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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논의 흔적은 찾기 힘들지만 농수로 흔적은 일부남아

 

 

예로부터 제주지역은 지형적 특성상 논(水畓)이 농지면적의 1〜2%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밭에 물을 대어 논으로 만드는 개답(開畓)을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기록을 보면, 18세기 말 부터 수전(水田)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조선중기부터 계속하여 개답 공사가 행해졌음을 말해준다. 1900년 이후 제주지역에서 대표적인 개답사례는 화순 창고내 하류 지역, 중문 광베기와 대포 너베기 일대, 종달리와 하도리 경계의 갯벌, 토평 칼당원 지경, 광령 너븐들 지경 등이다.

 

예전부터 중문 마을 사람들은 중문천의 풍부한 물을 이용하여 논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여 왔다. 천제연의 양쪽 가에는 3개의 물골이 있다. 동쪽에는 웃골과 알골, 서쪽에는 섯골로 세 개의 물골 중에 섯골을 먼저 만들었는데 섯골은 지형이 험하고 군데군데 암반으로 되어 있는 곳이다. 원래 1893년 색달리 김천총씨가 착공하였으나 자본이 부족하여 추진 못하다가 대정군수를 지낸 송경연씨가 이를 인계받아 완성시켜 개여물케에 논을 만들었다. 그 당시는 단단한 암반위에 장작을 쌓아 불을 붙여 뜨겁게 달구거나, 독한 소주를 붓고 불을 붙여 암반이 뜨겁게 가열된 상태에서 찬물로 암반을 급속히 냉각시켜 깨지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한편 대정군수를 지내고 중문에 살았던 채구석은 ‘천제연 물을 이용하여 논을 만들면 만인이 살 수 있을 것’이라 하며 동중골 웃골 물골을 이용하여 중문 광베기 일대 5만평을 논으로 만들고 이어 대포지역 너베기 일대 2만평을 논으로 만들었다.

 

 

 

채구석(蔡龜錫)의 본관은 평강(平康)이고 일명 두석(斗錫), 아버지는 종관(宗寬)이며, 어머니는 홍씨(洪氏)이다. 1901년 이재수(李在守)의 난이 일어났는데,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이 채구석을 이 사건의 책임자로 조정에 무고했다. 상무사의 주도자이며 당시 대정군수였던 채구석은 난이 진압되는 동안 관민과 목사를 오가며 유혈 충돌과 난의 확산을 막고, 신부 보호에 진력하였지만 프랑스의 압력으로 억류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 결과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군수직에서 파면되고 3년간의 금고생활(禁錮生活)을 하였다.

 

이후 중문에 거주하면서 3여 년간 걸친 현장조사 끝에 천제연(天帝淵) 물을 이용하여 논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1907년 천제연 토지신(土地神)께 토신제(土神祭)를 지낸 다음, 개답공사에 착수했다. 2년여 간의 난공사 끝에 성천봉(星川峯, 베릿내) 아래로 물을 대어, 천제연 웃골 논을 만들었다.

 

중문천 개답 1차 공사는 천제연 1단 폭포 연못의 물을 끌어들여 시작했다. 암반지대인 천제연 물길을 뚫는 것은 대단히 힘든 공사였다. 채구석은 150m 가량의 암반지대를 뚫기 위해 소주 원액을 붓고 장작불로 바위를 폭파했다. 가장 난공사 지역은 천제연 1단 폭포 내 창구목과 화폭목이었다. 이 지역도 화약을 구해 화포를 만들어 바위를 부수고 뚫거나 장작불로 바위를 부수고 뚫어 2km나 되는 물골을 베릿내 오름 앞까지 대고 광베기 일대 5만여 평을 개답하여 나록(水稻)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

 

 

 

중문천 개답 2차 공사는 천제연 2단 폭포인 ‘알소’에서 너베기 지경, 즉 ‘알골수로’까지였다. 채구석 등에 의해 작성된 '입식계약서(立式契約書)'에 의하면, 이 해 윤 2월 착수했고 계약인은 1차 수로공사의 수주(水主)인 채구석 등 3인으로 되어 있으며 ‘광백이(너베기) 지경의 논공사은 각 3인이 공동 분담하고 ‘공사비를 내지 못하면 스스로 물러선다’고 기록되어 있다. 채구석 사후(死後)인 1923년 2차 공사가 완공되어 대포 너베기 일대 2만여 평의 논(水田)이 추가로 만들어 졌다. 당시 공사에 참가한 성인 품삯이 일당 3돈(엽전 30개)이었다고 한다.

 

1957년 8월에 대정 유림들이 대정군수 채구석을 기리어, 중문 천제연 입구에 ‘채구석기념비'를 세웠다. 비 앞면에 ‘통훈대부 대정군수 채구석기적비(蔡龜錫紀蹟碑)’라 새겨 있고 뒷면에는 그의 공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대정현의 천제연 폭포는 중문천이 흘러 영소를 이루었다. 마치 우렛소리처럼 들리고 비가 내뿜는 듯하며 용과 교룡이 그 속에 숨어 산다. 앞뒤를 두른 기암노수는 완연히 금병활화와 같아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탐승하는 사람으로서 그 경치와 또 맑고 깊은 물을 보아 탐미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 물을 당겨서 민생에 이롭게 한 사람은 없었다.

 

채구석은 이곳을 한번 보고난 후 이곳을 완상하기에만 그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것을 관개(灌漑)에 이용할 수 있다면 만인을 살릴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방도가 없겠는가를 궁리했다. 비록 못이 있는 곳이 낭떠러지가 심하여 물을 끌어올리기가 매우 어렵기 했지만 지세를 자세히 살펴보고 교묘하게 절벽을 따라 바위를 뚫고 한줄기 물길을 열어 놓았다.

 

이 물길을 성천봉 아래까지 2~3리 끌어당겨 5만여 평의 땅을 수전으로 개벽하였다. 농부나 소작인은 물론 누구나 지나는 사람은 지리를 잘 이용한 이 둑과 도랑을 보고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상고하건대 탐라는 옛날에는 수전이 없었는데 채 후가 이제 비로소 발명하였으니 비록 개척의 원조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작년 겨울 중문면민 부노(父老)들이 채 후를 위하여 비를 세우고 공적으로 적어 길이 추모하도록 하고자 향장보(鄕章甫) 이기휴가 나에게 글을 청하여 왔다(중략).

 

2003년 2월 26일 채구석의 공적을 기리는 또 다른 기념비가 천제연 3단폭포 옆에 세워졌다. 비석 앞면에 성천답 관개유적비(星川畓 灌漑遺跡碑)라고 새겨져 있고 비석의 뒷면에는,

 

 

 

공은 애민정신이 투철하고, 과학적인 사고와 개척정신이 뛰어난 선구자로, 당시 토목기술로는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1906년부터 1908년까지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역사에 길이 남을 천제연 도수로 공사로 완공, 황무지를 옥답으로 바꿔 주민들이 참으로 고귀한 쌀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도수로 시작부분이 단단한 조면암 절벽으로 이루어져 바위굴을 뚫어야 했다. 당시 바위를 뚫을 수 있는 장비는 오직 곡괭이와 정, 돌끌 정도였는데, 고심 끝에 장작불과 물을 사용, 온도차를 이용한 과학적인 공법을 동원하였다.

 

먼저 암반위에 장작불을 뜨겁게 지펴 바위를 가열시킨 뒤 다시 독한 소주를 부어 더욱 뜨겁게 가열한 다음 찬물을 부어 급속하게 냉각시켜 폭발하도록 하였다. 암석이 급격한 온도차를 이기지 못해 균열되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도수로의 경우도 급락지대(절벽 등)는 통나무에 홈을 파서 구유를 만들어 도수로에 연결하였고, 송이지대(화산회토라서 물이 쉽게 빠짐)는 물이 새나가지 않도록 찰흙으로 다지면서 튼튼한 도수로 완공하였다.

 

이에 성천답회(星川畓會)는 1세기동안 지키고 보존해온 유적을 조상의 지혜와 척박한 자연을 개척한 현장으로 후손들에게 길이 남기고자 이 비를 세운다.

 

현재 이 지역은 중문관광단지에 편입되어 이미 다 개발되었기 때문에 논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끊겨진 농수로(農水路)의 흔적은 일부 남아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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