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4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금의위錦衣衛는 관서官署 이름이다. 금의친군도지휘사사錦衣親軍都指揮使司의 줄임말이다. 명明 홍무洪武 15년(1382)에 설치됐다. 처음에는 황궁을 호위하는 친군이었고 나중에는 주원장朱元璋의 특명을 받아 형옥刑獄 관리를 겸하게 됐고 직접 황제의 명을 받아 일을 처리했다. 형벌을 집행하는데 잔인하고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병권兵權, 형권刑權을 모두 가진 황제 독재의 수족으로서 영락제永樂帝 이후로는 환관을 장관으로 하는 동창東廠․서창西廠과 더불어 공포정치의 주역이 됐다.

 

 

 

 

명 태조 주원장은 종군하며 십 몇 년을 전쟁을 치른 끝에 마침내 대명大明 정권을 건립했다. 왕조 건립 후 그는 그를 도운 개국 공신들에 대해 불안감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래서 ‘금의위’라는 특무 조직을 설립해 대신들을 감시하고 정찰하는 업무를 맡겼다. 금의위는 원래 황궁을 호위하는 친군親軍으로 황제 출행 의식을 담당했다. 나중에 주원장은 형옥을 함께 관리하도록 했다. 순찰과 수색, 검거의 권력도 내려줬다. 그리고 심복 대신과 외척을 지휘관으로 앉혔다. 밑으로 동지同知, 첨사僉事, 진무사진무鎭撫使鎭撫 등 관직을 두었고 그 아래로 관교官校를 두어 전문적으로 정찰을 맡겼다.

 

대신들이 밖에 있거나 집에 있을 때 어떤 행위를 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정탐했다. 어떤 혐의라도 발견되면 옥에 갇히거나 심지어는 죽임을 당했다. 주원장이 30여 년의 재위 기간에 쇠털같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가 많아졌다. 거리거리마다 포진해 있으면서 조야 내외와 문무 관리들의 움직임을 엄밀하게 감시했다. 사람들은 막으려 해도 막을 재간이 없었기에 하루 종일 마음 졸이며 살 수밖에 없었다.

 

이부상서吏部尙書 오림吳琳이 늙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고하고는 하향했다. 주원장은 그의 고향에 특무를 파견해 은밀히 조사했다. 농민 모양을 한 노인을 보고 “여기에 오상서가 있는가요?” 묻자 노인이 답하길 “오림이요”라고 대답했다. 주원장은 그 보고를 듣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태자의 스승 송렴宋濂은 사람됨이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에 대해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암암리에 감시를 붙였다. 하루는 송렴이 집에서 친구들을 불러 주연을 벌였다. 이튿날 아침 조정에 나온 주원장은 누구를 청했으며 무슨 요리를 준비했는지 등을 꼬치꼬치 따져 불었다. 송렴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주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을 표했다. 원래 첫날 금의위 사람이 송렴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나중에 주원장은 “송렴은 19년 동안이나 나를 모셨다. 그 동안 거짓말을 한 적도 한 번도 없다. 다른 사람이 나쁘다고 한 적도 없다. 실로 어진 사람이다!”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호유용胡惟庸 사건이 발생한 후 송렴의 손자 송신宋愼이 도당이라고 폭로되자 주원장은 즉각 금의위를 파견해 이미 늙어 낙향한 송렴을 옛집에서 체포해 경성으로 압송한 후 사형을 내리려고 했다. 마馬 황후가 간곡히 부탁해 사형을 사면 받고 사천四川 무주茂州로 종군하도록 명받았다. 70여 세의 송렴은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먼 길의 피로가 겹쳐 도중에 병사했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공신 태사 이선장李善長을 고발하는 사건이 터졌다. 호유용의 역모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호유용의 모반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검거해 사실 관계를 따지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대역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77세의 이선장과 그 가족 전부가 주살 당했다. 주원장 자신이 하사한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철권鐵券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연이어 주원장은 또 한 번 호유용의 도당을 색출한다는 명분아래 문무 관원 및 그 친속 15000명을 도살했다.

 

3년이 지난 후, 금의위는 또 양국공凉國公 남옥藍玉을 고발한다. 조진曹震 등과 결탁해 주원장이 사냥을 나갈 때 기회를 틈타 시해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주원장은 그 고발을 믿고 금의위를 동원해 체포하도록 했다. 남옥은 개국공신 상우춘常遇春의 처제로 홍무 후기의 중요한 장수였다. 그의 수하 맹장 십여 명은 명망이 대단했다. 남옥은 용감하게 전투에 임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었다. 그러나 공이 많다고 스스로 자부해 교만해졌고 타락했으며 양전을 독점하고 소금을 사사로이 착복했다. 노비들을 수도 없이 거느리고 백성들을 협박해 강탈했다. 주원장은 일찍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그 고발을 기화로 남옥 도당을 모두 체포한다. 주원장이 친히 심문을 한 후 형부에 이첩한 후 고문을 가해 대대적인 옥사를 일으켰다. 남옥과 접촉한 대신들도 모두 한 통속으로 몰았다. 이 옥사 후에 주살된 사람이 15000여 명에 이른다. 이렇게 군에서 공이 많은 공신들이 거의 일망타진됐다.

 

주원장은 금의위를 이용해 사람들의 언행을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대대적으로 옥사를 일으켜 사람들의 사상까지도 통제했다. 출신이 빈천하고 승려가 됐던 전력이 있어 사람들이 자신의 전력을 들춰내는 것을 금했다. 건너 산을 보고 꾸짖기 식으로 자신을 풍자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관료들의 언어에 주의했다. 자신을 풍자하는 듯한 구절이 있으면 찾아내 주살하기도 했다. ‘피휘避諱’를 엄격하게 적용해 자신을 능멸했다며 항주부학杭州府學 교수 서일기徐一夔를 처형시켰다. 이러한 예를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되자 조야의 문인들은 금의위가 무서워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고 문자옥文字獄이 두려워 함부로 글을 쓰지 못했다. 인문이 사라지고 바야흐로 공포의 시대가 왔다.

 

누가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그랬던가. 중국 봉건주의 사회에서는 칼 앞에서 펜은 무기력을 넘어 하등 쓸모가 없는 존재였다. 그렇게 만듦으로써 주원장은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물론 그의 후손들은 결국 골육상쟁의 피바람을 일으켰고 자멸의 길을 걸었지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