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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명의 세밀화명상(14) 비움이야 말로 가장 근사한 채움이다

 

 

우리 학당(또바기 학당/전북 남원에 있다)의 심적·경제적 동지인 이종덕 님이 낮기온은 이미 한여름인 최근, 사진을 보내왔다. 보는 비로 시원하고 받는 마음으로도 시원하다. 황사·미세먼지·꽃가루 등 건조한 날들의 연속으로 가슴까지 쩍쩍 갈라져가던 날, 그 사진을 다시 꺼내 보며 따라 그려보기로 한다.

 

남의 그림을 그림으로 따라 그리기는 그나마 좀 덜 부담스럽다. 그러나 사진 앞에선 다르다. 더 똑같게 그려야 한다는 부담이 하나 더 가중된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명상은 외면이 아니라 극복이다. 피동이 아니라 능동이며 유별나게 굴지 않아도 비움의 고지에 오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역설 같지만 비움이야말로 가장 근사한 채움이지 않을까. 비우고 난 뒤에 이는 채움 욕구는 타인의식이나 경쟁이 동반되지 않은 자기에게의 순전집중이다. 포기가 있을 수 없다. 비우니 마음추스리기로 기분이나마 비슷하게 그려보자, 한다.

 

고흐는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비싼 모델료를 감당할 수 없던 가난한 화가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그는 풍경화에서도 가능한 사람을 넣으려 했다. 때로는 뒷모습의 실루엣 인물을 누군가 알아볼 수 없게 그려 넣었는데 그 때 떠돈 소문을 의식해서 였다. 그의 그림모델이 되어주었던 동네의 젊은 여자가 임신을 했는데 고흐의 자식이란 소문이 퍼졌다.

 

소문은 고흐를 그 마을에서 더 살 수 없게 만들었다. 떠나서 그린 풍경화 속에 인물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애매하게 그렸다. 분위기라도 비슷하게 그려보자 함은 대충은 결코 아니다. 큰 화면에서 인물이 차지하는 부분은 극히 작지만 고흐 그림의 분위기를 거의 좌우 하듯이.

 

똑같게 그리지 못함을 피할 양으로 분위기를 운운했다가 더 애를 먹는다. 수십 장의 고흐 자화상을 보고 있자면 각기 다른데 또 같기도 하다. 그림이 사진이 될 수 없음을 고흐는 색에서 찾으려 했다. 그런 그도 데생에 꽤 비중을 뒀는데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사진을 따라 그리려다가 남의 그림으로 일탈한다. 그림으로 사실(진실)을 왜곡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카메라에 담은 사진을 보며 그리고자 하는 대상 외의 거리나 건물 등을 없애고 분명 있는 사실을 임의대로 빼고 더하기로 그리다보니 사실이 기대·예상·개연성으로 비현실이 된다. 이러길 바라는 마음, 이럴 수도 있을 마음은 현실에선 없는 것과 같다. 고흐의 실루엣에서 그렇듯이 내 마음이 그려진다.

 

이럴 수 있는 여자가 있다면? 내가 이럴 수 있을까? 개연성을 현실로 착각하지만 그리고 나서 사진을 보내준 이종덕 님부터 사진 본 딴 그림을 보냈다. 멋지다와 함께 훈훈하다는 반응. 또 다른 동지는 비옷을 뒤집어쓰고 흐릿하게 배경으로 처리한 여자의 마음에 동감한다고 했다. 사진에선 없는 여자인데 고흐를 흉내 낸 얄팍한 수를 들키고 말았다.

 

“들켰네요. 바로 내 마음이기도 하답니다.”

 

그림으로 따라 그린 뒤 스마트폰으로 몇몇 친지들에게 보내면서 나누는 공유로 인해 나의 실체화명상은 나 혼자만을 위한 명상이 되지 않는다. 이래서 부족하지만 또 그리게 된다. 명상에 중독되듯이.

 

그리고 나서 면사무소에 갔다. 그 앞에서 두 할머니가 한 양산을 함께 쓰고 바싹 붙어 얘기 나누고 있는 모습이 참 정겹다. 다른 것을 찍는 척하며 그 광경을 역시 스마트폰으로 훔쳐내는데 들키고 말았다.

 

“꽃도 없는데 왜 찍는다냐?”

 

할머니의 이 말이 더 뭉클하게 재미나다. 다음은 이 장면을! 중독은 다음을 기약한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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