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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4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홍환안紅丸案은 명 왕조 3대 사건 중 하나다. 태창泰昌 원년(1620), 광종光宗의 병이 중하자 이가작李可灼이 선단仙丹이라며 ‘홍환紅丸’을 봉헌했다. 광종이 복용 후 죽었다. 신종神宗의 정귀비鄭貴妃가 독을 넣도록 했다고 의심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주모자를 색출하기 위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그 사이 정쟁과 개인적 원한이 뒤섞이면서 연좌돼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홍환’은 홍연환紅鉛丸이라고도 부르는 궁정에서 특별히 조제한 춘약春藥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볼품없는 창고지기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던 미미한 관리 도중문陶仲文이 ‘홍환’을 황제에게 바쳤는데 효험이 있어 가정嘉靖황제의 총애를 받아 일약 조정의 대신이 됐다고 한다.

 

 

 

 

그 ‘홍환’의 제조법은 특별했다. 소녀의 첫 월경을 금이나 은으로 된 그릇에 받아야 하고, 자정 전후 첫 번째 이슬과 오매烏梅 등 약물을 더해 일곱 차례 끓인 후 끈적끈적한 액체로 농축한다. 거기에다 유향乳香, 몰약沒藥, 진사辰砂, 송지松脂, 뇨분尿粉 등을 고르게 뒤섞고 불로 정련한 후 마지막으로 꿀을 더해 환으로 만들면 약이 된다.

 

『명실록明實錄』 기록에 보면 가정 연간, ‘홍환’을 조제하기 위해 소녀 1080명을 선발했다고 돼 있다. 가정 26년 2월 기내畿內에서 11살에서 14살 소녀 300명을 선발해 입궁하게 했고 31년 12월에 또 300명, 34년 9월에 민간에서 소녀 10세 이하 160명을 선발했으며 같은 해 11월 호북성과 호남성 민간에서 여자 20여 명, 43년 정월 궁녀 300명을 선발해 입궁시켰다. 아직 미성년자에 불과했던 그 소녀들은 나중에 가정 황제가 약을 조제하고 난 후 ‘약을 달인 뒤의 찌꺼기’가 됐다.

 

무정한 가정 황제가 자신의 불로장생을 위해 그렇게 여자아이들을 학대했다. 그야말로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끝내 중국역사상 특별한 궁녀 폭동이 일어났다. 양금영楊金英을 주축으로 한 십여 명의 궁녀들이 분노에 치를 떨며 한꺼번에 가정 황제를 누르고 줄로 그의 목을 묶어 당기고 눌러 교살하려 했다. 물론 실패로 끝났지만……. 더욱 불가사의 한 것은 ‘홍환’ 두 알이 광종 주상락朱常洛의 목숨을 앗아가면서 명대 말기 유명한 사건 ‘홍환안’이 발생했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만력萬曆 만년에 주상락은 이미 태자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음험하면서도 악랄한 정귀비는 주상락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의 비위에 맞춰 8명의 미녀를 바쳤다.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던 주상락은 여인을 탐하면서 점점 체력이 고갈됐다. 제위에 오른 지 10여 일도 되지 않아 주색이 과도한 탓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제하지 않고 변함없이 여자들과 멋대로 놀아났다. 어느 날 밤, 흥분을 북돋기 위해 주상락은 ‘홍환’ 한 알을 복용했다. 결과는? 몹시 불안하고 초조해졌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정신이 극도로 흥분된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시침한 오찬吳贊이 어의 최문승崔文升을 불러 진료케 했다. 최문승은 황제가 음허陰虛로 기력이 쇄진한 것을 모르고 사열邪熱(pathogenic heat)이 내부에 축적된 것으로 여기고는 화기를 변으로 배출시키는 독한 약을 썼다. 결국 주상락은 하룻밤 사이에 30여 차례나 설사를 하는 상태가 돼 매우 위급해 졌다. 그렇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로 격렬하게 논쟁하면서 남 탓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중신 양련楊漣은 상소를 올려 최문승이 설사약을 오용했다고 질책했다. 최문승은 자신이 오용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홍환’을 복용해 병이 중해졌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동림당 사람들은 최문승이 약을 잘못 썼다고 질책했을 뿐만 아니라 ‘홍환’의 일을 강조하며 황제의 명성에 먹칠했다고…….

 

병환이 중한 주상락은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홍환’을 잊지 못해 한 알을 더 복용하려 했다. 홍려사승鴻臚寺丞 이가작은 곧바로 홍색 환약을 바쳤다. 주상락은 복용한 후 어떤 기미도 없었다. 저녁이 되자 주상락은 또 한 알을 복용하려 했다. 이가작이 홍색 환약을 건넸다. 얼마 없어 황제는 손으로 명치를 감싸며 두 눈을 크게 뜨고 몇 번 몸부림치다 숨을 거뒀다. 주상락이 황제 자리에 앉은 지 30일밖에 안 된 날이었다. 당연히 연호도 아직 제정하지 않은 상태였고!

 

 

 

 

‘빨간’ 두 알이 인명을 앗아갔으니 조야가 진동했다. 홍색 환약이 ‘홍환’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도대체 무슨 약이었을까?

 

병이 중한 황제에게 왜 그런 환약을 진상했을까? 최문승과 이가작은 어떻게 그리도 대담할 수 있었을까? 최 씨와 이 씨의 뒤에서 사주한 사람이 있는 걸까?

 

명대 말기 조정 내에 당파 투쟁이 격렬했다. ‘홍환’ 사건이 발생하자 당파 간 투쟁이 더욱 격렬해 졌다. 이가작이 바친 ‘홍색 환약’이 ‘홍환’으로 일반적인 춘약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춘약은 열약熱藥에 속하는 것으로 황제가 춥고 차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설사를 했으니 ‘火’로 ‘水’를 제어하는 것은 증세에 맞는 처방이라 보았다. 이가작이 춘약을 보약으로 삼아 황제에게 올린 것은 그저 도중문과 같이 되고자 했을 뿐으로 운이 안 따랐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그 홍색 환약이 도가에서 정제한 금단金丹이라 보았다. 구명 금단으로 위독한 환자에게 복용케 해 완치되면 명예와 재물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고 죽으면 병이 중해 치료하기 어려웠다고 여기면 될 일이었다고 보았다. 이가작은 어쩌면 그렇게 생각해 처신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떤 부류는 춘약으로 위중한 환자에게 복용하게 한 것은 통념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이가작은 분명 자신이 어의도 아니고 환자가 황제인데 치료가 잘못되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왜 그렇게 대담하게 약을 복용하게 했을까? 하물며 광종 주상락이 성욕에 탐닉해 병을 얻은 것으로 정양靜養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흉포한 약을 복용하게 했을까? 이런 것으로 볼 때 이가작은 분명 사주를 받아 황제를 모살할 뜻을 품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더 깊이 캐보면 최문승은 정귀비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최문승은 죽을죄를 졌다! 최문승의 막후에서 사주한 사람도 조사해야 한다!

 

이외에 이가작은 수보首輔 방종철方從哲이 궁으로 데리고 왔기 때문에 방종철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방종철은 자신에게 죄를 물을까 걱정돼 급히 퇴직을 주청했다. 그러나 퇴직한 후에도 그를 성토하고 엄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상소가 많았다. 방종철은 자신을 위해 전력으로 변호하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 백성을 위해 삭탈관직해 줄 것으로 요청하고 중원을 떠나겠다고 했다. 많은 대신들이 그에게 책임을 전가한 까닭에 끝을 맺기 어려웠다.

 

끝내 막 입각해 쌍방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대신 한광韓爌이 상소를 올리면서 평정을 되찾았다. 이가작은 변방으로 쫓겨났고 최문승은 남경으로 좌천됐다. ‘홍환’ 사건은 그렇게 종결된 듯 보였으나 여파가 있었다.

 

 

 

 

천계天啓 연간 환관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한 후 ‘홍환 사건’을 뒤집어 버렸다. 방종철을 성토했던 예부상서 손신행孫慎行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변방으로 유배됐다. 최문승을 공격하였던 동림당 사람들도 죄를 뒤집어썼고 영수 고반룡高攀龍은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숭정崇禎이 죽은 후 남명南明 왕조에서도 이 문제로 당쟁이 벌어지고 명 왕조가 철저하게 망할 때까지 지속됐다. 자그마한 환약 두 알로 벌어진 당쟁으로 국가가 멸망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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