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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중국, 중국인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었던 태자, 주자랑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5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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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11  17: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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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주자랑朱慈烺(1629-?), 숭정崇禎의 맏아들로 숭정 3년 황태자가 됐다.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시킨 후 행방불명 됐다. 전란 통에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출가해 승려가 됐다고 하지만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의 이름아래 반청反淸의 기치를 들고 거병했지만 모두 거짓으로 판명됐다.

이자성이 북경성을 함락시키자 숭정 황제가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하면서 일세를 풍미했던 주朱 씨 왕조는 멸망했다. 숭정 주유검朱由檢은 죽기 전에 자기 아들 주자랑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명령했다. 그 명 왕조 최후의 태자는 어디로 갔을까? 명나라가 멸망한 후 그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최초에 숭정 태자가 도망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만청滿淸의 손에 잡혔다고 여겼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마다 관점이 각기 달랐다. 『국수록國壽錄․숭정태자』의 기록을 보면 태자가 도망친 후 “두부를 파는 할미가 발견하고는 불쌍히 여겨 거두었다. 할미가 태자라는 것을 알고 성명을 숨기라고 했다. 3개월을 거뒀는데 가난해 부양할 수 없었다. 태자의 외삼촌 주周 황친에게 보내려고 했으나 황친이 두려워 모른 척 했다. ……형부刑部 옥에 보냈다”고 돼 있다. 『갑신전신록甲申傳信錄』 등 책에도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이런 설은 태자가 만청에게 잡혀 투옥됐다가 나중에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북경성의 상황이 무척 혼란하였던 터라 이러한 설은 온전히 믿을 수는 없다.

 
   
 

『석궤서石匱書후집』중 「열제본기烈帝本紀」와 「태자본기」의 관련 기록을 보면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함락시킨 후 태자를 찾으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어떤 사람이 태자를 잡아다 바쳤다고 했다. 태자는 병영에 구류됐는데 도망칠 방법을 찾지 못하자 외삼촌 주규周奎를 찾아갔다. 주규는 태자를 숨겨뒀다가는 자신에게 화가 닫칠 것이 두려워 태자를 만청 형부로 보냈다. 그리고 결국 태자는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이외에 『야사무문野史無文』4권에 “청병淸兵이 남경에 입성하자 융정戎政 조지룡趙之龍이 그를 예왕豫王에게 바쳤다. 그를 데리고 북으로 간 후의 행방을 알 수 없다. 목을 매 죽었다고 전하기도 한다”고 돼 있다. 이런 관점은 태자가 일찍이 도망쳐 남경의 남명南明 정권에 귀의했는데 청병이 남경을 함락시킨 후 포로로 잡혀 죽었다는 말이 된다. 결국 단순히 숭정 태자가 만청의 형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설도 판본이 여러 가지라서 도대체 어느 것이 진짜인지 단정할 수 없다. 또한 이외에도 태자의 행방에 대한 설이 많다. 태자의 행방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만청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설 이외에 또 다른 중요한 설은 숭정 태자가 이자성의 군대가 서행할 때 데리고 갔다고 한다. 『명사기사본말』중 다음과 같은 상황이 기록돼 있다. 이자성과 오삼계吳三桂가 전투를 벌일 때 “태자를 데리고 고강高崗에 올라 말을 타고 전투를 관람하였다.” 양측이 강화를 할 때 오삼계가 “우리 태자와 이왕二王을 돌려주고 신속히 경성을 떠나시오. ……이후 군대를 철수하였다”고 돼 있다. 이런 기록은 태자가 분명 이자성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자성은 오삼계와 처음 전투에서 패배한 후 북경을 떠나 서쪽으로 철군할 결심을 했다. 『명계유문明季遺聞』에 이자성이 북경을 떠나기 전후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자성이 “26일 낭패를 당해 북경으로 철군했다. ……28일 온 군대가 서쪽으로 철군하니 치중輜重이 얼마인지 셀 수 없었다. 태자, 이왕 모두 데리고 갔다고도 한다. 29일 궁전을 불사르고 후속 부대고 떠났다. 그 3년 후 이자성은 나공산羅公山에서 병사했다”고 돼 있다. 이 책은 추류기鄒流綺가 편찬한 것으로 그는 청나라 순치順治 연간 사람이다. 그가 이 책을 편찬하면서 「자서自序」를 순치 정유丁酉(1657)에 썼다고 돼 있다. 사료를 수집한 시기는 ‘적난賊難’이 일어나고 10여 년밖에 안 된 시간이다. 이 책의 「범례凡例」에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은 그들 부자가 친히 목격한 것을 위주로 했다고 돼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의 내용은 믿을 만하다.

 
   
 

『명계유문』의 기록은 『명사』에서도 이자성이 북경을 떠날 때 태자와 이왕을 데리고 서쪽으로 갔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숭정제자崇禎諸子」에 “경성이 함락되자 적들이 태자를 붙잡아 송왕宋王에 거짓으로 앉혔다. 적들이 패배해 서쪽으로 철군할 때 태자의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이자성이 오삼계와 회의한 후 오삼계에게 넘긴 ‘태자’는 분명 가짜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태자와 이왕은 줄곧 이자성의 군영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태자가 이자성을 따라 북경을 떠나 서쪽으로 철군한 이후부터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삼계 군영에서 도망친 태자의 향방과 진위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명계남략明季南略․태자일안一案』은 태자가 사람에 이끌려 황고사皇姑寺로 들어간 후 나중에 태감 고기高起와 함께 천진天津으로 도망치고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외에도 태자가 이미 “적군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기도 하고 북방에서 재난을 당했다고 하기도 한다. 결국 태자의 행방에 대한 전하는 말이 너무 많다. 어쩌면 다른 꿍꿍이가 있어 지어낸 말들일 경우가 대부분이라 보인다.

숭정 태자 주자랑은 이자성의 군대에 포로가 돼 서쪽으로 간 것은 확실하다. 앞에서 말한 『명계유문』과 『명사』를 분석해 보면 진상이 그렇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여기에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태자와 함께 포로가 된 동궁시독東宮侍讀 이사순李士淳이 그다. 이자성이 서쪽으로 철군한 후 숭정 태자의 기록이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 철군 중 태자와 이사순이 함께 도망쳤을 가능성이 가장 많다. 이런 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태자와 이사순은 전투 중 혼란을 틈타 도망친 후 여러 부류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간난신고를 겪으면서 마침내 이사순의 고향 월동가응粵東嘉應(현 광동廣東 매현梅縣)의 음나산陰那山에 도착했다. 숭정 태자는 청나라 철기군이 강남을 석권하는 것을 보면서 명 왕조가 부흥할 희망이 점차 물거품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신도 변방으로 도망쳐 구원을 청할 수 없었다. 태자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삭발하고 승려가 됐다. 이런 이야기의 근거는 오랫동안 매현 지역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명 왕조가 멸망한 후 가흥 음나산의 영광사靈光寺에 법명이 남다른 ‘奯활’라는 화상和尙이 나타난다. 명광사明光寺에 그 화상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신위의 이름이 희한하다. ‘태자 보살’이다. 매해 햇곡이 나올 때면 그 절의 주지는 ‘태자 보살’의 신패를 모시고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태자 보살에게 공양한다”며 탁발 다녔다. 오랜 시간이 흐르자 ‘태자 보살’이 ‘패자稗子 보살’로 와전됐고…….

신해혁명 이후 그 보살의 유래에 대해 알게 됐다. 바로 당시의 숭정 태자라고 했다. 당시 가응에는 유명한 인물 이사순이 있었다. 그가 태자를 데리고 음나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사순은 이이하李二何라고도 하는데 가응주 음나산 부근 사람이다.

『가응주지嘉應州志』에 이사순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이사순이 산서山西 “익성령翼城令을 역임할 때 탁월한 행적을 보여…… 한림원편수에 제수됐고 동궁시독을 맡았으며…… 역적 틈왕이 성도를 함락시키자 몰래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돼 있다. 이외에 청나라 강희 연간 유광총劉廣聰이 편수한 『정향리지程鄕里志』에도 “역적 틈왕이 성도를 함락시키자 태형을 받았다. 위명으로 더렵혀질 것을 염려해 몰래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돼 있다. 이런 기록을 보면 이사순은 일찍이 이자성의 포로가 됐으며 형벌도 받고 관직에 봉해지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명계북략』의 기록을 보면 이자성은 포로로 붙잡힌 관리들에 대한 정책은 자원自願을 원칙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향지의 기록은 이사순과 태자가 비슷한 대우를 받았음을 설명한다. 그렇게 둘은 사생師生관계로 인해 광동으로 함께 도망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사순의 후손들은 숭정 태자가 자신의 조상과 함께 광동으로 내려와 살았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가능성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의 하나의 설일 따름이다. 관련 증거들이 많지 않다.

역사적으로 혁명이 성공하면 전대 왕조의 후예들은 비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 역사에서 반복된 현상이다. 청대의 ‘말대 황제’가 평민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민주’라는 미명아래 있었던 지극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이전의 황손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골육상쟁으로 말미암아 죽고 죽이는 참극이 반복됐다. 그 까닭은 모든 권력이 황제 한 사람에게 집중됐던 봉건제도에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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