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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제주 산업발전의 선구자 … 산남 제일부자 구두쇠 영감

 


제주도에는 ‘산북에는 박종실, 산남에는 강성익’ 라는 말이 있다. 강성익은 박종실과 함께 일제강점기 제주지역, 특히 산남지역 토지자본을 기반으로 해 제주경제의 큰 역할을 해오던 인물이다. 박종실은 근검절약과 신용 등을 상도의(商道義)로 자수성가해 모은 상업자본을 바탕으로 도소매업에 주력했는데 비해, 강성익은 토지자본에 기초해 운수업 분야에 주력했다. 또한 박종실은 상인단체 외에 정계진출에 관심이 없었지만 강성익은 상인단체는 물론 정치에도 관심이 많아 초대 제주도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원래 자본의 여유가 업는 도민이라 어떠한 사업을 경영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유리만 한 것이라면 외지의 대자본가가 출현하야 자본의 힘으로 독점하야 버리게 되니 도민은 호상단결하야 대자본의 침입을 금하는 동시에 모든 이권을 민중화(民衆化)하지 아니하면 생산보다 소비가 늘 초과하는 도민의 경제생활이 대단비참(大端悲慘)하게 될 날이 잇슬 것입니다(강성익, 동아일보, 1931년 1월 28일).

 

강성익은 개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던 1882년 9월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제주지역에 어업의 산업혁명이라 할 수 있는 어선의 동력화가 가속화되자 전복소라가 대량으로 잡혀 이것을 노리는 수산물 상인이 늘어났고 그 껍질로 단추를 만드는 공장이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강성익은 1918년 4월 서귀면 서귀리에 ‘강성익통조림공장’을 설립했다. 이 공장은 자본금 5000원으로 시작해 전복, 소라 등을 제조했다. 1925년에는 연간 노동력 6명으로 연간 730개 상자를 생산했으며 판매한 매출액은 8430원은 제주도에서는 일본인을 제외한 한국인이 설립한 ‘현승오통조림공장’(자본금 9000원, 생산액 1050상자, 매출액 1만3650원) 다음으로 2위를 차지했다.

 

강성익은 같은 시기에 자본금 1,000원을 투자해 조개 단추를 제조하는 ‘강성익조개단추공장’을 설립했다. 연간 노동력 20명, 연간 1760관을 생산했고 매출액은 6160원으로 당시 제주도에서 3위였다.

1920년 이후 제주도에는 조직형태를 가진 회사들이 잇달아 설립되기 시작했는데 이들 회사들의 대부분은 운수회사거나 해운회사였다. 강성익은 1927년에 설립한 ‘제주남부운수주식회사’의 취체역으로 취임하며 근대 기업가로 변신했다. 1927년 운송업에 본격적인 경영활동을 시작하면서 운수사업에 상당한 관심을 갖게 된 강성익은 이를 계기로 회사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소화운송주식회사’(1935)를 비롯해 ‘제일전분주식회사’(1939), ‘제주산업주식회사’(1941), ‘제주자동차주식회사’(1943) 등의 설립과 경영에 나섰다. 특히 제일전분주식회사는 1935년 서귀면에 강성익 단독으로 자본금 10만원을 투자해 설립한 전분제조 회사다.

 

해상교통뿐 아니라 육상교통에 잇서도 외인(外人)의 세력을 부식(扶植)하지 안케 하여야 겟습니다. 이삼개소의 조선인 자동차부의 번영함을 본 대도(大島)라는 자본가가 제주의 육상교통의 독점을 꿈꾸어 순환궤도(循環軌道)를 부설(敷設)하야 수압차(手押車)를 설치하얏다가 막대한 손해를 몽(夢)하게 되엇슴으로 그 손해를 보충키 위하야 제주일주자동차 허가를 신청하얏다고 합니다. 만일 그것이 허가만 되면 그야말로 독점이 될 것이니 미리 각면마다 주주를 모집하야 대책을 세우지 아니하면 안됨니다(강성익, 동아일보, 1931년 1월 27일).

 

제주남부운수주식회사는 1927년 3월 4일 우면 서귀리에 자동차 운수업을 영업목적으로 설립된 회사다. 이 회사는 대표 취체역 川崎增造, 송문준(宋文準)이 자본금 7000원을 공동으로 투자하여 합자회사 형태로 설립한 운수회사로 1주당 금액은 20원, 1주당 불입금액은 7000원이다.

 

제주소화운송주식회사는 1935년 7월 31일 제주읍 삼도리에 선박에 의한 화물 및 승객취급을 영업목적으로 설립했다. 이 회사는 대표 취체역 김근시(金根蓍)가 자본금 1만원을 단독으로 투자해 설립된 운수회사로 1주당 금액은 20원, 1주당 불입금액은 20원이다.

1944년 제주도내 3개 자동차회사(제주동부자동차주식회사, 제주통운주식회사, 제주남부자동차주식회사)를 통합하여 제주읍 삼도리에 제주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일본인 萩原駒藏이 자본금 50만원을 투자해 설립된 운수회사다. 영업목적은 자동차 운수사업 및 운행사업, 유가증권 취급, 기타 부대사업 등을 목적으로 회사 및 조합이 발기해 주식의 소유 및 출자를 했고 1주당 금액은 50원, 1주당 불입금액은 28원 80전이다.

 

한편 강성익은 서귀보통학교에 부지를 내놓고 경성제대(京城帝大)생약연구소 실습용으로 땅을 기증해 기업에서 얻어진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윤리를 실천하기도 했다. 1942년 4월 서귀포상공회의소 소장에 당선될 때 강성익의 재력은 ‘산남 제일’이었으며 재산은 거의 부동산 토지였다.

 

강성익은 계산에 밝고 거래가 분명했으며 받는 것도 철저하고 주는 것도 철저했다고 한다. ‘쓰지 않는 것이 곧 버는 것’이라는 절약정신, ‘꼭 지출해야 할 입장이라 할지라도 하루 이틀을 넘겨 지출’하는 지연전술, ‘주먹을 불끈 쥐듯 돈을 놓아 버리지 말라’는 구두쇠 철학이 강성익의 생활철학이었다. 그는 이 철학을 바탕으로 제주지역 교통, 운수업의 창시자(제주버스), 수출업의 선구자(해산물 가공 수출업)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산남의 제1부자, 제주 산업발전의 선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구두쇠 영감으로 더 유명했던 강성익은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나 젊은이들에게 ‘주먹 쥐는 철학’을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돈 없으면 거지가 되거나 도둑놈이 되는 거야. 돈 버는 데는 귀천이 없어. 열심히 벌어야 해. 부자가 되려면 번 돈을 쓰지 말고 꼭 쥐고 있어야 해요. 그렇다고 돈만 쥐면 천해져요, 정신을 함께 쥐어야 하지.

 

우리 속담에 정신을 차리면 호랑이가 물어가도 산다고 그랬지? 캄캄한 밤에 산길을 가 봐요 무섭지. 그러나 주먹을 불끈 쥐면 힘이 생겨, 바로 그거야, 1원짜리 동전 한 잎도 새나가지 않을 정도로 항시 주먹을 쥐고 살아 봐요. 틀림없이 부자가 되지.

 

마지막으로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던 강성익의 어록(語錄) 한편을 소개한다.

 

민주주의가 별 것인가. 위로 골고루 아래로 족족 권리를 누리며, 잘사는 것이 민주주의지. 요즘 젊은이들! 신문을 잘 안 본단 말야. 소주 몇 잔 값이면 세계정세를 환히 알 수 있을 텐데.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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