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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훈의 시평세평] 보리가 나는 망종(芒種)때까지 연명하며 버텨내야했던 시절

참 좋은 때입니다. 바람이 살랑만 대도 신록(新綠)의 맑은 향기가 한껏 느껴져옵니다.

 

언제부턴가 미세먼지 타령이 일상처럼 돼버렸지만 연록(軟綠)의 싱그러움 앞에는 별 것 아닌듯 싶습니다.

 

고사(高士)는 문향(聞香)하는 법-.

 

이즈음의 푸르름은 쥐어짜면 싯퍼런 물이 뚝뚝 들을 듯한 한여름의 그것과는 달라 땡볕에 쬐면 금세라도 바랠 것같은 연하디 연한 어린 자연의 살내음을 듣습니다.

 

수필가 이양하(李敭河ᆞ1904~63)선생께서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며 '그 중에서 봄과 여름이 혜택이 많고 그 가운데서도 봄, 봄 가운데에서도 만산(萬山)에 녹음이 싹트는 이 때일 것이다.'라고 예찬(禮讚)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다른 한 켠으론 섭섭함도 없지 않으니 벌써 입하(立夏)를 지나 어느덧 본격적인 여름으로 달려가는 계절의 속절없음을 어찌하리오?

 

 

봄바람에 취하는가 싶기 무섭게 주명(朱明)이라니...

 

시·거문고·술을 좋아해 '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이라 불리는 고려 때 문호이자 풍류객 이규보(李奎報ᆞ1168~1241ᆞ白雲居士)선생도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봄한테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도 대꾸조차 없다(問春何去春불言)'며 '봄아, 사람에게 박정하기 누구라 너에 비할소냐(與人薄情誰似汝)!'고 탄식했으니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趙云仡ᆞ1332~1404)는 '이 세상에 오래 있으면 인간의 시비를 배울 뿐(久在人間學是非)'이라며 '가려거든 행여라도 머물 생각일랑 하지말라(春風好去無留意)'고 푸념(?)을 하기도 했어요.

 

예전엔 이처럼 철이 바뀌는 걸 무심히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봄이 가는 건 인생에서 청춘이 가는 걸로 여겨 빠트리지 않고 '송춘(送春ᆞ*餞春이라고도 함)'을 했죠.

 

배포가 맞는 친구들과 함께 한 잔씩 걸치며 시도 짓고, 노래도 하고, 거문고도 퉁기면서 말입니다.

 

이 얼마나 멋드러진 삶입니까?

 

하지만 어느 시대고 늘 밝음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죠.

 

사실 송춘이고 전춘이고 행세 깨나 하는 부류의 사치스런 얘기일 뿐 이 땅의 '99'인 민초들에겐 이 때가 태산(泰山ᆞ*지금 같으면 에베레스트겠죠! )보다 넘기 힘든 '보리고개'였으니까요.

 

대부분 남의 소작을 부치거나 혹 제 땅이라도 고작 메뚜기 마빡만한 땅뙈기이다보니 이것저것 떼고나면 늘 양식이 부족해 이때쯤엔 바닥이 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보리가 나는 망종(芒種)때까지 연명하며 버텨내기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죠.

 

실제로 아주 오래전엔 이 고개를 미처 넘지 못하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제법 됐다고 합니다.

 

1960년대만 해도 보릿고개를 넘기고 나면 마을마다 여기저기 새 무덤이 생기곤 했으니까요.

 

특히 엄마 젖이 말라 피어보지도 못한채 스러져간 어린 것들이 묻힌 애총은 왜 그다지도 많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먹먹하기만 합니다.

 

사실 그 시절 별의별 것을 다 먹었습니다.

 

달래ᆞ냉이 ᆞ씀바귀ᆞ쑥ᆞ민들레ᆞ엉겅퀴 ᆞ취ᆞ명아주 ᆞ비름ᆞ머위 ᆞ소루쟁이 ᆞ삽주 ᆞ으아리 ᆞ둥굴레ᆞ닭의장풀 ᆞ혼잎ᆞ뽕잎 등 나물은 물론 청미래덩굴ᆞ칡ᆞ무릇ᆞ백합 등의 뿌리에다 소나무 속껍질인 송기(松肌)ᆞ느릅나무껍질 등 문자 그대로 초근목피(草根木皮)가 주식(?)이다시피 했었으니까요.

 

그것도 양을 늘려야하기 때문에 싸래기라도 한웅큼 생길라치면 가마솥에다 물을 넉넉히 잡은 뒤 이것저것 때려넣고 끓여내 멀국으로 배를 채우기 일쑤였죠.

 

심지어 그릇을 만드는 '동이찰흙(田丹土)'이나 흰찰흙(白土)으로 옹심이를 만들어 죽을 쑤어먹기도 했고 수수와 옥수수의 깜부기까지 먹었습니다.

 

그러니 애들은 산이야 들이야 쏘다니며 찔레며 싱아며 삘기며 메싹은 물론 진달레꽃, 아카시꽃, 칡꽃 등 먹을 만한 것이면 닥치는대로 먹어댔죠.

 

미꾸리, 돌고기,가재 등 물고기도 그렇고 개구리,땡삐 애벌레,굼벵이 등도 빼놓을 수없는 영양식(?)이었습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전통적인 구황(救荒)식물이 초목을 합쳐 851가지나 되고, 그 중에서 요즘도 평소 시골에서 식용을 하는 것만 304가지나 된다고 하니 웬만한 식물은 죄다 먹었다고 볼 수있습니다.

 

어릴 적 어른들로부터 "단오 전이면 모든 식물의 어린 순을 먹어도 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배터지도록 먹어봤자 워낙 영양가가 부족하다보니 방귀 한 번 뀌면 훅 꺼져 얼굴은 부황증(浮黃症)으로 누렇게 뜨거나 허옇게 버짐이 핀 채옇고 눈다래끼와 부스럼을 달고 살았었죠.

 

모진 게 목숨이라 죽을 둥 살 둥 하면서도 겨우 '보릿동'을 대면 햇보리가 나는데(*이때를 麥秋라 함), 도저히 그때까지 기다릴 수없어 보리누름이 오기 무섭게 풋바심을 해먹을 수밖에 없던 게 이 땅 민초들의 가엽고도 눈물겨운 초상(肖像)이었습니다.

 

그런 와중(渦中)에서도 가난을 대물리지 않겠다며 자식을 공부시키려 5할의 장리(長利)는 커니와 이자가 100%인 갑리(甲利), 또 그 걸 제 때 못갚으면 이자를 원금에 합쳐 다시 빌린 것으로 치는 장복리(長複利),갑복리(甲複利)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그 시절 부모들은 사람 형상을 한 '자식 껍데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 젊은이들한테 이같은 얘기를 해주면 "아무리 그랬겠냐?"고 콧방귀를 뀌지만 이따금씩 옛날을 회상하며 재현하는 먹방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습니다.

 

보릿고개하면 빼놓을 수없는 게 이팝나무입니다.

 

 

 

한창 굶주림에 지쳐 보릿고개를 넘다보면 소담스레 하얗게 피어나는 이 나무의 꽃이 마치 이밥같다고 해서 이름붙여졌다는데, 요즘 만개(滿開)해 오가는 이들에게 그 시절을 전설처럼 증언하고 있습니다.

 

꿈에라도 한 번 쇠고기국에 이밥 한 그릇 먹어보는 게 원(願)이었던 사람들에게는 실하게 핀 꽃을 차라리 흰 쌀밥이라 믿고싶은 홀림이 남아넘치기에 충분했을 테지요.

 

나도 꽃이 활짝 핀 이팝나무를 멀리서 보노라면 어릴 적(중ᆞ고생 때) 생일날이면 엄마가 특별히 고봉으로 눌러 담아주시던 사기밥사발이 지금도 절로 떠오르곤 합니다.

 

매년 활짝 핀 이팝나무를 볼 때마다 떠올리는 시 한 구절이 있습니다.

 

'초근목피에 주린 배를 채우면 생목이 올라(중략)/노고지리는 포만증을 새기느라 진종일 울어야 하지만/아예 배고픔을 내색않는 문둥이는 얼마나 울어야 하나'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韓何雲ᆞ1919~75)의 《춘곤(春困)》중 일부이죠.

 

정말 그 땐 왜 그랬을까요?

 

올해도 또 한 번 두 겹으로 싸인 나의 봄을 보내며 웃다 울다 하는 내모습을 봅니다.

 

웃기는 놈같으니-.  [제이누리=이만훈 전 중앙일보 라이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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