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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농촌의 경제 활동 기회 충분 … 일본 노동시장 진출로 변화 모색

또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경제학·사회복지학 분야에 능통한 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의 ‘제주근대경제사 신문읽기’입니다. 비록 지금의 경제시스템과 여건이 구비돼 있다하지만 제주 역시 과거의 실타래가 얽히고 설킨 땅입니다. 기업과 산업이 척박했던 제주에도 그 맹아가 등장하던 시기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제주사회와 경제상황을 살핀 ‘신문’을 통해 그 시절의 기업·경제가 지금 우리 제주의 삶과 어떻게 연관·연동되고 있는지 가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단언컨대 제주사 정립을 위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분야는 화전(火田史) 연구다. 30여 년 전 한국사를 전공하던 선배가 ‘제주근대사 연구의 시작은 화전연구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화전의 존재와 의미, 무엇보다 화전연구의 중요성을 전혀 몰랐다. 제주지역의 전통농업 역시 화전을 빼고 논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제주의 전통농업 측면에서 화전을 살펴보고 다음 기회에 제주근대사 측면에서 본 화전과 화전민을 정리하려 한다.

 

제주도에서는 신라시대 이전부터 화전농업이 이루어 졌다. 김상호교수(1978)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제주목(濟州牧) 건칭연혁조(建治沿革條)>를 근거로 제주도 개척은 화전농업을 축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제주도의 개척은 신라시대는 물론 그 이전에 있어서도 화전농업을 중심으로 이루어 왔다는 것이다.

 

고려사고기(高麗史古記)에도 제주도 주민들이 농업정주가 이루어지고 촌락이 형성되고 난 뒤 촌락주변에는 농경목축지가 분포하고 있었다고 한다. 촌락주변의 농경 목축지가 어떻게 경영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경목교체방식(耕牧交替方式)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당시의 토지이용 역시 경목교체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농경을 이끈 생산단위는 정주가구이면서 씨족단위로 기능하고 있었다. 나아가 정주지 주변의 윤경(輪耕) 화전 확대를 가져오는 식의 화전경영 단계에 앞서 1차적으로 이동에 의한 거주정착과 경지개간을 이루는 화전경영 단계가 있었으며 후자를 이끈 것은 씨족단위 이상의 촌락 단위였다. 그것은 지연적(地緣的) 공동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근재형(根材形) 화경(火耕) 농업이 개척 당시 거주단위였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지연공동체에서 가족중심 개척단위로 분화되면서 거주지 주변에서 이루어져 간 것이 제주도에 있었던 개척형(開拓型) 화전농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제주도 화전은 한라산 목장지대에 대한 농경지화(農耕地化) 정책의 일환으로 경목교체방식이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 화전의 기원은 경목교체방식과 아울러 고려시대 목장의 설치인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시대 중간 구목장지대가 설치되고 이 중간 구목장지대의 농경지화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제주도 화전에 대한 폭넓은 역사적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편 탐라에서 삼별초군을 평정한 몽고는 충렬왕 2년 제주에 목장을 설치했다. 한라산 산요부(山腰部)를 돌며 국영 목장이 설치됨으로서 목장지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를 통틀어 방목지를 경영을 한다는 것은 도민식량에 확보에 대한 부담이 커 그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었다. 급기야 조선 세종 때 한라산 목장과 구목장을 풀어 경작하도록 하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즉, 넓은 지역을 필요로 하는 방목중심경영은 인구증가와 그로 인한 식량확보 차원에서 농경지화 정책이 긴요했다는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중산간 지대의 목장전과 화전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원래 중산간 지대는 국마를 양성하는 목장으로 경작이 금지되었으나 이 시기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목장전과 화전경작이 허용되었다. 이로 인해 19세기 중반부터 화전을 개간하러 중산간 지대로 이주하는 주민들이 늘어갔고 화전동(火田洞)이 형성되었다.

 

<제주순무어사박천형서계(濟州巡撫御使朴天衡書啓)>(49면~53면)에 의하면, “산둔(山屯) 3장(場)은 둘레가 90리이고 지세가 평탄하여 물은 6군데에 있고 간간이 숲이 있으나 백성들이(入耕者) 들어가 경작하는 곳도 많으니 마필이 살찌지 않고 수가 줄어 6백여 필 밖에 안 된다고 하고 있으며 이어 목장의 범경(犯境)은 국법으로 금하는 바 제멋대로 목장 안에 들어가 경작하는 폐단을 없을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당시 제주의 도민들은 제주도 전체의 목장화로 인한 토지부족과 그로 인한 농업 생산 감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산간 구목장지대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개간하여 경작했다. 목장 안에서 불법적으로 경작하는 토지를 목장전(牧場田, 장전)이라 부르고 공한지나 황무지를 다시 개간, 경작하는 토지를 가경전(加耕田)이라 한다.

1894년 공마제도가 폐지되면서 목장토의 개간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제주도 전 중산간 지역에 머리띠를 두르듯(이를 말발굽형이라 함) 화전이 확대되어 간다. 1899년 5월에 전국읍지 편찬의 일환으로 작성된 <제주군읍지(濟州郡邑誌)> 중의 <제주지도(濟州地圖>에는 목장의 상잣성 위쪽으로 여섯 군데에 화전동(火田洞)이 표시되어 있다. 아울러 지도 뒤의 읍지 본문에 화전세를 수세하던 기록이 있어 산장(山場)이 있던 곳에 화전촌이 형성되었고 이들을 상대로 세금을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화전은 중산간 지대의 숲이나 산목을 불태워 경작하는 토지로 만약 매년 경작된다면 정규의 전세(田稅) 부과 대상이지만 부정기적으로 경작을 할 때에는 경작할 때마다 납세하는 수기수세(隨起隨稅)의 대상이다. 이 세목이 목장세(牧場稅), 가경세(加耕稅), 화전세(火田稅)이다. 구한말 대부분 제주지역의 민란은 화전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제주근대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정리가 필수적이다. 이 화전세에 대한 논의는 차후에 기회를 갖도록 하겠다.

 

일제강점기 제주도 농업지대를 서술한 久間健一(1946)에 의하면, 산간지대는 삼림지대의 하부에 있고 다음에 말하는 중간까지에 약 2~3리 폭으로 둘러쌓인 지대로서 옛날의 화전지대가 이에 해당된다. 경작지 면적 1만6천정보로서 제주도 총경지의 약 16.9%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의 이용 상황은 극히 원시적으로 방목, 또는 모초체취(茅草採取)에 이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경작에 이용되는 면적은 근소하다. 작물은 주로 대두, 조, 보리(제주도에서는 화전지역에 시비가 필요한 보리는 경작하지 않는다. 이는 久間健一의 착오로 보인다) 등인데 가장 이용도가 높은 것이 10년 3경, 심한 것은 10년 1경, 보통 것이 10년 2경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중간지대는 산간지대와 해안지대의 중간지역으로 한라산록에 있는 폭 1~2리 위요지대(圍繞地帶)이다. 경지면적 약 2만 7천 정보, 총 경지의 28.3%를 차지하여 토지이용은 상당히 진행되었으나 전경지의 5할 이상이 방목 또는 모초(茅草) 채취에 이용되었고 기타의 경지는 5년에 2~3경이다. 경지는 돌이 많고 땅이 박하기 때문에 이용가치가 적고 작물은 피, 교맥(蕎麥), 조, 대두, 밭벼류로 비료를 필요로 하는 맥작(麥作)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 지대는 구 목장지대에 해당하여 돌담을 쌓아 소나 말의 도망을 막았던 지역으로, 상부는 화전지대에 접하는 쪽의 돌담을 상잣성(上場城), 하부 돌담을 하잣성(下場城)이 중간에 중잣성(中場城)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화전은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한 농민층분해로 화전민들이 급격히 증가한다. 이에 대해 일제는 산림을 보호하는 명목으로 삼림령과 화전금지정책을 실시하여 화전을 금지시켜 나갔다. 제주도내 화전면적은 1919년 2,005단에서 1923년 1,708단, 1924년 1,413단으로 점차 축소되었다. 이처럼 제주도 화전은 구한말 이후 점차 축소되었는데, 이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한 농민층 분해, 유랑민 증가 등의 이유로 화전민이 급격히 증가한 육지부와는 다르다.

 

그 이유는, 아직 단정내리기는 어렵지만, 제주도 농촌사회의 노동력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일제강점기가 되면 일본이라는 소비시장의 확대로 해산물의 경제적 가치가 높아지고 그로 인해 제주도 농촌의 노동력이 해안마을로 집중되게 되었고, 또한 1920년대 이후 급격한 도일(渡日)로 인해 제주지역 노동시장에 커다란 지각변동이 생겼다.

 

제주도민 1/4 정도가 도일하게 되어 이로 인해 커다란 노동력 손실이 생겨나 이를 화전농업 혹은 화전지역 노동력으로 대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화전농업을 하지 않아도 제주도 농촌에는 경제활동 기회가 충분히 있었고 일본 노동시장으로의 진출도 가능함에 따라 화전민들이 거주나 영농방식의 변화를 모색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강원지역은 1970년까지 화전이 존재했지만 제주도는 이보다 빨리 사라졌다. 물론 지금도 봉성리 산간 산업도로 위쪽에 화전동이 있고 오라동이나 동홍동, 색달동, 영남리, 광평리 산간 등 곳곳에 화전마을 흔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제주도 화전은 토지조사사업과 도일로 인한 노동시장의 변화, 해산물의 가치 증가, 농업경영방식의 변화 등으로 급격히 화전이 줄어들다가 ‘제주4․3’ 으로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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