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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내부 갈등, 부채 증가, 일본의 계획적 덤핑 등 경영 악화로 도산

 

개항 이후 제주지역과 외부를 연결했던 최초의 해상교통은 1894년 이종문(李鍾文)이 인천 굴력상회(堀力商會)와 교섭하여 연안기선(沿岸汽船)을 한 달에 한번 씩 제주에 부정기 취항하도록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취항은 하물동량이 부족하고 승선 인원도 소수여서 수지가 맞지 않아 개설 3년 만에 폐지되었다.

 

이후 1908년 부산기선회사에서 부산-제주 간 월 1회 제주노선을 운항하였으며, 목포에서 복전회조점(福田回漕店) 소유 소기선(小汽船)이 제주-목포 간을 월 6회 왕복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의 명령에 의거한 정기 항로가 개설되었는데 명령 항로인 목포-제주 간 항해(都丸, 3,387톤급)의 운항코스는 목포-추자-제주(산지항)-조천항-제주(산지항)-추자-목포였다.

 

1913년에는 총독부 이토 해사 과장이 제주도를 시찰하던 중 ‘도 일주 항로를 개설한다면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목포를 기점으로 한 2척, 부산을 거점으로 제주도를 일주하는 2척을 매월 8회 정기적으로 운항하도록 하였다. 이 운영을 맡은 조선우선회사(朝鮮郵船會社)는 목포-제주 간 월 9회, 부산-제주 간 월 5회 운항하였고, 일본 대판을 기점으로 하여 부산을 경유하여 제주도를 일주하는 월 2회 운항과 목포를 경유하여 제주도를 일주하는 월 3회 운항의 항로를 개설하였다.

 

1922년 12월에는 일본과의 직항로가 개설되었다. 제주상선회사가 발족되어 부산-제주간 항로개설에 이어 제주-대판 직항로가 개설되었는데 이때부터 제주와 일본 대판과의 교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 항로의 기항지는 제주도내 10개의 크고 작은 항구였다. 이처럼 비교적 접근이 용이한 도내 각 기항지에서 균일한 요금으로 안전하게 일본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도일(渡日)하는 제주도민이 증가했다. 당시 일본 내 노동력 부족문제와 일본 내에서 제주도민이 양질의 저렴한 노동력으로 인식되고 있던 점 등도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주도민의 일본 진출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과의 직항로 개설로 제주도와 일본으로의 왕래자가 늘어나고 상품 교역량이 증가하여 운송 능력의 확장이 요구되어 짐에 따라 참여 업체가 더 생겨났다. 즉, 제주-대판 항로가 활성화되자 3개 회사의 경쟁 체제로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1928년 고순흠은 기업동맹을 결성하여 1,500톤급 순길환호를 대판-제주 항로에 취항시켰다. 1930년 3월 김문준, 김달준, 문창래 등이 ‘조선 사람은 조선의 배로’라는 슬로건으로 내걸고, 제주도민의 오사카 도항(渡航)을 위해 ‘제주통항조합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준비위원회에서는 ‘통항조합 뉴스’를 발행, 배포하고 제주도민을 조합원으로 하고, 조합이 직접 선박을 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소비조합을 만들었다. 같은 해 4월 21일 오사카 거주 제주출신 4,500명을 조합원으로 가입시켜 조합비를 각출하였다.

 

제주통항조합준비회(濟州通航組合準備會)가 작년 사월 일일에 구성되자 내외 항운계(航運界)에서는 한층 더 그 성장을 주목한다 함은 긔보한 바와 갓거니와 이래 일개년을 두고 동 준비회 간부 일동의 활약과 도민 이십사만의 열렬한 지지로써 백륙십이리 중에서 일백십이리의 가담을 비롯하야 회원만 만여 명을 포용한 제주통합조합창립대회는 오는 이십일일 오전구시부터 대판시내 중앙공회당에서 대의원제로 개최한다(동아일보, 1930년 4월 12일).

 

1931년 11월 1일 제주통항조선은 교룡환(餃龍丸)을 취항시켰으며, 1932년 12월 1일부터 1천2백톤급 복목환(伏木丸)으로 교체시켜 취항했다. 이처럼 제주통항조선은 제주도민의 일본 진출이 늘어나면서 일본인 업체만이 폭리를 취하게 되자 이에 반발하여 제주도민 보호를 목적으로 제주사회 스스로가 일본에 진출하는 제주도민을 돕기 위해 설립되었다.

 

대판에 잇는 조선동포 일만 명 이상 조합원의 절대지지 하에 조직된 동아통항조합(東亞通航組合)에서는 그동안『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의 배(船)로!』라는 슬로간 알에 활동을 계속하는 일방 북일본긔선주식회사(北日本汽船株式會社)에서 복목환(伏木丸)을 매수할 계획을 세우고 비밀활동 중 이라함은...

 

조합에서는 드디어 그 성과를 보게 되어 지난 삼일에 구선주인 전긔기선회사로부터 매수수속이 완료되엇다 한다. 그리하야 동 복목환은 지난 사일에 소재지인 북해도 소준항(北海道 小樽港)을 출발하얏는데 도중에서 험악한 긔상관계로 부득이 능등(能登)이라는 곳에서 약 삼일간을 정선 피란하다가 지난 십이일 일은 아츰에 비로서 태평양상의 거츤 안개를 헤치고 새주인을 차저 대판 축항(築港)에 도착하얏다 한다.

 

그리하야 동 조합에서는 동 복목선의 매선 축하회를 동선 내에서 천여 명의 조합원 출석리에 동조합장 현길홍(玄吉弘)씨의 개회사로 성대히 거행하얏는데 특히 동 조합역원을 대표하야 문창래(文昌來) 김달진(金達鎭) 량씨의 상세한 경과보고와 래빈 측을 대표하여 본사 대판지국 김긔범(金基範)씨의 의미심장한 축사가 잇섯다. 우리의 손으로 긔선 한척을 완전히 매수하고 태평양우에서 축하회를 연것은 근래에 드믄 깃븐 소식이라 하겟다(동아일보, 1931년 11월 20일).

 

그러나 동아통항조선의 경영은 순탄하지 못했다. 1931년 12월 6일 대판-제주 간 항해를 마치고 제주에서 대판으로 귀항하던 복목환이 구좌면 세화리(細花里) 해안에서 좌초되었다가 이후 일본 광도 현미도(廣島 懸尾島)에서 수리를 마치고 1932년 1월 4일에 운항을 재개하였다.

 

이러는 과정에서 통항조합의 항일 운동적 성격에 대한 조합원 내부의 갈등과 부채 증가 등 운영난으로 인한 경영의 문제도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길홍, 강호경, 김달준 등은 통항조합을 운동단체가 아닌 순수 경영단체로 전환시켜 부채를 정리하고 운영을 합리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복목환을 ‘무산계급의 배’로 규정하고 동아통항조합을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던 반제동맹(反帝同盟) 소속 조합원들의 반대가 심했다. 또한 당초 50전(錢) 하던 일본 배의 선임을 3원(圓)으로 내리는 등(동아통항조합은 6圓50錢) 일본의 계획적인 덤핑으로 경영이 악화되어 도산하였고 1934년 1월 조합은 해산되었다. 그 이후에는 제주-대판 간 노선은 2개 업체만이 취항하게 되었다.

동아통항조선 교룡환 출항(東亞通航組船 餃龍丸 出航) 우리 도항은 우리배로 제주도항 로동자 단결(濟州渡航 勞働者團結)[寫](동아일보, 1930년 11월 7일)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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