떤 학자들은 전체를 한꺼번에 주조했다고 보기도 한다. 금정 토석 중에 동 찌꺼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북경에서 부분으로 나누어 주조하고 무당산으로 옮겨 연결시켰다고 본다. 무당산에서 발견된 동 찌꺼기는 용접할 때 생긴 이물일 뿐이고. 이 두 가지 가능성 말고 또 다른 가능성이 있을까?

 

영락 황제의 화신을 모신 금전은 중국에서 현재까지 전해오는 가장 큰 동으로 주조된 황금이 도금된 대전이다. 보기 드문 국보다. 만약 기이한 현상들이 다시 예전처럼 생겨나고 그 의문을 과학으로 풀어낼 수 있다면 신비함이 사라질까? 그렇기는 하겠다. 어쩌면 미스터리란 모르는데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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